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의 인생이란 드라마 - 가족
아빠와 엄마는 이제 갱년기에 접어들었다. 나는 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고 새로운 사회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격변의 시기랄까. 이런 생물학적, 사회적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가족관계가 싹트기 시작했다. 회색 빛이던 관계가 약간은 녹색 빛으로 변했다. 이 집에는 갱년기라서 그런지 더 털털해지는 엄마, 같은 이유로 더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아빠, 그리고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씩은 알아가는 아들이 함께 거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 다른 관계 형성이 가능해졌다. 이대로라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튼튼한 분홍빛 가족 관계를 꽃피울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어느 날에는 아빠가 공부하고 있는 나에게 잠깐 시간이 되냐고 하더니 인터넷 주문은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었다. 아빠의 화면 속에는 인터넷 쇼핑몰 사이트 로고와 신발 사진들이 보였다. 스스로 신발을 주문하려고 시도하는 중이었다.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아서 나는 눈치껏 방 문을 닫지 않고 있었다. 곧 도움을 청할 것 같아서.
역시는 역시였다.
"아들, 잠깐 시간 돼? 아빠가 물어볼 게 있어서"
"응 괜찮아. 뭔데?"
"여기 아빠 이 신발이 괜찮아 보이는데, 이거 이 가격 맞는 거야?? 그런데 선택했으면 주문은 어떻게 해?"
나는 이것을 100%의 확률로 아빠가 아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다가오는 신호라고 느꼈다. 차도 있고 돈도 있는 아빠가 굳이 본인이 가장 불편해하는 인터넷 쇼핑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 요 앞에만 나가도 바로 이마트 있고 ABC마트랑 스포츠 용품점 많은데, 차라리 나가서 사올까? 오늘 나 시간 괜찮아. 같이 봐줄게. 어차피 장 보러 나가려던 참이었어. 그리고 인터넷 신발도 싸고 좋은데, 신발을 또 신어보고 사는 게 좋잖아! 요즘은 그리고 매장에 직접 가서 사도 신발 되게 싸더라. 나가서 보고 오자~"
그렇게 부자가 함께 마트로 향했다. 아빠 혼자라면 차를 타고 갔겠지만 가까운 거리는 죽어도 차를 타지 않는 아들 때문에 차는 집에 두고 출발했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도중 아빠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야, 아들아, 여기 이런 것도 있었냐? 아빠는 이 동네 30년 살면서 이 골목 처음 오는 것 같아"
나는 대답했다.
"그러니까 가끔은 차 타지 말고 좀 걸어. 골목마다 돌아다니면서 보면 이 작은 동네에도 얼마나 새로운 게 많은데. 좁은 골목 하나에도 매일 새로운 게 가득하다니까?"
그렇게 아빠와 나는 신발을 사고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함께 발을 맞추며 한 걸음 가까워졌다.
며칠 뒤, 아빠가 저녁에 집에서 반주를 한 잔 기울이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평소보다 오래 걸린다 싶더니 밖에서 동백꽃과 복숭아꽃을 꺾어왔다. 사실 복숭아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흰색, 분홍색 꽃이었다. 하지만 나랑 엄마는 식물을 꺾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심지어는 집에 있는 벌레조차 잡지 않는 사람들이다. 모기와 바퀴 빼고는 모두 살려준다.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에 꽃을 꺾어오다니, 아빠도 참 대단하다.
아빠가 현관을 열고 꽃과 함께 들어오는 순간, 엄마랑 나는 눈이 마주쳤다.
아마 엄마와 나는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잘 살고 있는 꽃을 왜 꺾어와요 도대체. 걔들은 살이 있어야 예쁜 건데. 밖에 놔두고 보자고요!'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니 그걸 왜 꺾어와?"라고 말했겠지만 그날따라 아무도 그 얘길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면서 아빠가 꽃을 담을만한 유리병을 찾아주었다. 그리고는 향을 맡았다. 아빠가 그 아름다운 것을 가족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을 거라는 마음을 이해하기에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 나서 다 같이 얼마 전에 새로 산 식탁에 앉아 이를 닦았다. TV를 보면서. 그 프로그램에는 배우이자 예능인이자 가수인 김세정씨와 그녀의 가족들이 출연했다. TV에서 그녀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 장면이 나왔다. 그때 문득 떠올랐다. "우리 가족은 번듯한 가족사진 하나 없구나"
나는 엄마아빠에게 "우리도 가족사진 한 장 찍을까?!"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내가 노리고 있는 때는 누나라는 지원군이 집에 오는 그날이다. 우리 집에 오는 유일한 손님(?) 격인 누나는 꽤 힘이 세다. 독립 8년 차인 누나가 집에 오면 뭐든지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은 부모 마음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아마 나 혼자서 얘기해봤자 엄마아빠 모두 "에이 무슨 가족사진이야. 집에 걸어둘 곳도 없고 놔둘 곳도 없어. 시간 맞추기도 어렵고 지금은 너희 누나도 없잖아"라고 했을 게 뻔하다. 하지만 누나가 집에 온다면 '누나가 없다'라는 조건은 충족된다. 더불어 둘의 추진력이 합쳐진다면 이건 99.99% 성공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가족사진을 찍는 것은 나중으로 잠시 미뤄뒀다.
조금의 아쉬움을 남겨둔 채로 기대되는 내일을 맞이하기로 했다.
그렇게 욕심부리지 않고 조금씩 관계를 회복하기로 했다.
부디 앞으로도 모두들 건강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