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한 소녀의 이야기.
우리는 참으로 맑았다.
창문 밖으로 빛 한줄기가 따스하게 내리는 봄이었다.
책상에 엎드린 너의 위에 그 빛이 고스란히 내려 포근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종소리가 울리고 하교시간이 되었다. 너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린다.
일어나라는 우리만의 표식. 알아챘는지 고개를 뱅글 돌린 너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너는 알까? 너는 웃을 때 배시시 웃는다.
웃을 때 가늘고 길게 휘는 눈매와 살짝 파여 들어가는 보조개, 그리고 작은 입으로
부드럽게 아주 살짝만 들어 올린 입꼬리를 너는 알까?
너도 알았으면 좋겠다. 네가 그렇게 따스운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자신을 미워하다 빨리 가지는 않았을 거 같아서. 너를 좀 더 세상에, 그리고 내 곁에
묶어둘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건 너무 내 욕심일까? 하지만 나는 네가 너무 보고 싶어.
항상 하교는 너와 함께 했다.
학원과 야간자율학습이 당연시되어있는 요즘 사회에서 둘 다 가지 않는 학생은
반에서 유일하게 너와 나였기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느 순간 같이 나서고 있었다.
조금 이른 감이 있는 저녁을 함께 먹었다. 어느 날은 학교 앞 컵밥을 먹었고, 어느 날에는 시내로 나가서
즉석떡볶이를 먹는 날도 있었다. 다 먹고 나면 후식으로는 항상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너는 상큼한 맛이 좋다며 늘 레몬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을 골랐고, 나는 항상 가장 부드러운 바닐라 맛을 시켰다. 서로 입맛은 많이 달랐지만 또 호기심은 잔뜩 있어 이미 아는 맛인데도 항상 서로의 것을 한 입씩 탐하고는 본인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았다.
주말 중 하루는 꼭 함께 보냈다.
주로 동네에 있는 도서관 열람실에서 하루종일 보내는 게 우리의 일과였다.
나는 항상 어려워하던 수학문제를 너와 함께 하는 날에 가져갔고, 너는 공부는 싫다며
읽고 싶던 책들을 싸와서 나는 공부를, 너는 독서를 그렇게 하루종일 했었지.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받던 수학 문제들이 네 옆에만 앉으면 술술 풀렸다.
힘든 문제를 만나 고전하다가도 평온하게 반쯤 엎드려 책을 읽는 너의 표정을 봐서일까?
아니면 가끔은 잠이 부족하다고 ‘파업’이라는 종이를 작게 써놓고는 책 읽는 팔의 반대 팔로
팔베개해서 누워있던 너의 작은 뒤통수를 가만히 내려다봐서일까.
너처럼 그렇게 동그란 머리는 처음 봤다. 머리 색도 남들처럼 고동색이나 검은색이 아닌
묘하게 연한 갈색빛이 돌아서 햇빛에 비추면 정말 예뻤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예쁘다 밖에 없다는 게 한스러울 정도였다.
너의 머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책을 더 읽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하던 날도 있었으니까.
도서관에 가는 날은 교대로 도시락을 싸와서 점심으로 먹었다.
우리는 반찬도 달랐다. 항상 간을 세게 해서 먹는 우리 집에 네가 적응하는데 꽤나 오래 걸렸다.
이렇게 짠 걸 어떻게 먹어?라고 툴툴거리면서도 마지막 한 톨까지 싹싹 긁어먹는 너의 모습에
그냥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났다.
그거 알아? 네가 우리 집 도시락을 다 먹고 나면 평소보다 물을 2배로 마신다는 거.
그 모습을 보고 난 뒤로 밥 양을 더 싸가서 반찬과 밥의 비율을 맞추려고 노력했다는 거
너는 알까? 밥양을 늘리고부터 다시 음수량이 같아졌던 귀여운 일화들이 있었는데
네가 내 곁에 있을 때 하나라도 더 말해줄 걸 그랬다.
나는 너와 함께 걷는 여름밤이 제일 좋았다. 주변에서 잔잔하게 들려오는 매미소리는 배경음악이 되어 주었고
너무 덥지는 않지만 살짝 끈적거리는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우리의 팔에 앉을 때
각자의 취향대로 나는 선풍기, 너는 부채를 꺼내 들었다.
