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번째 상자: 서예

한석봉이 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by 지현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간헐적으로 서예를 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딱히 서예시간이라고 시간표에 고정된 것은 없었지만 선생님이 내일은 서예를 할 거라고 말하시곤 했었습니다. 사실 서예라고는 해도 글씨는 엉망진창이고, 몇 번을 해도 딱히 나아지지는 않았지만요.


서예시간에 쓰는 물품이 다 들어간 검은색 가방을 문구점에서 팔곤 했었습니다. 서당에서 혼나고 공부하고 하는 그림이 들어가 있었는데 안에는 먹물과 먹, 벼루, 붓, 문진, 그리고 아직까지도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 '연적'이 있었습니다.


화선지도 사서 벼루에 먹물을 넣고 먹을 갈았는데 생각해 보면 이미 먹물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먹물이고 연적이고 하는 도구들은 그냥 기분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어린 시절에 이런 것을 한다고 하면 마음이 경건해지기 마련이라서, 사극에서 나오는 과거 시험 보는 선비의 각오로 글자를 쓰곤 했습니다. 가끔 제가 글씨를 너무 잘 써서 어딘가 스카우트되거나 서예가가 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시작하기도 했는데 단 한 번도 엄청 잘 써 본 적은 없습니다.


덤벙거리는 저는 다음 날 할 일을 가끔 까먹곤 했는데, 서예 수업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까먹고는 몇 번이나 서예 수업이 있는 날에 흰 옷을 입고 학교게 갔었습니다. 한 번은 흰색 티셔츠와 제가 아끼는 흰색 치마로 완전 새 하얗게 학교에 갔다가 서예 수업이 있는 날임을 깨닫고는 절망했던 적도 있습니다. 물론, 그날 먹물이 튀겼고 슬픈 마음을 가지고 집에 돌아갔었습니다.


획 하나를 그을 때마다 숨을 멈춰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에 감명을 받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도 멋진 글자는 쓰지 못했었습니다. 그래도 평소에는 휙휙 휘갈겨 내려가던 글자를 더 오랜 시간에 걸쳐서 꼼꼼하게 완성하는 과정은 또 다른 감각이자 즐거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붓 빠는 걸 깜빡해서 양쪽으로 갈라지기도 하고, 아끼는 흰 옷에 검정 물을 들이기도 하고, 결과물에 절망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즐거운 추억거리를 만들어준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도 결코 쉬운 시간이 아니었을 텐데 저희한테 무엇을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걸까요?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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