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봐! 이게 바로 할머니들의 기싸움이다

진정한 배틀 고수들의 현장 구경

by 외강내유 이모씨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과감한 대시


오랜만의 브런치 원고. 1년 4개월 여 만이다. 그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겼고 엄마와 분가했으며 하던 일도 일단 휴지기에 들어갔다. 인생의 불운엔 누구도 예외가 없음을 체감했다. 차차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오늘은 평소 너무 무겁고 진지한 글만 올린 것 것 같아, 가벼운 에피소드 하나.


엄마를 모시고 종각역 근처 조계사를 다녀왔다. 조계사 앞마당에는 의자가 쭈욱 놓여 있는데, 대웅전에 못 들어간 신도들이 기도도 하고, 쉬기도 하는 용도.


그날 엄마는 맨 앞줄에 앉아 계시더니 의자를 옆으로 당겨 낯선 분과 대화를 시작했다. 엄마는 당신 스스로는 낯선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친구를 못 사귄다고 하시는데, 내가 보기에는 타인에게 적극적인 대시를 서슴치 않는 타입. 쓰윽 곁눈질하니, 상대는 머리칼은 백발이었지만 고운 자태의 할머니였다. 우리 엄마보다 입성도 훨씬 나아 보이고(이럴 땐 내가 좀 찔리더라), 인물도 나아 보이...(이건 뭐 나랑 무관...) 연배는 조금 더 젊어 보였다.


“어디서 왔어요?

“원래 대구에서 살다가 서울 온 지 3년 넘었어요. 아들이 서울 살아서."

“나는 젊어서 서울에 와서 아직까지 계속 살고 있어요.”

(의정부에 2년 살면서, 엄마의 강력한 서울부심에 당황한 기억. "왜, 여기 이사온 거야? 내가 젊어서부터 평생 서울 살았는데, 다 늙어서 지방 살기 싫다." 이 말을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 누가 들으면 광화문 한복판이나 강남에라도 살았던 줄...)


“누구랑 사세요?”

“남편 세상 뜨고 혼자 살아요.”

“아유, 혼자 적적하겠네. 나는 딸이랑 살아서 좋아요. 딸이 맨날 차 태워 데리고 다니고."

(그 딸이 바로 나임. 평소 늘 지청구에 불만만 이야기하시는 양반이... 뭐래?!)


남의 자식 학벌은 왜 묻냐고요?


“자제분은 몇 명이나?”

“아들만 둘이에요,”

“나는 아들 셋, 딸 하나예요. 친정아버지 말씀이 3남1녀는 옥황상제가 점지해주는 거라고 하시더라고.”

(좋겄수. 맨날 아들 다 소용없다. 늙은 에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화도 안 하고, 하시더만...)


"그럼 생활비는 어떻게 해요?"

"남편이 남긴 연금이 있어요. 아이들이 용돈도 주고, 뭐 괜찮아요."

"자제분들이 돈을 잘 버나봐요. 대학은 어디 나왔어요? 우리 딸은 0대 나오고, 손자들은 Y대 나왔는데..."

(다른 대학 나온 자식들은 싹 빼버리는 선택적 진실... 당황한 내가 미처 만류하기도 전에 상대 할머니의 대답이 날아옴)

"우리 아들은 둘 다 고려대학 나왔어요."

(우리 엄마 움찔. 오, 흥미진진. 잊어버릴까봐 핸드폰 메모장 열고 입력 시작.)

"우리 딸은 대학 나와서 계속 일했는데..."

(상대방 관심 없음.)


빠른 국면전환 솜씨, 정치를 했어야 했나...


"고향이 어디세요? 나는 함안 조씨인데, 00이 고향이에요, 우리집은 원래 유교집안이에요. 친정 조부님은 도산서원 원장도 몇 차례나 하시고 돌아가셨을 때 각처에서 제자랑 조문객이 얼마나 블라블라~"

"고모가 00으로 시집 가서 그 동네 알아요. 나는 영천 서씨(로 들었음)로 우리도 양반이에요. 고향집에는 사당도 있는데 거기에 큰 칼 같은 유품도 있어요."

(족보학(?)에 대한 지식이 짧아 우열 판정 불가하나, 사당 있는 집이 더 센 거 아닌가?)

"아, 그래요? 칼이 있었다니 무관집안이었나? 우린 글공부하던 집이었는데..."

"아니에요. 집안에 대제학도 나오시고, 벼슬도 많이 하셨어요."

(대제학이라니!! 우리 엄마 깨갱이다. 내가 알기로 엄마 집안이 글공부하던 집이긴 한데, 중앙의 벼슬은 못하고 유생 정도 되었던 듯)


"하긴 요즘 세상에 양반상놈이 어딨어요. 돈 많으면 양반이지."

(하하하.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였다.)


선을 넘는 질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하는 그 분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빠른 국면전환을 시도하는 우리 엄마도, 실로 대단하더라. 내공을 건 할머니들의 기싸움을 지켜본 기분이랄까. 속으로 배틀 종료를 선언하고, 실실 나오는 웃음을 감추며, 엄마를 모시고 황급히 퇴장.


*작년 봄의 에피소드 한 편이다. 이렇게 순발력 있게 받아쳐 놓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는 거짓말처럼 대화내용을 전혀 기억 못하셨다는 웃픈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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