이미 주변 공기가 따뜻해서 둘 다 시원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습관처럼 우리는 늘 도서관에서
나오면 손에 각자의 것을 쥐고 걸었다. 아직도 생각난다. ‘매미 소리는 꼭 파도소리 같지 않아?’라고
말하며 매미의 근처로 달려가 매미에게 울어보라고 재촉하던 너의 모습이 아직도 내 눈앞에 선한데.
대학교에 가게 되면 부모님에 대한 억압도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도 벗어던지고 우리 꼭 첫 여행지는
바다로 가자며 새끼손가락을 내밀던 너의 모습도 눈앞에 선하다.
내 기억이 마지막으로 또렷하게 살아있는 가을.
너는 계절이 짙은 푸른색에서 흐린 갈색으로 넘어가는 그 시기에 잠이 유달리 많아졌다.
즐거운 꿈이라도 꾸는 걸까? 아니면 고민이 있어서 꿈으로 도피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혼자 해봤다.
늦게 잤냐고 물어보면 그냥 머쓱하게 그건 아닌데 하면서 배시시 웃어 보이곤 졸리다며
다시 본인의 담요를 찾는다. 담요를 돌돌 말아 본인의 얼굴에 맞게 맞추고 창가로 고개를 향해 잠에 청한다.
어느 날은 너무 깊게 잠들어서 네가 숨을 쉬는지 확인해 본 적도 있다. 너는 항상 그렇게 조용히 잤다.
우리 집에서 같이 자는 날들도 그랬다. 항상 하얀 티셔츠와 베이지색 5부 바지를 잠옷으로 가져오던 너.
그리고 구석자리가 좋다며 항상 침대 구석으로 가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잠을 자던 너의 모습들.
분명 옆에서 자고 있는데 숨소리조차 나지 않아서 너의 배가 오르내리는지 확인하고 잠들던 날들도 있었다.
가을 막바지에는 유달리 눈이 퀭해 보이고 책을 읽는 거 같지 않고 멍하니 보는 날이 많아졌다.
책을 거꾸로 든 지도 모른 채로 1시간 동안 같은 쪽을 펴놓고 바라보고 있는 네가 어느 날은 너무 아슬아슬해 보여서 집 가는 길에 포장마차에 들려 너의 손에 어묵꼬치를 쥐어준 날이 있었다.
날씨는 아직 후드를 입을 정도로 춥진 않아서 괜찮지만 네 마음은 조금 시려 보였다. 그래서 데워주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묻고 싶었는데 또 말해주지 않고 상황을 피하려고 하는 너를 마주할까 봐 나는 오늘도 묵묵히 그냥 옆을 지켜주었다. 너에게 물어봐야 했을까? 혼자 힘들지 말라고 어깨라도 내어주어야 했을까?
나는 왜 너에게 어묵꼬치 하나만을 쥐어줄 수 있었을까. 항상 곁에 있다고 말하면서도 네 맘 곁에는 없었나 보다. 너에게 나는 한 명의 이방인처럼 그냥 곁을 떠도는 사람이었을까? 궁금했는데 물어볼 수 없다.
산에 가서 물어보면 메아리라도 쳐서 대답이 돌아올까 하는 생각에 등산가방을 챙겼던 날도 있다.
아직까지 나는 겨울이 참 싫다. 너를 보낸 날이 실감 나는 계절이었다.
그날은 눈도 참 많이 내렸다. 세상을 덮어주는 이불처럼 온 마을이 하얀색으로 물들었다.
분명 9시까지 도서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전화도 받지 않고 너도 나오지 않았다.
가끔 잠들어서 지각하는 날들은 있었지만 전화까지 받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너희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으면서 또다시
내리는 눈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발에 조금씩 시린 감각이 들어 나중에 너와 다시 나오면
어묵을 먹으러 가자고 해야지 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묻고 집으로 향했다.
초인종을 세 번 눌렀다.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사람이 없나? 싶어서 다시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에서 전화 벨소리가 들렸다. 내가 직접 골라준 벨소리기에 다른 사람일 수 없었다. 너의 벨소리였다.
갑자지 오한이 들었다. 이 문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문고리를 돌렸는데 너무도 쉽게 열렸다.
“계세요?”라고 가볍게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조심스레 닫고 들어갔다.
