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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다

소재 : 어머니

by 벨라 Mar 19. 2025

결혼 후 친정에 가면 꼭 하는 일이 있다. 새벽에 여자들끼리 목욕탕 가기. 이번 구정에도 엄마는 어김없이 곤히 잠든 딸들을 깨웠다. 긴 패딩 안에 대충 옷을 껴입고 목욕탕에 갔다. 올해는 부스럭 소리에 깬 딸도 따라나섰다. 목욕탕 주인이 작은 창문에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무심히 손녀가 할머니 닮았다고 했다. 내 딸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엄마는 탕에 들어가기 전부터 보는 사람마다 반갑게 아는 체하며 우리를 소개했다. 알몸이라 민망했지만, 웃는 얼굴로 최대한 공손히 인사했다. 어느새 우리 목욕 바구니는 우유, 비타 500, 캔 음료, 요구르트로 가득 찼다. 딸들과 손녀에 대한 그들의 반가움의 표시다.

“우리 엄마 목욕탕에서 인기쟁이네.”

“사람들이 날 다 좋아해. 내가 점잖아서 다들 언니라 부르며 잘해줘. 근데 이거 받으면 다시 갚아야 하는데 뭐 이리 많이 줬대….”

앓는 소리를 냈지만, 기분 좋은 얼굴은 숨길 수 없었다. 엄마는 사우나에서 친구들과 화투치고 수다 떨는 것이 낙이다. 그곳에서 여섯 자식 시집, 장가 다 보내고 손주도 13명이라고 하면 모두 놀라며 부러워한다고 했다. 자식들은 언제나 엄마의 전부였다.

 

목욕탕에 가면 등은 항상 엄마에게 맡긴다. 내 등은 유별나 엄마에게 맡겨야 더 개운하다. 아프다고 괜한 엄살을 피우며 난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 엄마도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을까. 오래전 들었던 넋두리 같은 엄마의 슬픈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 고향은 금봉리라는 작은 산골 마을이야.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때였을 거야. 교과서까지 받아놨는데, 아버지 노름빚을 갚아야 해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식모살이하러 갔어. 그런데 너무 힘들었어. 데리려 오지 않으면 죽어버린다는 편지를 몇 통 보내고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 그런데 집에 돌아가고 얼마 뒤, 이번엔 큰오빠 뒷바라지를 위해 다시 식모살이하러 가야 했지. 그런 생활이 18년째 되던 해일 거야. 아버지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남자와 결혼시킨 게. 사진관에서 처음 만나 바로 결혼사진 한 장 찍고 낯선 남자와 함께 살았지. 그게 지금 네 아빠야. 내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엄동설한에 술에 취해 논두렁으로 굴러 그대로 돌아가셨어. 엄마는 젊은 나이에 치매에 걸리셨지. 엄마는 내가 모셨어. 귀하게 키운 큰아들 집이 아닌 우리 집에서 돌아가셨지. 그때 난 울지 않았어.


엄마는 항상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엄마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하다. 훌륭하게 살아내어 내 엄마가 되어 준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엄마는 자식에게 한 번도 큰 소리로 야단치지 않았다. 자식이 결정하고 해 나가는 일에 절대 반대한 적도 없었다. 난 너무 무관심하게 느껴져 서운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우리 모두 독립해 잘 성장하여 어른이 될 수 있었다. 아이를 키워보니 미덥지 않은 자식 야단치지 않고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 엄마는 김치며 반찬들을 바리바리 챙겨 우리 차에 가득 실어주셨다. 나는 차창을 내리고 우뚝 서 있는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었다. 


- 수필 <언젠가 꽃필 너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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