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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깊은 강』

by 선희 마리아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을 읽었다. 나는 일본 문학에 대해서 잘 모른다. 아는 일본 작가도 거의 없고 작품도 읽은 것이 별로 없다. 책을 고르는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개미들의 행렬과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한 책을 읽으면 그 책에서 언급한 또 다른 책을 찾아 나서는 일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내가 읽은 책에서 언급한 것을 따라서 만난 책이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이었다.

엔도 슈사쿠는 기독교적 기반이 약한 일본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엔도 슈사쿠는 대학을 졸업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의 일본 유학생으로 프랑스로 유학하여 가톨릭 대학의 청강생이 되면서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엔도 슈사쿠의 대표적인 소설로 유명한 『침묵』을 비롯하여 그의 소설 대부분이 종교적 색채를 짙게 드러내고 있는 것은 엔도의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나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그런데『깊은 강』에서 내가 느낀 것은 이 소설을 일방적인 기독교적 관점으로 쓴 종교 소설로 볼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른 척하며 외면하지만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대치하는 선과 악의 갈등, 현실에 쫓겨 어쩔 수 없이 물질적인 것을 쫓아 살아가지만 절대 진리에 대한 근원적 관심과 갈등으로 비롯되는 인간의 근본적 불안과 그 해소의 여정을 찾아가는 인간의 내면적 보편성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하였다.

『깊은 강』은 전체가 13장으로 이루어진 옴니버스식 소설이다. 여행사를 통하여 함께 패키지 인도 여행을 하는 이십여 명의 각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이드인 에나미, 유명 카메라맨을 지망하는 남자와 함께 신혼여행을 왔지만 여행 내내 불평을 일삼는 신혼부부, 암으로 투병하던 아내를 잃고 환생하는 자신을 찾으라는 아내의 유언에 따라 환생한 아내를 찾아 나선 이소베,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미얀마까지 가서 죽은 동료의 인육을 먹으면서 겪은 죽음의 거리를 지나 겨우 살아남았지만 참혹했던 동료들의 죽음을 잊지 못하며 괴로워하는 기구치, 어린 시절을 일본의 식민지였던 중국의 다롄에서 보내며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던 리라는 중국인 소년에 대한 기억과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올 때 끝까지 자신을 따라 달려오다 결국은 포기하던 검둥이 개의 슬픈 눈을 생각하면서 동물과 새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동화 작가가 되고, 밤을 새우며 글을 쓸 때 자신을 지켜주던 코뿔소새 피에로와 이 년에 걸친 투병생활을 지켜주다 죽은 구관조를 찾아 온 누마다, 삶의 목표를 찾지 못하고 방탕과 애욕으로 보내던 대학 시절, 자신의 미모와 부를 자랑하며 탐닉과 탐욕의 생활에 빠져보지만 환멸만 느끼고 인생의 허무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 비틀거리는 미쓰코, 보이지 않는 신을 찾으며 주변 사람들의 멸시와 유혹 앞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면서도 신을 향하여 다가가는 오쓰. 이런 여러 사람들을 통하여 인도 여행의 목적은 각각 다르지만 다양한 인생의 문제에 직면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인간 군상을 보여 주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제목이 되는 『깊은 강』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인도의 갠지스 강을 말한다.

갠지스 강에, 나루세 씨는 몇 번이나 가 봤습니까?” 기구치가 물었다. “두 번이요.” “ 덕분에 이제야 인도에 온 보람이 있습니다. 전 말이죠. 그 강이나 인도의 어느 절에서 죽은 전우들의 법요를 올리고 싶었는데, 이 나라에 불교도가 아주 조금밖에 없다는 사실을 몰랐었지요. 석가모니가 태어난 나라이면서도, 지금은 힌두의 나라인 거죠.” “ 하지만 그 강만은.” 미쓰코는 희끄무레해진 풍경에 눈길을 주면서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힌두교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깊은 강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293쪽.
일본 어디에도 이 바라나시 같은 도시는 없다. 그녀가 조금 알고 있는 파리나 리옹과도 이곳은 다르다. 사람들이 죽은 뒤, 그곳에 뿌려지기 위해 먼 데서 모여드는 강. 숨을 거두기 위해 순례하러 오는 도시. 그리고 깊은 강은 그런 사자들을 품에 안고 묵묵히 흘러간다. 299쪽.

