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사고는 내 잘못이 아니야.
나는 껄껄맨이다. (아, 껄껄우먼인가?)
껄껄 웃어서 껄껄맨이 아니다.
매 사에 ‘~할 걸’이라고 자책하면서 후회와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는, 껄껄맨이다.
천국으로 떠난 아빠의 MBTI는 (이제 물어볼 수 없지만) 추정컨대 ENFP.
버스정류장에 앉아있는 아주머니에게도 ‘아줌마 왜 이렇게 이쁘요?’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철부지였다.
굉장히 외향적인 사람으로 얼마나 외향적이었냐면 집 안에 가만히 있질 못하고 집 밖으로만 나다녔던 사람.
아빠는 현실보단 이상에 죽고 살았다. 마음이 여렸고, 인생에 계획이란 전혀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하루살이처럼 계획 없이 오늘만 살았다.
매 달 20일에 나오는 수급비를 일주일도 안 돼서 다 써버리곤 늘 내게 돈을 달라고 했으니깐.
엄마는 아주 오래전에 MBTI 검사를 해보았다고 하는데 ISTJ인지 ISFJ인지가 나왔다고 했다.
내 생각엔 엄마는 T와 F가 반반쯤인 것 같은데, 엄마가 ISTJ라면 아빠와는 정반대의 성향인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 집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늘 부딪혔고, 늘 싸웠다.
아빠가 허무맹랑하긴 해도 어떠한 계획을 세우면 현실적인 엄마는 무조건 안된다고 반대를 했다.
이를테면 농장을 사서 오리, 토끼, 닭을 키우고, 염소도 키우고 어쩌고 저쩌고.
한 번은 아빠의 꿈을 이루어 정말 시골의 어느 땅에 농장을 샀는데 역시나 얼마 못 가 접었더랬다.
그놈의 알코올과 도박 중독은, 아빠를 몇 달도 성실히 살아가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석처럼 극과 극인 두 사람의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어떠한가.
유전자만 반반 닮은 게 아닌 것이, 성격도 반반 닮아 태어나버렸다.
나는 ISFP다.
엄마의 내향적이고 현실적인 성향을 닮았고, 아빠의 감성적이고 즉흥적인 성향을 닮았다.
아무쪼록 MBTI를 떠나 엄마를 꼭 닮은 점은 지나간 일에 대해 자꾸만 후회를 한다는 거다.
제주도 동문시장에서 장을 보고 버스를 타러 갔던 길.
정류장에 아슬하게 도착할 즈음에 버스 한 대가 슈웅-하고 지나가버렸다.
다음 버스를 가만히 기다리면 될 일인데 엄마와 나는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계속해서 ‘껄껄’ 거렸다.
‘아까 그 버스를 탈 걸. 조금만 더 뛰어서 탈 걸. 아까 그 버스를 탔으면 벌써 집에 갔을 걸.’
그리고 서로를 보며 정말 껄껄 웃었다.
“엄마 우리는 왜 이렇게 ‘~할 걸’ 거려? 나 완전 엄마 닮았네! “
“그러게~.. 맨날 ‘ 할 걸, 할 걸’ 하는 껄껄맨이네! … 아잇, 아까 그 버스를 탔어야 했는데…“
“엄마!!! ‘껄껄’ 그만해~~!!!”
나는 어쩌다 이렇게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바꾸고 싶어 하게 된 걸까.
자책의 습관은 여동생이 사고를 당했던 날, 내게 스멀스멀 들러붙었다.
동생은 나와 6살 차이가 났다. 아역모델처럼 예뻤던 아이였다.
동네 아주머니가 내 동생을 보고는 “어머 너 너무 예쁘게 생겼다. “라고 하시더니
그 옆에 있는 나를 한참 보시다 ”.. 너는 야무지게 생겼구나~“라고 말씀하셨던 건
어린 나이에도 눈치챌 수 있었던 미묘하게 다른 칭찬이자 은근한 마음의 스크래치였다. 하하.
동생은 아빠의 잔머리와 성질을 닮아 총명하고 한 성질 했다.
그렇게 예쁘던 동생이 4살 때 사고가 났을 때, 우리의 4년짜리 추억보따리가 봉해졌다.
그 이후 17년 동안의 동생과 맺은 추억은 모두 ‘식물인간’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갔으므로.
사고가 나기 전 날 밤, 평소처럼 고물상에 출근하겠다는 아빠와 엄마에게 나는 울고불고 매달렸다.
학교에서 가을 운동회를 하니 엄마 아빠도 운동회에 꼭 와줬으면 좋겠다고.
친구들은 다 엄마랑 아빠가 오는데 나만 혼자인 게 싫다며 떼를 썼다.
아빠는 그래도 일을 하러 나가야 한다며 엄마에게 같이 일을 나가자고 했지만
내 눈물을 보고 마음 약해진 엄마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동생을 데리고 운동회에 함께 가기로 했다.
그리고 학부모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초등학교 구석에 있던 물 웅덩이에서 동생이 물에 빠지는 사고가 났다.
아빠는 엄마를 향해 ‘왜 줄다리기 같은 걸 한다고 X병을 떨다가 애를 안 봤냐’며 온갖 험한 욕을 해댔고
엄마는 죄인처럼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나는 엄마가 아빠에게 또 맞을까 봐 엄마를 막아서고 아빠에게 소리쳤다.
“아빠!! 나 때문이야. 내가 그런 거야!! 내가 운동회 가자고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내가 잘못한 거야!!”
그때 내 나이는 겨우 10살이었다. 아주 어리고도 여린 아이였다.
그런데도 열 살배기 작은 소녀는 그 모든 마음의 짐을 스스로에게 차곡차곡 쌓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빠는 엄마를 때리고 못살게 굴었으니깐.
