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대신 쓰는 엄마 시점의 ‘마이 스토리’
롱롱타임 어고우, 경북 청송군의 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양반 찾고 아들 좋아하는 집안의 2남6녀 중 둘째 딸. 짐작할 수 있듯이, 부모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는 딸부잣집의 천덕꾸러기로 자랐다. 언니는 열여덟 살 나이, 집안형편이 한창 좋을 때 바리바리 싸들고 시집을 갔다. 엄마는 자주 편찮으셨다. 자연히 대가족 살림은 내 차지가 되는 일이 많아 힘들었다. 부엌일보다 책 읽고 공부하는 걸 좋아해서 더 짜증이 났던 것 같다. 그래도 동네 중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촌에서 흔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경북고녀 시험만 안 떨어졌어도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속 상하다.
집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이십 대 중반 과년한 딸이 부담스러웠던 아버지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우리집보다 못한 집으로 시집을 보내셨다. 자식들 교육에는 관심 없고 먹고 마시고 노는 걸 좋아하는 시댁이 낯설었다. 여기서는 5남3녀의 넷째 며느리. 혼인 후 남편이 군대에 가는 바람에 시댁에서 살게 되었다,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사람 좋은 큰 형님이 시부모 모시고 집안살림을 주도해서 나는 보조 노릇만 하면 됐다. 양반집에서 왔다고 시부모님이 다른 며느리들보다 인정도 해주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동네에서 자식 낳고 눌러앉으면 절대 안 된다는 예감이 밀려왔다. 가진 재산도 없으면서 형제가 모여 사는 이 촌구석에서는 미래를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가가 모여 살다 보니 말도 탈도 많은 시댁과도 멀어질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역시 서울로 가야 했다. 제대 후 말단 공무원 시험에 붙은 남편을 채근해 서울로 먼저 올려 보냈다. 남편이 월급을 모아 단칸 월세방을 얻자마자 어린 딸을 들쳐업고 서울행 밤 기차에 몸을 실었다.
지금 생각해도 서운하다. 어린 자식 데리고 그 먼 길을 떠나는데 가장 싸고 느린 밤 기차표를 끊어준 것도 그렇지만, 쌀 한 말을 안 보태주셨다. 다른 자식들은 분가할 때 논 한두 마지기라도 나눠줬는데, 남편은 고등학교를 시켰다는 이유로 맨 손으로 내보낸 것이다. 내가 시댁에서 집안일 한 게 몇 년인가! 머슴도 그렇게 부려먹으면 그냥 내보내지는 않는 법이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건 알았지만 이건 마음의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나의 서울살이는 그렇게 시작됐다. 애도 어리고 주변머리도 없어 돈을 벌러 나가지는 못했지만 월급을 받으면 정말 동전 한 닢도 아껴 쓰며 살았다. 연탄값을 아끼느라 추운 방에서 일부러 애를 엎고 있었고, 찬밥 한 숟갈이 남으면 더운밥을 새로 하는 대신 그걸로 끼니를 대신하기도 했다. 시골에서 살 때는 끼니 걱정은 안 했지만 여기는 무청 한 단도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서울이다. 피붙이도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가난한 서울살이는 고단했지만 우리 가족만 챙기면 되니까 마음은 편하기도 했다.
하루 한 달 일 년, 허리띠 졸라매고 알뜰히 모으면서 살았다. 단칸 월셋방에서 전세로, 그리고 작지만 수돗가 마당이 있는 내집으로 착실히 살림을 늘려나갔다. 그새 아들 셋을 더 낳았다. 몸이 건강한 편이 아니라 혼자 살림하고 애 넷을 키우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이 착실히 잘 자랐고 큰 사건사고 없이 살아왔다.
가끔은 도와준 거 하나 없는 시댁 식구들이 올라와 유숙하며 입을 보탰지만 어쩌겠는가. 서울 사는 일가친척은 우리가 유일한 걸. 불쑥 상경한 시아버지께 서울 구경 시켜드리고 두루마기까지 일습을 지어드렸더니 돌아가서 서울 며느리 자랑을 동네방네 하고 다니셨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을 땐 내심 뿌듯했다. 내가 고향 떠나 서울 오길 잘 했지, 스스로 대견해했다.
큰 딸이 대학을 간 것도 사실 내 덕이다. 당시에는 딸들은 여고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몇 년 하거나 신부수업을 하다가 적당한 나이에 시집을 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공무원 박봉에 시달리는 형편이라 남편은 딸을 상업고등학교에 보내자고 했다. 다행히 공부를 잘 하니 졸업 후 은행 같은 데 들어가 시집갈 밑천은 모으지 않겠느냐고. 단칼에 안 된다고 잘랐다. 우리가 집안이 좋길 하나, 돈이 있길 하나, 스스로 지 밥벌이를 하게 제대로 가르치기라도 해야 한다는 게 내 소신이었다. 공부 못해서 못 가면 할 수 없지만, 자식 대학은 보내야 부모 노릇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 주관 덕에 딸은 집안에서 처음으로 여대생이 되었다. 시골에서도 알아주는 모 여대 장학생이 된 딸이 조금은 자랑스러웠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더 좋은 서울대도 있고 집에서 가까운 고려대도 있는데 뭐. 하지만 고향집에 뭔가 승전보를 전한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