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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나 노 Aug 18. 2024

마음 훈련 7-20억 자산가에게 새콤달콤을 줬습니다.

가난은 고난이 아니라 ‘성장 영양제’

내가 일하는 학원은 강남에서도 오랫동안 부자동네로 불리는 곳에 있다.

출근길에 보이는 부동산 유리문에 붙여진 아파트의 가격은 평균 20억.

얼마 전 뉴스기사를 보니 대단지로 잘 구성 된 신축 아파트는 무려 40억에도 거래가 된다고 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83년생 빨간 벽돌 빌라는 전세가격도 2억이 채 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억지로 몸을 일으킨 출근길인데, 허탈감은 끈적하고 불쾌한 습도마냥 내게 달라붙는다.

‘나는 평생 이런 집에 살아볼 수나 있을까? 아니, 내가 이 동네에서 살 수나 있을까?‘


어느 날은 수업보다 일찍 온 아이가 참새처럼 조잘조잘 이야기를 꺼냈다.

“쌤! 저희 집은 가난해요. “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저희 아빠는 군인이라 가난한데 반 애들은 진짜 가지고 싶은 거 다 사고 돈 신경 안 쓰는 것 같아요.”


녀석! 진짜 가난이 뭔지 모르는구나.

가난이라면 아주 진득하게 겪어온 내가 ‘가난학 개론’을 펼치려던 순간, 아이의 이어지는 말은 내 입을 다물게 했다.

“근데 저희 할머니 집 진짜 비싼데 그 집 저한테 주신댔어요!”


아, 맞다. 이 아이의 할아버지는 유명한 외과의사라고 했었지.

하하. 이 동네에서 ‘가난’의 기준은 대체 어디쯤에 놓여있을까.

성실하신 군인 아버지를 둔 아이의 입에서 ‘가난’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나는 ‘가난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침을 튀기며 열띤 토론을 벌이려던 마음을 쓱 감췄다.


서른다섯의 무주택자인 나와 열여섯의 유주택자(예정)인 너. 그 비싼 집을 물려받으면 너는 최소 20억 자산가가 될 것이고, 너와 나의 빈부격차는 더 벌어지겠지!


우리의 가난 논쟁은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고? 내가 이기는 싸움이니까.

누가 누가 더 가난한가, 그건 기필코 나의 승리로 끝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주택자인 내가 유주택자가 될 아이들에게 새콤달콤을 준다.

어떤 날은 초코파이를, 오예스를, 아이스크림을, 그리고 인형 선물을 준다.

아이들은 이제 당연하게 내게 새콤달콤을 요구한다.

‘너희들은 부자인데 왜 자꾸 내 새콤달콤을 뺏어먹어!‘라고 쪼잔하게 속으로 외쳐보지만

결국 아이들에게 새콤달콤을 두 개씩 나눠주며 어른-또는 선생님-으로서의 권위를 잃지 않는다.


가난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그날부터 청소년기 내내 지독히도 나를 괴롭혀왔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었으니 가난이라는 것이 정말 지긋지긋하다.

나는 교복을 한 번도 사서 입어 본 적이 없다.

중학교, 고등학교 6년 내내 새 교복도, 새 체육복도 사 입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너무 좋아했던 가수 ‘동방신기’가 스마트 교복을 광고했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시내에 있는 스마트 교복점에 매일 놀러 가곤 했다.

스마트 교복점에서 교복을 사면 동방신기 팬사인회를 갈 수 있는 응모권을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친구들은 모두 저마다 스마트 교복 한 벌씩을 해 입었다.


하지만 내가 입어야 했던 건 엄마가 교회에서 얻어온, 엉덩이 부분이 반질해진 어느 이름 모를 언니의 교복이었다.

그 교복이 내 몸에 꼭 맞았으면 덜 서러웠을 텐데 우리 집 사정만큼이나 왜소한 나의 체구 때문에 교복을 수선해야 했다.

수선집에 서서 이미 닳아 해진 교복을 내 몸에 맞추는 그 시간이 끔찍이도 창피했고 수치스러웠다.

이래저래 치수를 재는 수선집 사장님 옆에서 엄마는 아주 미안한 얼굴로 서있었다.

버스비를 아끼겠다고 여린 몸으로 그 무거운 짐을 양팔에 들고 시장과 집을 걸어 다니던 엄마는,

새 교복을 사주지 못하는 미안함으로 계속 내 눈치를 살피고 내 기분을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교복을 수선하고서 엄마의 돋보기를 맞추러 안경점에 갔는데 괜히 엄마에게 모진 불꽃이 튀었다.