이 소설을 전체적으로 끌고 가는 핵심 문장은

그는 아름답지도 않고 위엄도 없으니, 비참하고 초라하도다.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겨, 버렸고
마치 멸시당하는 자인 듯,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도다
진실로 그는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떠맡았도다’ 65쪽.

이다. 이 문장은 성경의 구약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구절로 앞으로 태어나실 예수님에 대한 계시이다.

소설의 전체적인 주인공은 ‘미쓰코’와 ‘오쓰’이다. 미쓰코와 오쓰의 이야기를 큰 축으로 하면서 함께 여행하는 이소베, 누마다, 기구치 등을 통해 인도를 찾는 사람들의 다양한 동기와 사연들이 펼쳐진다.

미쓰코는 대학 시절 ‘모이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모이라’는 청교도 학생이었던 조세프를 유혹하여 타락시키는 소설 <모이라>의 여주인공 이름이다. 소설 <모이라>의 배경처럼 미쓰코도 가톨릭 수도회가 운영하는 대학을 다녔는데 그 학교에도 조세프처럼 촌스런 교복을 입고 다니며 매일 일정한 시간에 쿠르톨 하임에 있는 채플실에서 기도하는 ‘오쓰’라는 남학생이 있다. 미쓰코는 방종과 애욕을 무기로 함께 어울리던 주변 남학생들의 부추김을 받고 장난 삼아 ‘오쓰’를 유혹한다. 오쓰는 너무도 쉽게 미쓰코의 유혹에 넘어가 자기가 따르던 신을 버린다. 오쓰를 타락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던 미쓰코는 자신 때문에 신을 버린 오쓰를 냉혹하게 차버린다. 사랑하지 않았던 오쓰와의 관계는 남녀의 관계가 아니라 오쓰가 매일 찾아 기도하던 신에게서 오쓰를 빼앗는 악마적인 계략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그 쿠르톨 하임에 가는 거 그만둬요. 그렇게 하면 당신을 내 남자 친구 중 하나로 삼을게요.” 지루함을 떨칠 셈으로 미쓰코는 거품처럼 얼핏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그리고 그걸 입에 담았을 때 그녀는 고지식한 조세프라는 학생을 유혹한 모이라도 지금의 자신과 똑같은 공허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였던가 싶었다. “좋아요.” 그녀는 우연인 양 그의 바지에 자신의 허벅지를 밀어붙였다. “오늘부턴 기도 따윈 하러 가면 안 돼요.” 한 남자로부터 그가 믿고 있는 걸 빼앗는 기쁨. 한 남자의 인생을 뒤틀리게 만드는 쾌락. 허벅지에 힘을 주면서 미쓰코는 침울해져 가는 오쓰의 표정을 쾌감을 느끼며 응시했다. 64쪽.

대학 시절의 방종과 애욕으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미쓰코는 충동적인 쾌락의 어리석음과 정신적 혼돈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극히 현실적인 것에 안주하기로 마음먹고 더없이 평범하고 착실한 야노와 결혼한다. 재력이 탄탄한 집안의 야노와 올린 화려한 결혼 피로연에서 미쓰코는 프랑스 리옹의 신학교에 갔다는 ‘오쓰’의 소식을 듣는다.

오쓰 이야기에서 화제를 돌리려 애쓰며 그녀는 오후의 쿠르톨 하임을 떠올렸다. 하얀 수도복을 입은 외국인 신부가 기도하던 그 채플. 계단 아래서 들려오는 시계의 차임소리. 제단의 십자가를 향해 그녀가 대들듯 내뱉은 말. “그 사람을 당신한테서 빼앗아 볼까요?” 그러나 두 팔을 벌린 무력하고 깡마른 그 남자는 어느 틈엔가 오쓰를 되찾았다. 하지만 내가 이겼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 신은 내가 버린 남자를 탐욕스레 다시 주웠을 뿐이야. 79쪽.