내가 그렇게 아빠를 막아서면 아빠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엄마를 향해 삿대질과 욕을 몇 번 더 하다가 이내 멈추었다.
아빠가 엄마를 탓할 때마다 그 싸움을 멈추는 법을 터득해 버리고야 만 것이다.
동생의 사고는, 결국 그렇게 내 탓이 되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 잘못이라고 외치며 살아야 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그 일은 정말 말 그대로 사고였던 거야, 내 잘못이 아니야.‘
알고 있다. 이 모든 게 신의 계획 속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고 있지만 나는 나를 자책하며 살아왔다.
부부의 자식을 잃은 슬픔은 또 다른 자식의 마음 상태를 돌볼 새 없이 서로를 향해 원망의 화살을 겨누었고,
남아있는 자식은 동생을 잃은 슬픔보다 부모의 싸움이 무서워 그 모든 원망을 제 탓으로 돌린 것이었다.
나를 오랫동안 괴롭혀온 후회와 자책, 그리고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미련.
시간을 돌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언제나 동생이 사고가 나던 그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만약 운동회에 엄마와 동생이 오지 않고 아빠를 따라 일을 하러 갔더라면,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가족에게는 비슷한 형태의 불행이 찾아왔을까.
그 사고가 아니었더라면 지금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혹여나 지금보다 더 불행하게 살고 있을까.
아무것도 알 수 없는 한낱 인간의 지혜로는 그저 그리움이 더해진 상상만 해볼 뿐이다.
서른 하고도 네 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그간 내게 진득하게 들러붙어있던 껄껄맨에게 작별을 고하려 한다.
지나간 일을 두고 아무리 자책하고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는 법이다.
더 나은 발전을 위해 잠시 되돌아보는 것은 괜찮지만 바꿀 수 없는 과거에 계속 집착하는 건
마음속 배터리를 빨리 닳게 하는 것뿐, 내 마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책은 마치 나를 갉아먹는 악독한 좀벌레와 같다.
그 악독한 좀벌레는 때로는 아주 거대한 이웃나라 장군과도 같아서
내 탓이 아닌 일마저도 내 탓으로 돌려 나를 무너뜨리고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내가 B를 선택했어도 결국은 지금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었다거나
또는 지금보다도 더 안 좋은 상황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확률은 무시하고
B를 선택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이 되었을 것만 상상하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분명 A를 선택한 그때의 나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을 텐데도.
그러니 이제는 선택과 결정을 잘하지 못하는 버릇도 훨훨 날려 보내려 한다.
나는 나 스스로의 선택을 믿고 존중해야 한다.
그때의 나는 분명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선택에는 신의 가호가 있을 것으로 믿고 나아가야 한다.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서처럼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말자.
미련한 것들에 미련을 가지는 건 미련한 일이다.
예비신랑은 어느 아이돌의 노래 제목을 보며 나를 떠올렸다고 했다.
‘고민 중독.‘
고민할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해서든 새로운 고민을 만들어 내는 고민중독.
사소한 일부터 큰 일까지 어떤 일이든 주구장창 부여잡고 고민하느라 애쓰며 살았다.
이제는 고민하느라 지친 마음을 푹 쉴 수 있도록, 고민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어야겠다.
나 자신을 더 아끼고 사랑하며 더 많이 믿어주어야 한다.
내가 하는 선택과 결정이 가장 최선의 것임을 인정하며, 잘했다고 다독여주어야 한다.
나는 어렸고, 그 나이에 흔히 부릴 수 있는 투정을 부렸던 것이며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우리 가족에게 갑자기 찾아온 불행 속에서도 꿋꿋하게 잘 살아냈으니, 잘했다. 잘 버텼다.
그 어린 나이에도 제 탓으로 돌려 부모의 싸움을 막을 정도로 일찍 철이 들었으니 애썼다, 정말.
어느 날은 동생이 누워있던 중환자실의 병원 침대 밑에 돗자리를 깔고 누우며
“엄마 나 완전 캠핑 온 것 같아! 진짜 신나!”라고 외쳤었다.
사실은 그다지 신나지 않았다. 침대 밑 바닥은 차갑고 깜깜하고 낯설었다.
키가 크고 몸이 자라면서 보조침대에 엄마와 나란히 누워 자는 게 불편해지자 엄마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게 하려던, 고작 열세 살 먹은 나의 배려였다.
나는 그렇게 너무 일찍 철이 들었었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내가 애어른으로 평생을 사느라 늘 이런저런 고민의 지게를 등에 업고 살았나 보다.
철이 든 고민의 지게는 내게 또래보다 일찍 다른 이의 마음을 ‘배려’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나는 여전히 배려심 깊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어쩌면 그 모든 아픔과 슬픔이 인생을 따뜻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11년을 더 살아온 서른네 살의 내가, 앞으로 많은 날들을 살아갈 나에게 생일을 맞아 선물을 하나 건넨다.
‘껄껄맨과의 작별.‘
동생의 사고는 결코 내 잘못이 아니었음을, 결코 내 탓이 아니었음을.
모든 자책과 후회로부터 벗어나는 마법의 주문,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로 휘리릭 만들어낸 선물이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아무리 곱씹어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 일 앞에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분명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신의 섭리 일거라고. 그리고 그 신은 실수가 없다고.
받아들일 수 없는 아픈 일이었지만, 고난으로 포장된 선물을 내 삶에 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살아가는 동안 갑작스레 마주한 어떠한 불행에 스스로를 자책하고 후회하는 모든 이들에게 감히 전해본다.
’우리 껄껄맨과 작별합시다. 그 일은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