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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국 Dec 29. 2021

글쓰기와 민주주의

책을 쓰는 이유 (3)

    책을 읽지 않는 사회에서 직접민주주의란 공포일 뿐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좀 더 서로 합의하고 협력하는 사회를 바라며 글을 쓴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글이 많이 읽히는 사회라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이미 읽고 계신 독자는 세태에 반하는, 보통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분이다.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준다면 주변 사람에겐 안정감을 준다. 사람 간의 관계에서 예측 가능한 말과 행동을 해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일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을 할 때에는 뻔하지 않은 생각, 예측에서 벗어나는 생각을 한다면 다양한 관점을 이해할 수 있고 포용력이 커진다. 책을 많이 읽으면 뻔한 생각, 예측 가능한 생각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나는 시민의 좋은 삶을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성장해야 한다고 믿는다. 인간의 삶의 방식에 객관적 진리는 없다. 인간은 삶에 관한 포괄적 법칙을 서술하기 위해 자유, 평등, 행복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만들어냈다. 이런 가상의 개념들을 통해 개연적으로 옳은 법칙을 주장했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사람은 행복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이런 명제를 필연으로, 즉 모든 사람이 행복을 삶의 목적으로 여긴다고 받아들이는 순간, 이 명제는 실패한다. 구체적인 상황은 너무나도 다채롭기 때문이다. 극단주의자나 근본주의자는 개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득세할 때 독재자가 되어 구체적 상황을 살아가는 인간들을 파괴했다.


    포괄적인 범위에서 구체적인 범위로 좁혀야 비로소 필연을 논할 수 있는 건더기가 생긴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필연을 논하는 가설이 그렇지 않은 가설보다는 덜 틀린 가설이 될 것이다. 범위를 좁히지 않고 주장한다면, 좁혔을 때보다는 개연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모든 동물은 토끼를 잡아먹는다는 주장보다는 모든 육식 동물이 토끼를 잡아먹는다는 주장이 덜 틀렸을 개연성이 높고, 모든 육식 동물이 토끼를 잡아먹는다는 주장보다는 모든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다는 주장이 덜 틀렸을 개연성이 높다.


    독재는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보편적 옳음을 가정하여 대부분 실패한다. 독재가 실패하는 이유는 그것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특정 집단이 옳다고 믿는 가치관이 보편적으로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보편적 옳음을 주장하는 독재가 득세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는 쇠퇴하고 현실 세계의 다채로운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다시 고통받을 것이다. 적은 인원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려는 거라면 때로는 독재가 좋은 제도일지도 모른다. 팀원들의 가치관을 이해하고 융합하여 팀원 전체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의사결정을 해낼 수 있는 현명한 리더가 있다면 그렇다. 그러나 국가는 그렇게 하기엔 너무나 큰 범주다. 그래서 개연적으로 옳은 가치들 간의 충돌을 오랜 시간에 걸쳐 절충, 합의하며 지난한 발전을 하는 민주주의가 득세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합의다. 합의를 위해 시민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시민 각자의 가치체계가 뚜렷해야 한다. 이는 가치 간의 위계가 정립되어있는 걸 말한다. 가치체계가 뚜렷하다는 것은 완성이 있는 게 아니라 근육을 기르듯이 훈련을 통해 꾸준히 길러가는 것이다. 삶의 가치란 일률적이지 않다. 케바케, 사바사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는 이유다. 때문에 부단한 훈련이 필요하다. 어려운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훈련이 잘 되어있지 않은데, 이는 가격과 가치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가치를 가격으로 환산하는 쉬운 방법을 택한다. 숫자로 적혀있으면 대소 비교만 할 줄 알면 되기에 간편하다. 그러나 삶에서 중요한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다. 지나온 역사에서 대부분 인간은 목숨을 부지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기 때문에, 가치체계를 정립한다는 것은 속 편한 소리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재화 생산의 주체가 인간에서 기계로 전환되고 거의 모든 사람이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함으로써 각 개인이 삶의 목적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가 올 것이라 믿는다.


    둘째, 타인에 대한 포용력이다. 내가 믿는 좋은 삶의 방식이 중요한 만큼 타인이 믿는 좋은 삶의 방식도 중요하다.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독창적인 세계다. 각자의 유전자 및 삶에서 겪어온 경험의 총체가 그 사람의 가치체계를 결정한다. 좋은 삶의 방식에 진리는 없다. 각자가 다른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이다. 이 사실을 수용하고 타인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합의에 이를 수 있다.


    어떤 삶의 방식이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고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하는 게 아니라면, 각자가 옳다고 믿는 삶의 방식에 따라 자유롭게 살겠다고 해도 핍박하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좋겠다. 아직까지는 그런 사회가 되기엔 포용력이 부족한 듯하다. 소신껏 사는 사람을 사회 보편의 잣대로 재단해서 패배자라고 낙인찍거나 갖은 모욕적 표현으로 타자화하는 사례를 우리는 흔히 접한다.


    셋째, 의사소통 능력이다. 나의 가치체계가 뚜렷하고 타인의 가치체계를 포용할 수 있더라도, 이러한 의사를 표현할 수 없다면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 여기에는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능력과 타인의 의사를 파악하는 능력 양쪽을 포함한다. 양쪽 중 하나만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제대로 된 의사소통에 이르지 못한다.


    가치체계 정립, 포용력, 의사소통 능력. 이 세 가지 자질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높일 수 있도록 나는 글을 쓰려한다. 나의 글에서 객관적 진실을 말한다는 듯이 서술한 문장이 보이면, 그 문장은 잘못됐다. 전제를 참이라 가정하고 결론이 참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전제란 파고들수록 그것의 설득력은 논리가 아니라 믿음에 달려있다. 궁극의 전제에 도달하면 그것은 믿어질 뿐이어서 객관적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누군가 객관적 진실을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뭘 모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실이라 칭하는 것은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하나의 가설이다. 객관적 진실을 드러내진 못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가설은 틀렸다. 그러나 어떤 가설은 객관적 진실에 더 가까운 가설이고 어떤 가설은 유용하다. 나는 진실을 전하려는 게 아니다. 어떻게 가설을 객관적 진실이라고 믿게 되는가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를 이해하게 되면,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그것이 만고불변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생각이 널리 퍼지면 보편적 필연이 득세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개인 혹은 집단이 옳다고 믿는 것을 강요하여 사람들이 고통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믿고 있는 진실이 믿음일 뿐임을 깨닫고 그것에 대한 집착이 줄어들게 된다. 집착이 줄면 서로 상충하는 믿음으로 인한 갈등이 생겼을 때 양보하고 절충하여 합의에 이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갈등이 초래하는 상처를 예방하거나 치유한다. 상처가 치유되면 충돌하는 상대에 대한 감정이 해소되어 다시 합의에 이르는 윤활유가 되는 선순환이 형성된다. 그리하여 민주주의가 성장한다.



책을 쓰는 이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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