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뉴델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인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그때 나는 땡볕에 점심도 거른 채 몸과 마음이 지치도록 계속 걷고 있었다. 느닷없이 눈앞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잠깐만요."
땀에 젖은 남방셔츠를 입은 남자 한 명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 옆에서는 빨간 터번을 두르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사람이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입을 떼려고 하자, 잠깐 기다리라는 몸짓을 하더니 계속 적어내려간다.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볼펜에 힘을 주어 글자를 적고 있었다. 뿌리치고 가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들이 무엇을 할지 궁금해졌다. 그들의 수상한 행보에 '어디 한 번 구경이나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지켜보기로 했다.
빨간 터번을 쓴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 마쳤다는 신호를 보냈다. 수첩을 찢어 두어 번 접은 후 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 종이에 자신이 질문하는 것에 대한 답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짜고짜 질문을 던진다.
"몇 살이에요?"
"23살이요. 한국 나이로."
인도 사람들은 대화하기를 좋아해서 어디서 왔냐, 몇 살이냐, 이름이 뭐냐 등의 질문을 자주 한다. 쿡 찌르면 바로 나오는 대답이기에 망설일 틈도 없었다.
"어머니의 성이 뭐요?"
"송. 철자가 S.O.N.G."
여기까지는 정해진 답이니 질문 즉시 답변을 했다. 하지만 다음 질문에서 내 마음은 갈등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색깔은?"
이번만큼은 원하는 답변을 얻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보라색이라고 하려다가 살짝 멈칫했다. 내가 확실히 보라색이라고 하려고 했었으니, 마음을 바꾸어 노란색이라고 대답한다면 종이에 적힌 것과 분명 다를 것이다. 그래, 노란색이라고 해보자. 보라색과 노란색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보라… 아니 노란색"이라는 답을 하고 말았다.
이제는 손에 쥔 쪽지를 펴보라고 했다. 각각의 질문에 대해 순서대로 답변이 적혀있었다. 1번 23, 2번 SONG, 3번에서 나는 놀라고 말았다. 보라색의 첫 글자인 P에 두 줄이 그어져 있었고, Yellow라고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땡볕에 돌아다니느라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던 나는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얼 하는 사람일까. 수행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고 속세로 내려와서 나 같은 사람의 푼돈 깨나 쓸어 모으는 사람인 것인가.
그다음에는 당연한 수순으로 돈을 요구한다. 얼마를 원하냐고 물었더니 내 맘대로 달라고 한다. 혹시 내가 얼마를 줄 건지도 다 알고 있는 것일까. 잔돈 지갑에 들어있던 지폐를 꺼내 건넸다. 20루피가 나왔다. 잔돈 지갑 안에 들어있던 돈 중에는 제일 고액이었다. 당시에는 학생 신분이라 그 돈을 주기에는 아까웠지만 이미 지갑에서 나온 돈을 다시 넣기도 민망했다. 게다가 놀라서 얼음처럼 굳어버린 상태였으니 말이다.
돈을 주고 서둘러 자리를 뜨려던 나에게 빨간 터번 사내가 말했다.
"당신은 하이데라바드에 가게 될 거요. 반드시."
확신에 찬 그 목소리에 심기가 불편해져 내 평생 다른 곳에는 다 가더라도 하이데라바드만큼은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니까. 오기가 생겼다.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는 자신의 시 「불굴의 영혼」에서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나를 이끄는 힘에 의해 조종당한 것일 수도 있겠다. 서울에서 사람들에 치이며 에너지가 고갈될 정도로 피폐해졌던 것, 제주도에 무작정 여행 왔다가 아예 자리 잡고 삶의 터전을 삼은 것,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글을 써보겠다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것 모두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 아닌지도 모른다. 이미 정해진 미래이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난데없이 그때 일이 불쑥 떠오른 것은 일종의 청개구리 심보라고 할까. 여행을 가지 말아야 할 시기가 되니 그곳이 더 궁금해진 것이다. 바득바득 우기며 버티는 것보다는 직접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혹시 그곳에 간다면 내 인생을 뒤흔들어 놓는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음 여행지로 점찍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