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희은 Mar 30. 2024

설렘과 확대해석

타인의 호의에 자주 설렌다면

우연히 편의점에서 그를 마주쳤다.


"희은씨,"



"좋아하는 책이 뭐에요?"


우리는 각자 먹을 것을 사서 앉았다. 내가 그에게 좋은 감정을 가졌기 때문일까. 나는 초장부터 그런 질문을 던지는 그가 무척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책을 공유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쉽게 꺼내지 않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어쩌면 나의 내면으로, 서로의 내면으로 깊게 침투할 가능성을 열어 둔다는 것이니까.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일까? 혹은 나를 좋아하는걸까?'


오랜만에 나의 감정과 생각을 오롯이 나누었다. 그는 묵묵히 들었고, 종종 공감의 말을 했다. 그리고 소소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정신줄 빠지게 웃겼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말하면 웃기겠지?' 하고 생각해서 말한 듯한 그의 마음이 느껴지는 농담이었다.


그는 꽤나 상상을 즐기는 듯 했다. 흔히 말하는 MBTI 'N'의 사람이랄까. "만약에 5년 사귄 남자친구가 있어요. 그런데 어느날 어떤 남자가 희은씨를 설레게 하는거에요. 그럼 어떻게 할것 같아요?"


그의 질문은 나를 적잖이 당황시켰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불륜, 또는 환승이라는 주제로 함께 대화해 본 남성은 오로지 남자친구 뿐이었다. 나에게 있어 불륜과 환승은 왠지 모르게 온몸이 짜릿해지는, 도파민이 터져 나오는 주제였다. 그렇기에 내 도파민을 허락하는 유일한 사람인 남자친구 이외에 누군가와 이러한 대화를 해보고싶지도, 해볼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나는 지금까지 2년동안 만나온 남자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사내 연애였기에, 남자친구와는 거의 2년간 비밀 연애를 하는 중이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이 아주 모를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공개적으로 연애하다가 만약 헤어졌을 때를 생각하면, 나는 이 작은 회사에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상상되었고, 결국 나는 버티지 못하고 퇴사를 할 것만 같았다. 남자친구 또한, 회사 내에서 독립적인 커플로서 우리의 관계를 공개하기 꺼려했다. 전체의 분위기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는 단계라고 생각했고,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회사를 떠나게 되거나 우리가 결혼을 결심하게 되면, 그 때서야 공개를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고 비밀연애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는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얼마 전 회식에서 누군가 나에게 "희은씨 남자친구 있어요?" 라는 질문을 했고, 나는 "아니요" 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자리에 있었다. '만약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니,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 또한 증폭되기 시작했다. 이 죄책감은 비단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것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던진 "남자친구가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당신을 설레게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사실 정확히 나의 내면을 간파하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최근들에 나에게 여러 가지 호의를 베푼 그에게, 나는 고마움 그 이상으로 적잖은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의 질문은 마치 "지금 희은씨에게 남자친구가 있지만, 나에게 설레나요?" 라는 질문으로 오버랩 되어서 들렸다.



괴로웠다. 모든걸 잊고, 잠에 들고 싶었다. 이 회사를 들어온 내 자신을 탓했다. 비밀연애를 고수한 내 자신을 탓했다. 남자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대답한 내 자신을 탓했다. 그리고 새로운 남자에게 설렘을 느낀 내 자신을 탓했다. 나는 그날 밤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남자에게 설레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남자친구가 '있다'고 대답할 수 있는 그 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비밀연애 하는 것을 감수할지 말지, 결정하기로 한 그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세심한 사람이다. 그냥 주변 지인들에게 잘 해준 것 뿐인데, 내가 혼자 김칫국을 마시며 설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항상 그래왔듯이, 사람은 모두 완벽하지 않다. 내가 설레는 이유는 그의 단면을 보고, 어느 정도 그를 이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남자친구보다 더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기 때문에 설레는 것이다. 사실 그도 똑같다. 몇 년 지나보면 장단점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남자친구만큼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설렌다는 것은, 단편적으로 그 사람의 작은 장점만을 보고 그것을 확대해석 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아빠에게 쓰는 편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