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마음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간다. 파릇한 봄기운이 만연한 어느 날이었다. 막 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3년 내내 입을 거라 다소 큰 교복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고 수업을 받고 있었다. 중학생이라는 설렘이 가득한 수업시간이었다. 수업 중간에 교실 앞문을 쾅 열고 나타난 사람에게 같은 반 아이들의 온 시선이 쏠렸다. 나의 아빠였다. 선생님은 아빠와 잠시 얘기를 나눈 뒤 나에게 책상과 사물함에 있는 물건을 전부 챙겨 아빠에게 가라고 했다. 그렇게 갑작스레 큰 트럭을 타고 나타난 아빠는 나를 서울 영등포에서 전라도 깡 시골로 전학시켰다.
논과 밭으로 둘러싸인 곳. 그곳은 내가 방학이면 놀러 가는 할머니 댁이었다. 그날 부모님은 이혼을 했고, 나는 친구들과 인사 한 마디도 못한 채 시골로 혼자 보내졌다. 서울에서 눈이 크고 피부가 하얀 여자아이가 내려가니 시골 아이들은 나를 신기해했다. 쉬는 시간마다 나를 보러 몰려온 아이들에게 서울 생활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땐 내가 아이돌 가수에 빠져 있을 때라 방송국에 자주 놀러 갔었다. 그 시절 인기 프로그램인 손범수가 진행하는 가요톱텐 방청에서 꿈의 아이돌인 HOT를 껴안고 도망친 썰을 풀었다. 내가 찍은 연예인들 사진과 직접 받은 사인을 보여주며 서울 생활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고작 반이 하나인데 그 마저도 20명이 될까 말까 한 작은 학교에 나는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그야말로 티 없이 밝게 자란 공주님 같은 이미지였다. 그들에게 보여지는 나는 서울말을 쓰고, 방송국에 가봤고, 얼굴이 하얀 데다 치마를 입었다. 오로지 나만 핸드폰을 가지고 있던 그 시절, 친구들에게 내가 서울에서 내려온 공주처럼 여겨지는 건 당연하듯 보였다.
서울 공주님의 비밀
하지만 학교가 아닌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공주님과 거리가 멀었다. 모서리가 다 까지고 다리 하나가 휘청거리는 밥상 위에는 배추 국에 김치가 전부였다. 같이 사는 할머니는 논과 밭일에 더 신경을 쓰셨지 서울에서 내려온 손녀인 나를 특별히 애정 하진 않으셨다. 오히려 일 년에 두세 번 내려오는 장손을 더 챙겨주었다. 특히 더 비교가 되었던 건 장손이 나랑 동갑이었다. 같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남자라는 이유로 걔를 더 많이 챙겨주는 할머니의 모습을 여러 번 봤다.
우리 할머니는 키가 크셨다. 키가 작은 내가 보지 못하게 찬장 맨 위에 밥그릇을 놓고 그 안에 장손을 위한 것들이 가득했다. 누룽지 사탕과 캐러멜, 꼬깃꼬깃 접힌 천 원짜리 몇 장을 항상 그곳에 숨겨놓고 명절 때마다 장손에게 챙겨주었다. 평상시에 나는 받아본 적도 없는 것들이었다. 차라리 내가 보지 못하게 챙겨주지. 난 그걸 볼 때마다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나한테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고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내가 무엇을 먹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티브이에 나오는 햄버거를 보고 내가 ‘맛있겠다!’라고 한 마디 했더니 할머니는 내게 윽박을 지르셨다. 넌 뭣이 그렇게 먹고 싶은 것이 많냐고 하셨다. 매번 시래기 된장국에 밥만 먹고 소풍 가는 날 김밥 한 번 싸주지 않는 할머니가 밉기만 했다.
장손만 챙겨주고 나한테는 맛있는 거 하나 안 해주는 할머니에게 내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차라리 섭섭하다고 말했으면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챙겨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농사일에 힘들어하는 할머니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엄마와 아빠 없이 보내져서 할머니한테 괜히 짐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투정도 못하고 혼자 가슴에 큰 멍만 들었었다.
시골에서 혼자 외로움을 쌓는 동안 많을 것을 느꼈다. 아침이면 학교가라고 깨워주는 엄마가 이렇게 그리운 거구나, 집 앞에 있던 햄버거 가게가 당연한 게 아니었구나,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는 거였구나. 그중에 가장 서러웠던 건 성장기가 시작되고 브래지어가 필요했는데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사실 브래지어가 필요할 만큼 성장이 시작되진 않았었다. 나는 키가 작고 성장이 꽤 느린 편이었다.
브래지어가 필요해
장난기가 한창인 14살의 남자아이들은 여자 아이들 등을 긁는 장난이 유행했었다. 조용한 수업 시간, 자리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으면 장난꾸러기 몇 남자아이들이 뒤에서 펜으로 등을 세로로 긁는다. 그러면 브래지어가 탁 걸리는 느낌이 오면 킥킥 대고 즐거워한다. 여자 아이는 화를 내면서 하지 말라고 부끄러워한다. 남자아이들은 그걸로 여자 아이가 브래지어를 했는지 안 했는지 알기도 하고 성장기에 접어든 여자들을 놀리곤 했다.
아무래도 시골이다 보니 같은 초등학교에서 같은 중학교를 가는 일이 많았다. 반도 하나뿐이니 거의 사촌 지간처럼 가까울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장난을 쳤던 것 같다. 나는 다른 남녀 공학인 중학교를 다녀보지 않아서 이게 선을 넘는 장난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때 내가 든 마음은 어서 브래지어를 사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사야 할지 몰랐다. 지금처럼 인터넷 쇼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작은 시골 읍내에 하나뿐인 속옷가게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밖에서 슬쩍 본 속옷 가게는 디자인도 촌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행여나 소문이라도 날까 싶어서였다.
그렇다고 밭일에 바쁜 할머니에게 부탁하자니 그것도 싫었다. 할머니의 속옷을 보면 구멍 나서 늘어난 팬티뿐인데 그와 비슷한 속옷을 사다 줄 것이 분명했다. 사춘기가 접어들 무렵 나는 브래지어 하나 사다 주는 사람이 없어 무척 난감했다.
어느 날 동갑이었던 윗집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친구랑 놀다가 화장실에 갔다. 우연히 빨래 바구니 안에 입고 벗어놓은 브래지어를 보았다. 원래는 하얀색인데 베이지 색으로 변해버린 레이스가 달린 브래지어였다. 난 색 바랜 브래지어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른 채 보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행여나 끈이 삐져나올까 봐 구깃구깃 집어넣었다. 그리고 친구한테 할머니가 부른다는 변명을 하고 황급히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구겨진 브래지어를 주머니에서 꺼내었다. 다행히 친구 엄마 것은 아니고 친구 것이었다. 친구는 나보다 덩치가 커서, 내게는 넉넉한 사이즈였다. 어깨 끈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나는 그 브래지어를 3년 내내 입었다. 냄새나는 빨래 바구니에서 훔쳐 온 브래지어가 나에겐 굉장히 소중했다. 남자아이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고 성장기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걸 들킬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그런 사춘기를 보냈다. 학교에서는 서울에서 내려온 공주 같은 아이였지만, 집에서는 브래지어를 훔쳐 입어야 하는 혼자 많은 것을 감내해야 하는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