“어떤 안경테가 잘 어울려?”

제일 싼 안경테를 고르면서 어떤 안경테가 잘 어울리냐고 묻는 엄마의 물음에

“몰라! 그냥 아무거나 써!”라는 퉁명스러운 말로 쏘아댔다.

엄마는 사춘기 딸의 날카로운 화풀이에 멋쩍게 무난한 안경테 하나를 골라 들었다.


나는 안다, 엄마는 우리 집의 가난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내가 화를 내야 했던 대상은 도박 중독으로 도박 빚을 지던 아빠였다.

아빠에게 “아빠가 도박빚을 자꾸 져서 딸 교복도 하나 못 사주잖아!”라고 소리라도 질렀어야 했다.

죄 없는 엄마는 늘 아빠의 화풀이 대상이 되곤 했는데 그날만큼은 나에게도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하염없이 마음이 미어지고 또 미어지는 기억이다.


어느 날은 엄마에게 이 일을 사과했더니 엄마는 웃으면서 그런 일이 있었냐고 했다.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건지, 기억이 안나는 척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세탁소에서 미안해하는 엄마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엄마! 허리통 조금만 줄이면 완전 내 몸에 딱 맞겠는데? “

“어차피 3년만 입고 버릴 교복, 다 비싼 돈 주고 사는데 나는 공짜 교복이니까 얼마나 좋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철이 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행하는 아디다스 운동화 대신 시장바닥에서 산 만 원짜리 운동화.

비싼 치킨을 시켜 먹지 못해 시장에서 산 닭으로 엄마가 튀겨줬던 닭튀김.

문제집을 사는 것마저 부담이라 담임 선생님이 주셨던 교사용 문제집 여러 권.

새 옷을 사는 대신 늘 여기저기서 물려 입고 얻어 입느라 나이에 맞지 않던 촌스런 옷들.


아아, 나는 가난이 싫다.

나는 정말이지, 가난이 싫다.


하지만 가난이 싫다는 말로 이 소중한 글을 끝내고 싶지 않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로 인해 나는 더욱 풍성한 감사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으니.


사랑의 리퀘스트,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익명의 후원자님들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참 많이도 받았다.

베풀어주신 사랑과 온정이 없었더라면 나는 베푸는 기쁨을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갔을 거다.

후원을 받던 청소년에서 이제는 후원을 하는 어른이 됐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

내가 받았던 무수한 도움에 대한 은혜를 갚아나가고 싶어 월급이 줄었어도 후원을 멈추지 않기로 했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 내 생활은 얼마나 풍족한가.

이제는 아디다스, 나이키 운동화쯤은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물론 10만 원이 넘는 운동화는 딱 한 번 밖에 안 사봤지만.)

한 마리당 2만 5천 원으로 가격이 폭등한 치킨도 먹고 싶다면 얼마든지 시켜 먹을 수 있다.

(물론 여전히 엄마표 닭튀김이 제일 맛있지만.)

내가 문제집을 풀 일은 없지만, 어려운 환경에 처한 제자가 있다면 기꺼이 몇 권이고 문제집을 사줄 수 있다.

(물론 강남 지역 아이들에게 문제집 사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명품 브랜드의 옷을 사 입지는 않아도 적당한 가격의 마음에 드는 옷은 얼마든지 사 입을 수 있다.

(물론 고착화된 촌스러운 패션에서 벗어나려면 노력이 필요하지만.)


가난을 알기 때문에 가난을 함께 이겨내고 싶다는 이 마음이 인생을 살아가는 내게 선물이지 않을까.

학원 원장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면 목표인데, 늘 ‘환경이 어려운 친구들을 돕고 싶다.’는 소망이 내게 있다.

장학금 제도를 마련해서 자존심 상하지 않게 학원비를 면제해 주거나, 장학금 지원으로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있게 도와줘야지.

가난과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는 아이들이 없기를 바란다.

가난을 이겨내는 힘과 용기를 주는 일에 내가 도움이 된다면, 신이 내게 가난을 허락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가난이 내게 가르쳐 준 더불어 사는 삶 덕분에 매일을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어 감사하다.

‘가난은 고난이 아니라 성장 영양제였다.’

가난 때문에 여전히 울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흘려보내는 삶’을 잘 살아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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