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대신 쓰는 엄마 시점의 ‘마이 스토리
불행은 언제나 예고없이 찾아온다. 졸업 후 취업을 한 딸이 사준 내복을 겨우내 입고 다니던 남편이 갑자기 쓰러졌다. 유난히 추위를 타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봄이었다. 겨우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남편은 황망히 세상을 등졌다. 맏이인 딸은 취업을 했지만 아직 중학생인 막내까지, 나는 네 아이를 혼자 키워야 하는 과부가 되었다. 고향집에선 서울생활이 힘들어서 병이 생긴 것 같다고 하는 이야기도 들렸는데, 그건 굳이 서울로 가자고 한 나를 비난하는 말로 여겨졌다.
무너지면 안 된다. 보란 듯이 살아내야 한다. 집을 처분해서 전세로 옮기고 남편의 순직 보상금과 퇴직금으로 생활을 이어갔다. 다행히 보훈가족이 되어 정부의 도움으로 세 아들 모두 등록금을 내지 않고 대학을 다녔다. 자식 모두 4년제 대학을 졸업한 건 집안에서 우리뿐이다. 대학생일 때는 내가 나서서 보훈처에 부탁해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해줬고, 직장을 다니던 딸이 결혼한 후 생계곤란을 이유로 장남을 의가사제대를 시키기도 했다. 모두 취업을 하고 지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혼인을 시키고 분가를 시켰다. 작은 평수지만 아파트 분양을 받아서 내집도 마련했다.
그 사이 딸이 짧은 혼인생활 끝에 이혼을 하고 나랑 합쳤다. 딸이 합치기를 원해 들어준 거였다. 나는 어린 외손주를 키워줬고 딸은 생활비를 책임지며 살았는데, 친척이나 주위에는 사위가 외국에 갔다고 말했다. 아들들 결혼 시킬 때는 딸에게 목돈을 꾸기도 했지만 나중에 아파트를 팔아서 원금은 갚았다. 월급이 괜찮았던 딸이 집안일과 동생들을 챙기고 가장 노릇을 하며 살았다. 그렇게 40여 년이 지났다. 내가 가끔 불평불만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그거야 나이 들면 누구나 그러지 않나. 외손주는 결혼이나 하지, 굳이 독립해서 집을 나갔다.
이렇게 죽을 때까지 딸과 둘이 살 줄 알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딸이 암에 걸렸다며 집을 나가버렸다. 아픈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강원도에 머문다고 한다. 그 사이 내가 아들집에서도 두어 달 살았다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며칠 정도 머문 것 같은데... 한동안은 구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내줬지만, 내가 오지 말라고 했다. 나 혼자 있는 집에 할 일도 없고 집에 낯선 사람 오는 게 싫다. 일하는 사람한테는 나라에서 돈을 준다는데 괜히 세금 낭비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지금은 아들들이 돌아가며 드나들고 있다. 와서 밥도 하고 반찬도 가져다 놓고 하지만 그런 거 나 혼자서도 다 할 수 있다.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딸도 가끔 왔다 가긴 하는 것 같다. 큰 아들 내외가 같이 살자고 말은 하지만 속마음은 잘 모르겠다. 요새 어느 며느리가 시어미를 반가워하겠나. 가서 눈칫밥 먹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낯선 동네에 가서 무얼 하면서 시간을 보내겠나. 구청에서 일하는 사람이 오는 것도 싫다. 빨리 딸이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언제 올지 모르겠다. 대체 그 병은 언제 좋아지는 건지. 나랑 같이 살기 싫어서 그런 것도 같고, 잘 모르겠다.
요즘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지 애비 일찍 세상 뜨고 나 혼자 다 키워서 대학 졸업 시키고 결혼도 시켰다. 다들 집 한 칸씩 가지고 애 키우면서 잘 살고 있다. 나 없었으면 지들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겠나. 나는 내 도리를 다 했는데 지들은 왜 자식 도리를 안 하는 건가? 지난번에는 내가 이렇게 혼자 있을 바에야 요양원이라도 가는 게 낫겠다고 했더니 원하시면 그렇게 하라고 한다. 이런 후레자식들이 있나. 내가 아들이 셋이나 있는데 요양원을 왜 가? 만약 나를 요양원에 보내면 나라에 고발을 할 생각이다.
아무튼 빨리 딸이 들어와서 살아야 모든 게 해결될 텐데, 그날이 언제가 될지. 답답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