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Nell) - 기억을 걷는 시간

고요한 슬픔의 언어를 가진 밴드

by Minor Bloom

가끔 그런 날이 있다.

하루는 멀쩡히 흘러가는데, 마음 한구석은 이유 없이 멍해지는 날.

그럴 때면 나는 늘 이 노래를 찾는다. 의 ‘기억을 걷는 시간’.


이 곡은 2008년 발표된 의 정규 4집 Separation Anxiety 수록곡이다. 앨범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분리 불안, 관계의 고장, 마음의 균열. 넬은 언제나 감정을 조용하고 예리하게 꺼내 보여준다. 그 방식이 너무도 섬세해서, 듣다 보면 어느새 스스로의 마음 안쪽으로 깊숙이 침잠하게 된다.


기억을 걷는 시간’은 피아노 선율로 조용히 문을 연다. 차가운 새벽 창가에 기대어 있는 듯한 고요한 시작. 이어지는 이정훈의 목소리는 감정 과잉도, 냉소도 아니다. 그냥, 그 사이. 조심스럽고 단정한 슬픔. 그래서 더 진하게 다가온다.


제목이 이 곡의 모든 걸 설명해준다. 기억을 '걷는다'는 말. 묵직한 은유다.

추억은 원래 떠오르는 것이지 걷는 게 아닌데, 이 노래는 기억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발로 밟아가듯 짚어나간다. 그렇게 우리는, 이 노래를 들으며 지난 시간을 다시 살아본다. 아니, 살아낸다.


사실 이 곡은 처음부터 주목받았던 건 아니다. 타이틀곡은 아니었지만, 팬들의 압도적인 반응에 힘입어 후속곡으로 활동하게 됐다. 당시 화려한 퍼포먼스와 자극적인 사운드가 음악 프로그램을 장악하던 시절, 이 조용한 노래는 오히려 더 크게 울렸다. 어쩌면, 고요한 저항이었다.


을 처음 듣는다면, 이 곡만으로는 조금 부족할 수도 있다.

그들의 음악 세계는 훨씬 넓고 깊다.

그래서 두 곡을 더 추천하고 싶다.


첫 번째는 ‘Stay’. 담담한 언어로 전하는 절절한 마음.
“그냥 내 옆에 있어줘,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불안한 마음이 가장 간단한 문장으로 터져 나오는 순간이다. 은 그런 순간을 아주 잘 안다.


두 번째는 ‘기억을 걷다’. 제목만으로도 오늘의 곡과 연결된다. 이 곡은 멜로디도, 가사도 담백하지만 깊은 잔상이 남는다. 은 사랑을 말하지 않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그리움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아프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더 덧붙이자면,

의 대표곡 중 하나인 ‘해피닝(Holding onto Gravity)’을 빼놓을 수 없다.
2012년 발매된 이 곡은 감정의 절제를 극대화한 끝에서 터지는 감정 폭발을 보여준다.


“그냥 좀 멍해지고 싶어 /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


삶이 무겁게 느껴지는 날, 이 노래는 멀리서 다가와 내 어깨를 조용히 툭 건드린다. 괜찮다고 말하지도 않으면서,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은 그렇게, 말보다 음악으로 마음을 안다.


덧붙이자면, 은 데뷔부터 주목받은 팀은 아니었다.

인디 씬에서 조용히 활동하던 그들을 세상에 알린 건 바로 서태지였다.

서태지의 음악을 듣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라며 직접 발탁했고, 2004년 자신의 콘서트 ‘EVE OF THE STORM’에 오프닝 밴드로 세웠다. 은 그렇게 조용히, 하지만 깊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세상이 너무 시끄러울 때, 은 침묵을 노래한다.

그리고 그 침묵 안엔, 우리가 미처 말하지 못했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이 노래를 듣는다.
기억을 걷는 시간 속에서,
그 시절의 나를, 혹은 지금의 나를, 다시 만나는 기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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