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부터였다. 나는 혼자인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것 같았다. 가면을 쓰고 친구들 앞에서는 공주 놀이를 하는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 집에서부터 학교까지 가는 길에 나산 강이라는 큰 강이 흘렀다. 학원 하나 없던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는 야간 자율학습을 했는데, 어두운 밤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우울한 생각들이 마구 올라왔다. 그 강을 지날 때면 강물에 빠져 죽고 싶었다. 까맣고 넓은 강물이 외롭고 힘든 나의 마음을 따뜻하고 포근하게 감싸 안아줄 것처럼 보였다. 고통 없이 깨끗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저녁에 설거지를 하다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매일 고기반찬 하나 없는 밥을 먹고 홀로 설거지를 하고 있으니 마치 소녀가장이라도 된 듯 삶이 무겁고 싫었다.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고 친구들과 비교되는 나도 싫었다. 그 순간 식칼이 눈에 들어왔다.
'식칼로 손목을 그으면 죽는다던데 그어볼까?'
하지만 내가 피를 흘리며 누워있으면 할머니가 놀라실 텐데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강물에 빠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나 외로워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나 붙잡고 내 처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곁에 있는 할머니는 불쌍했다. 혼자 새벽에 나가 밭일을 하고 옷은 언제나 구멍 나고 늘어난 내복과 몸빼 바지뿐이었다. 추운 날에는 돈 아낀다고 보일러도 틀지 못하게 할 정도로 돈을 아끼셨다. 가끔 서울에서 내려오는 아빠는 무서웠다. 늘 나에게 화내고 다그치기만 했다.
그 당시 내 마음을 말할 수 있는 존재는 학교 친구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는 서울에서 내려온 당당하고 멋진 공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오히려 친구들의 힘듦을 들어주는 역할이지 나의 아픔을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친구들에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6년 내내 부모님의 이혼 사실을 숨기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혼자라고 포기하지 말아 줘
사춘기부터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내면에는 말하지 못한 슬픔들이 빽빽이 들어찼다. 워낙 습관이 되었던 탓에 나조차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누구나 다 이렇게 사는 게 아닐까. 친구랑 만나 수다를 신나게 떨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외로움을 느끼면 혼자인 게 싫었다. 밝고 시끄러운 버스에서 내려 어두운 밤길에 서 있으면 갑작스러운 적막함에 ‘내가 왜 살지?’ 하고 의문이 들었다.
나산 강을 바라보며 죽음을 생각했던 날처럼, 혼자 있는 밤이 되면 습관처럼 우울이 찾아왔다. 그러다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면 기뻤다. 날 찾아주는 사람이 있어 기뻤다. 친구들에게만큼은 만화 속 캔디처럼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웃었다. 전화가 반가워서 그 누구보다 친절하게 전화를 받았다. 친구들은 나에게 고민을 자주 털어놓은 편이었다. 그리고 항상 이렇게 말했다. "힘들 때 네 목소리 들으면 기분이 나아져. 밝게 웃어줘서 힘이 나. 고마워." 난 마치 이게 훈장처럼 여겨졌다. ‘그래 나 그런 사람이야. 나한테 다 말해 들어줄게.’ 하지만 그 훈장은 주홍글씨가 되어 나의 마음을 더욱 썩게 만들었다.
나의 밝음과 우울 사이에서 나 조차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나의 삶은 스스로 죽음을 생각했던 밤과 공주처럼 웃으며 지내던 낮의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마치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는 사람 같았다. 워낙 어려서부터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것이 아픔 인지도 몰랐다. 나의 아픔이 시작된 날은 아마도 그때부턴 인 것 같다.
나의 14살. 시골로 전학 간 바로 그날이었다. 3월인데도 얼음장같이 싸늘한 기운이 가득한 작은 방이었다. 차가운 바닥에 날 앉혀놓고 아빠는 말했다.
“이제부터 인생은 너 혼자야. 앞으로 뭘 하든 네가 결정하고 너의 힘으로 해내야 해” 큰 눈을 부릅뜨고 말하는 아빠 앞에서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혼자야. 난 혼자야. 14살의 봄, 나는 혼자가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혼자가 된 내가 어른처럼 스스로 많은 것을 해내야 했던 환경에 놓였다. 혼자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지나치게 밝은 척을 했고 자신에게 엄격하게 대했다. 뭐든 잘해서 주목받고 싶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아이가 되고 싶었다. 부모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밖에서라도 받고 싶었다. 밝을 때의 내가 좋았다. 사람들이 날보고 웃으면 광대라도 되고 싶었고 그때만큼은 사랑받는다고 착각했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은 척했던 날들의 시작. 아빠가 그때, ‘우리가 떨어져 있어도 넌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해주었다면 난 달라졌을까.. 아니면 혼자라는 말을 상기시켜준 덕분에 그나마 가면이라도 쓰고 잘 지낸 척하고 살았을까. 14살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넌 혼자가 아니야.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건 수많은 축복이었어. 가끔 힘든 일이 오더라도 금방 지나갈 거야. 그리고 힘들 땐 언제든 기대도 돼. 넌 충분히 지금 그대로 괜찮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