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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마리아 Jul 04. 2024

나 어릴 적에

다섯 살 난 여자아이가 있었다

한때 그 아이는 말끝마다
“내가 어릴 때는..”으로 시작했다

그 말에
그 아이의 다섯 해 남짓한
짧은 생애가
고무줄처럼 끌려 나왔다

그 아이는
자기가 살아온 다섯 해가
엄청 긴 세월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앞으로의 생이
지금까지 보다 몇 배나 더 길다는 것을
알 수 없는 그 아이는

종달새처럼
춤추며
‘나 어렸을 때는...’을
노래했다.

삶은
‘나 어릴 때에는...’이


더 많아지고
더 길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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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놀이터에서였다. 어둑어둑해져서 얼굴이 안 보일 정도의 시간이었는데 아이들은 소리 높여 서로를 부르며 놀고 있었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아이들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한 아이가 친구에게 말했다. "우리 사촌 형은 말이야... 이십일(21) 살이다." 굉장히 으쓱해하며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얼마나 웃었던지. 그 아이에게 21살은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숫자의 나이였다.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지켜 줄 수 있는 나이의 형이 있다는 자랑이었다.

어쩌면 그 아이는 외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친 형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사촌 형을 이야기했으니까. 가끔 보는 사촌 형도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가 아이의 목소리에 진하게 묻어 나오고 있었다. '스물한 살'이라고 이야기하지 못하고 '이십일 살'이라고 이야기하는 아이의 자랑스러움... 한참을 웃으면서도 가슴이 아려왔다.

어릴 적에 모든 것이 즐거웠고 재미있었던 다섯 살 여자아이는 스물한 살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노력형이었던 아이는 가족과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잘 성장하였다. 심성이 고왔고 주변을 잘 살피는 배려 깊은 아이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상위권을 지켰고 내신 1등급을 유지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서 본격적인 입시 준비를 해야 할 때, 여자아이는 그동안 팽팽하게 잡고 있었던 긴장의 끈을 놓아버렸다.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아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병원을 찾아다니면서 병명을 찾았지만 뚜렷한 병명도 나오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가서 가장 크다는 병원을 찾았다. 역시 병명은 분명하지 않았다. 지나친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눈이 일시적으로 안 보일 수 있으며 아주 서서히 회복될 수 있다고 진단하였다.

결국 아이는 휴학을 하였다. 가족 누구도 아이에게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잘하니까 잘한다, 잘한다 칭찬했던 것을 아이는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받았던 것이었다.

'나 어릴 적에'를 꾀꼬리처럼 노래하던 여자아이는 지금 스물한 살의 강을 조심조심 건너가고 있다. 가족 모두 아이가 무사하게 건너가기를 기도하면서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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