미쓰코는 남편인 야노에게 프랑스로의 신혼여행을 강력하게 원한다. 예술이나 종교에 관심이 전혀 없는 야노는 파리에서의 끝없는 미술관과 연극 순례에 지치고, 미쓰코는 결국 각자의 취향에 맞추어 신혼여행을 보낼 것을 제안한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집과 쇼를 보기 원하는 남편을 파리에 두고 미쓰코는 리옹을 찾아가서 신학생이 된 ‘오쓰’를 만난다. ‘오쓰’는 미쓰코에게 버림받고 갈 곳이 없어진 자기를 쿠르톨 하임의 깡마른 남자가 받아 주었다고 말한다.

“그럼, 오쓰 씨가 신학생이 된 것도.... 내 덕분이군요.”이렇게 말하고 미쓰코는 웃어 보였다. 그러나 억지웃음을 지은 얼굴이 파르르 떨리는 걸 느꼈다. “그렇습니다.” 비로소 오쓰의 뺨에 기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그 후로, 생각합니다. 신은 마술사처럼 뭐든 활용하신다고. 우리의 나약함이나 죄도. 그렇습니다. 마술사가 상자에 지저분한 참새를 넣고 뚜껑을 닫고는, 신호와 더불어 뚜껑을 열잖습니까? 상자 속 참새는 새하얀 비둘기로 바뀌어 날아오릅니다.” “당신이 그 지저분한 참새?” “예. 비참했던 내가.... 말입니다. 나루세 씨한테 버림받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런 삶을 살지는 않겠지요.” 93쪽.

오쓰의 말을 들으면서 미쓰코는 여전히 초라하고 비참한 그가 자신들과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파리로 돌아온 미쓰코는 골프와 신형 자동차밖에 화젯거리가 없는 남편과 초라한 수도복에 큼직한 목달이 구두를 저벅거리면서 벨쿠르 광장을 걷던 오쓰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착한 남자와의 지루한 결혼생활을 견디지 못한 미쓰코는 이혼한다. 이혼한 남편과 친정아버지의 도움으로 미쓰코는 시내에 부티크를 열어 유명 의상들을 구입하고 판매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랑의 흉내짓이라도 내보기 위해서 일주일에 한두 번씩 사립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자원 봉사를 하며 살아간다. 이 년 만에 나간 동창회에서 미쓰코는 오쓰가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미쓰코는 먼저 갠지스강에 갔다 온 일행들로부터 힌두교도의 복장을 한 일본인 신부가 길가에 쓰러져 죽은 힌두교도들을 화장터로 나르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이 오쓰라고 짐작한다. 미쓰코는 바라나시에 있는 수도원과 마을을 다니면서 오쓰의 흔적을 찾다가 거리에서 지저분한 힌두복장을 한 오쓰와 만난다. 오쓰는 예전과 똑같이 겁먹은 듯한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미쓰코와 마주 앉는다. 오쓰는 자신은 기독교의 신부이지만 교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쫓겨났으며 힌두교도의 아슈람에서만 버림받은 자신을 받아주고 따뜻하게 맞아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는 힌두교도들과 같이 살면서 죽기 위해 바라나시까지 왔다가 거리에서 죽었지만 갠지스강의 화장터까지 운반할 비용도 없는 비천한 천민들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오쓰는 신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힌두교에도, 불교에서도 살아 계신다고하는 자신은 대학 때도, 신학생 때도, 수도원에서도, 교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하였지만 자신은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고 그런 삶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갠지스 강을 볼 때마다 저는 양파를 생각합니다. 갠지스 강은 썩은 손가락을 내밀어 구걸하는 여자도, 암살당한 간디 수상도 똑같이 거절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를 삼키고 흘러갑니다. 양파라는 사랑의 강은 아무리 추한 인간도 아무리 지저분한 인간도 모두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흘러갑니다.” 280쪽.