현관 입구에는 가지런히 모여있는 네 신발만이 나를 맞이해 줬다. ‘아 뭐야! 깊게 잠들었나 보다’
하고 문을 열었다. 정말 평온하게 잠들어있는 네 표정을 보았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전화 벨소리도 못 듣고 자나 싶어서 깨우려고 네 곁에 섰는데, 이상하다. 내가 늘 확인하던 너의 가슴께에 변화가 없다.
올라오는 숨도, 내쉬는 숨도 없이 고요하고 평온하다. 가만히 있어선 안 되는 부위에 조금의 변화도 느껴지지 않아서 네 손을 잡았다. 손이 너무 차갑다. 밖에 있는 눈보다 차가운 것 같았다. 현실을 부정했다.
내가 겪는 첫 장례식이 너의 장례식일 거라는 생각은 장난으로도 한 적 없었는데,
내가 사랑했던 네가 그렇게 하루 만에 같은 세상에 살 수 없는 존재로 변하여 나타났다.
가족 같았던 너였기에 네 가족들 곁에 서서 같이 자리를 지켰다.
나중에 너희 어머니에게 들은 거지만, 너의 죽음은 생각보다 치밀했더라.
부모님이 기념일로 여행 가신 다음 날로 정했고 너는 나와 약속을 잡았다. 아마도 너는 네 마지막 모습을
내가 발견해 주길 바라서 그랬던 거겠지?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네가 아닌 너의 몸과 같이 있을 나는 걱정되지 않냐고, 무너질 수도 있을 나는 생각 안 하냐고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네가 앞에 있어 소리를 내뱉을 수 있데도 너는 미워할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지유는 강하잖아!’라고 외칠 것을 안다.
세상을 떠나는 너의 손을 마지막으로 내가 잡아주었는데 나의 온기는 느꼈기를 바란다.
사람은 죽어도 청각이 일시적으로 살아있는다는 얘기를 본 적이 있어서 이미 지났을 거라는 걸 알지만
너의 귀에 대고 너의 다른 행복을 빌어줬다. 네가 원하는 곳에 가면 원하는 것들이 꼭 있기를. 그래서
가족도 나도 버린 그 선택을, 죽어서는 후회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게 너의 소원이라면 나도 꼭 들어주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가버린 너의 표정이 내가 봤던 너의 모습 중 가장 편안해 보여서 슬픈 기색을 비출 수 없었다. 너는 힘들어서 간 게 아니라 편해지고 싶어서 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곳에서의 삶은 여기와 다르니?
밥을 참으로 좋아하던 네가,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서 또 어떻게 지내려고 하는지.
드높은 하늘을, 끝없는 바다를, 상쾌한 숲을 사랑하던 네가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
어떻게 지내는지. 네가 지낼 미래인데 왜 내 눈에서 물이 흐르는지 모르겠다.
그냥 보고 싶어서라고만 생각하고자 한다. 아직 못 본 지 한 달밖에 안 되었는데 네가 너무 그립다.
하굣길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집에 가고 주말이 되면 너와 함께 하던 추억들로 가득한 도서관은
사실 이제 가지 못 한다. 가보려고 했는데 우리가 늘 앉던 자리를 보면 멈추고 싶어도 멈춰지지 않는 눈물이
자꾸 흘러서 사람들이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 보듯 눈길을 주길래. 나는 너를 참 좋아했는데 이것도 실연이라면 실연인 걸까?
네가 죽고 나서 자살이니까 유서라도 한 장 남겼을까 하는 마음으로 너희 부모님과 나는
너의 방을 조금씩 뒤져보았다. 털어도 종이 한 장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허무하게 갔을까?
우리에게 한 마디 하지 않고 갔을까. 하는 마음에 돌아 나서려다 책장에 무릎을 박았다.
내가 지르는 짧은 비명의 뒤로 툭 하니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같이 들렸다.
조심히 책장 뒤를 살펴보다 어릴 때 쓰던 비밀 일기장 하나가 나왔다. 비밀번호가 걸려있어
맞춰야만 알 수 있던 그 시절의 교환일기장 같은 수첩. 여기에는 네가 하고 싶던 말들이 있을 것 같아
너의 생일부터 너희 가족의 생일, 그리고 내 생일까지 전부 눌렀는데 열리지 않아서 수많은 시도 끝에
일기장과 나만 덩그러니 남아 천장을 보다 내 폰에서 문자 한 통이 울렸다. 갑자기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내 폰 뒷번호를 눌렀는데 일기장이 열렸다. 마치 초대받은 양 한 장씩 펼쳐 너의 지난 마음속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