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명절은 명절인겨.
순덕은 구질구질 않게 한다고 했지만, 이번 명절도 역시 늘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마디 한다.
"내 자식들, 모두가 소중하지만 막내가 내리사랑이라고 막내가 더욱 신경을 써지!"
옛일이 생각난 듯,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내 인생이 자식들 때문에 산다고 생각지 않아! 자식들 훌륭하게 키우고 싶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거든~ 자식은 자식대로 인생이 있고, 내 인생은 내 인생대로 살아야 할 길이 있어."
둘째가 말했다.
"형님! 형님은 말은 그렇게 해도 형님 아이들 오면 얼굴이 확 펴지죠? 호호호~"
"그럼~ 어떻게 키운 자식들인데..." 둘째를 보며 웃는다.
"동서! 삼촌은 올 수 있겠어?"
갑자기, 순덕은 둘째에게 물었다.
"일단, 명절에는 온다고 했어요."
"멀리 전라도 섬에 낚시 간 사람이 오려면 제대로 올려나 모르겠어."
"아주버님은 근무라고 하셨는데, 내일 아침 제사 오시겠어요?"
"우리가 차려 놓고 기다려야지! 상학중학교에서 30분이면 충분해."
"막내 삼촌은 정확하게 오겠죠?"
"그래 막내 동서와 함께, 오늘 밤늦게 도착한다고 전화가 왔어."
"밀리면 더 늦어질 수도 있지만, 빨리 출발한다고 했는데..."
순덕은 올해 설은 왠지 쓸쓸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작년까지만 해도 시부모님이 계셨지만,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그 충격으로 어머님마저 요양원에 입원했고, 모든 것은 맏며느리가 맡아서 해야만 했다.
종갓집 일을 혼자서는 벅찼지만, 남편이 나서기를 하나, 시동생과 동서들이 제대로 도와주나, 여하튼 올 명절은 허무하기만 하고 힘이 빠졌다.
반면에 수재는 장남으로서 역할을 한다기보다 종손으로서 상징적인 명예(?)만 지킬뿐이다.
수재는 정년 퇴임을 하고 상학중학교 경비일을 하게 되었다. 요즘같이 젊은이도 직장 구하기가 어려운데, 보통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아가들아~ 빨리 오너라! 아침 먹고, 나도 퇴근해야지~ 상학아! 장미야!" 외친다.
수재 목소리 듣고 5마리 냥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치즈 냥이들이었다. 두 마리는 어미고 세 마리는 새끼인 듯했다.
"아이고~ 이쁜이도 왔고, 오호라~ 포동이와 방울이도 왔어."
"제사상 다 차려 놓았군." 수재는 집에 들어서며 제사상을 흘깃 보며 말했다.
"빠진 게 없는 가, 쭉 한번 살펴보시구려." 순덕은 바쁜 듯이 재촉했다.
"알아서 놓았겠지." 무덤덤하게 받는다.
"수기와 수열이는 왔는가? 보이질 않네."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큰삼촌은 지금 집에 거의 다 왔다고 전화가 왔고, 작은 삼촌은 화장실에서 씻고 있어요."
"음~ 그럼, 조금만 기다렸다가 수기 오면 시작하지."
명절만 되면 늘 그래 왔듯이, 마음만 조급해지고 빨리 시간이 지나갔으면 했다. 남자 형제들이 많은 집안일수록 더욱 힘들고 괴로운 일이 많다.
순덕은 제사가 끝나고 친지들 모두 가고 난 후, 그래도 제일 만만한 게 남편이라 다짜고짜 한마디 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병이 뭔지 알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 친구들 중 우울증으로 2명이나 죽었어."
"왜, 우울증이 왔는데..." 무덤덤하게 말한다.
"왜, 우울증이 왔겠어? 명절만 되면 도지는 병을 몰라?"
"..." 수재는 그냥 듣기만 한다.
"밀양 사는 친구는 우리 집과 비슷한데, 명절만 되면 시끌벅적하다가 나중에는 개미 한 마리 없이 고요하니..." 순덕은 좀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 역시 침묵이다.
"그렇다 보니, 허전한 마음으로 고독해져서 우울한 거야."
"병원이나 가보지 그랬어?" 드디어 관심을 가지며 말한다.
"평화시장에서 부부가 장사를 하며 열심히 살아갔는데, 그 친구는 남편이 자살했어."
"아니, 왜?" 좀 놀란 듯이, 수재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지독스럽게 가난한 종손 집안인데, 고생 고생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지만, 너무 힘들었나 봐~ 우울증도 심해졌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 잠자코 듣고 있자, 순덕은 사연을 이어 나갔다.
"부모님과 형제들, 자식들, 부양가족이 많다 보니, 가장의 짐이 너무 무거웠던 거야."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젓는다.
"어쨌든 나도 사람 좋아하고, 그립고, 그렇지만 명절만 되면 병이 도지는 거야."
순덕은 명절만 되면 악몽처럼 되살아 나는 우울증을 그래도 남편에게 넋두리를 해대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라도 풀고 싶었다. 힘들었고 허전했지만, 꼭 나빴다고만 생각지는 않았다. 좋은 쪽으로 기억을 새롭게 전환하고 싶었다.
"수고했어." 남편이 하는 말이나,
"고생 많았어요." 삼촌들 및 동서 등 친지들의 빈말이라도 들으면 좀 낫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멋지고 힘나는 응원은 내 새끼, 내 아들 딸이
"어머님 수고 많이 했어요."
이 말만 들어도 녹초가 되었던 몸이 벌떡 살아나 생생해진다.
아이들은 내 어릴 적 때와 마찬가지로 명절이 오면 즐거우니깐~ 기다려지고, 그래서 아이들을 위한 명절이라도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어쨌든 고생은 여기서 그쳐야지, 절대 이쁜 자식들에게 물려줘서는 안 돼! 그게 내 철학이고 내 인생 목적이야, 내가 조금만 희생하면 모두가 편할 텐데...' 이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홀가분 해졌다.
그리고 늘 맏며느리를 챙기고 도닥거려 주신 어머님을, 어떻게 보면 내가 닮아 간다고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은 옛날에 쌀장시, 사과장사, 생선장사 등 안 해본 것이 없고 집안일도 태산같이 많아도 다 혼자서 처리하시고, 억척 중에 억척이셨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억척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내가 목욕시켜 드릴 때 보면 뽀얀 속살과 피부가 너무 고우셔서 젊을 때는 좋은 집안에서 사랑만 받고 귀하게 자라오신 것 같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순덕은 갑자기 어머님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