미쓰코를 만난 다음 날에도 오쓰는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거리에 나가 죽었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찾아서 갠지스 강의 화장터로 옮기는 일을 계속한다. 사진작가로서의 특종을 꿈꾸는 산조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갠지스강의 화장터에서 몰래 시신의 모습을 찍다가 걸려서 도망친다. 분노한 인도인들은 쫓아가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오쓰를 두들겨 팬다. 오쓰는 화물차에서 부려지는 짐짝처럼 가트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피투성이가 되어 꼼짝하지 않는다. 미쓰코는 그런 오쓰를 발견하고 달려가 수건으로 피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준다. 오쓰는 시신을 날랐던 자신의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진다.

“안녕히.” 들것 위에서 오쓰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이걸로.... 됐어. 내 인생은... 이걸로 됐어.” “바보. 정말로 바보야. 당신은.” 하고, 오쓰가 누운 들것을 배웅하면서 미쓰코는 소리쳤다. “정말로 바보야. 그 따위 양파 때문에 일생을 망치다니. 당신이 양파의 흉내를 냈다고 해서 이 증오와 에고이즘밖에 없는 세상이 바뀔 턱이 없잖아요. 당신은 여기저기서 쫓겨나, 급기야 목이 부러져, 죽은 이의 들것을 타고, 당신은 결국 무력할 뿐이잖아요.” 주저앉은 그녀는 주먹으로 돌계단을 허무하게 쳤다. 319쪽.

일본으로 귀국하기 위해 공항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미쓰코는 안내인 에나미에게 오쓰의 상태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에나미는 공중전화로 전화를 하더니 돌아와 미쓰코에게 말한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미쓰코를 응시하더니 “ 당신의 친구, 크게 다친 일본인은.....”하고 침을 삼키고 말했다. “위독하답니다. 한 시간쯤 전부터 상태가 급변했습니다.” 325쪽.

이렇게 소설은 끝난다. 나는 이 소설에서 엔도 슈사쿠가 주인공을 통해 지금까지 쫓아왔던 것이

그는 아름답지도 않고 위엄도 없으니, 비참하고 초라하도다.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겨, 버렸고
마치 멸시당하는 자인 듯,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도다
진실로 그는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떠맡았도다’ 65쪽.

였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엔도 슈사쿠가 예수님을 전도하기 위해 이 소살을 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예수님으로 표현되는 절대 진리와 절대 선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진지하게 뒤쫓아 가는 여정이 이 소설이었다고 생각한다. 미쓰코는 결국 자신이 그토록 찾았던 양파(신)의 모습을 ‘오쓰’에게서 보게 된것이다.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에서 만난 아름다운 문장을 소개한다.

미쓰코는 미쓰코대로 옴짝달싹도 않은 채, 창밖의 너무나 짙은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 위에 다른 어둠을. 거기에 또 하나의 어둠을 겹겹이 중첩시켜 온통 덧칠한 듯한 암흑.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無明)의 세계란 이런 것이려니 그녀는 생각했다. 여태껏 이런 어둠을 본 적이 있었던가. 163쪽.
“여보.” 그는 또다시 강을 향해 불렀다. “어디로 갔어?” 강은 그의 외침을 받아 내고 그대로 묵묵히 흘러간다. 그런데 그 은빛 침묵에는, 어떤 힘이 있었다. 강은 오늘까지 수많은 인간의 죽음을 보듬으면서 그것을 다음 세상으로 실어 갔듯이, 강변의 바위에 걸터앉은 남자의 인생의 목소리도 실어 갔다. 285쪽.
(당신은)하고 오쓰는 기도했다. (등에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언덕(골고다)을 올랐습니다. 나는 지금 그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화장터가 있는 마니카르니카 가트에서는 이미 연기 한 줄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당신은 등에 사람들의 슬픔을 짊어지고, 죽음의 언덕까지 올랐습니다. 나는 지금 그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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