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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찐 감자와 세상 모든 식탁

식탁은 00이다

by 미진 Mar 0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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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램프의 흐릿한 불빛 아래 농부들이 감자를 먹는다. 놋쇠 주전자와 손잡이 없는 찻잔, 하얗게 김이 오르는 감자 몇 개가 식탁에 놓여 있다. 불거진 손목뼈와 꿈틀대는 힘줄이 분주히 그 위를 오간다. 지친 눈, 상실한 눈, 체념한 눈이 흔들린다.  지붕은 낮고 양쪽 벽은 가까워 캄캄한 동굴 속 같다. 고흐가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식탁은 현실이다.     


취사가 완료되었다. 밥을 담는다. 성장기 자식을 성장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은 어디서 왔는지, 없던 정성이 하나로 모아진다. 정성을 다 한다. 정성에 정성을 더 한다. 나를 위해, 내 입에 들어갈 것을 위해 이토록 공을 들인 적이 있나, 없다. 식탁은 정성이다.     


온 가족이 식탁에 모여 밥을 먹는다. 아이가 재롱을 떨면 엄마 아빠의 눈은 어느새 반달이 된다. 사춘기 아이의 행동이 비딱하다. 자식의 미래를 위한 부모의 조언이 시작된다. 아이는 밥맛이 떨어진다. 부모의 잔소리를 귓불로 덮고 입을 닫는다. 어떻게 차린 밥상인데, 어떻게, 아쉽다. 뼈를 숨긴 말들이 부지런히 밥상을 오간다. 식탁은 위태롭다.     

    

국가의 정상들이 정찬을 하며 국가 간 우의를 다진다. 수준 높은 자국 문화를 선보인다. 공식 협상에서 풀리지 않던 난제가 자연스럽게 풀린다. 기업의 오너가 의중을 전하고 간부들은 뜻을 헤아린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며 사랑과 희생을 말하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신할 것이라고. 제자들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며 흥분한다. 결단코 자신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식탁은 극적이다.    

    

  <목로주점>의 세탁부 제르베즈는 죽도록 고생하다 굶어 죽는다. 좋았던 한때, 자신을 위해 생일잔치를 벌였다. 사람들은 빨리 소화시키는 비법을 공유하며 먹기를 멈추지 않았다. 노동에 찌든 몸과 마음을 포도주로 씻어 내렸다. 하지만 장밋빛 인생은 오래가지 않았다.  

  

빨리 죽으면 좋으련만 스스로 심장을 잡아 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정말 하루는 너무 길고, 너무나 자주 온다. 배가 고프다고? 그럼 주먹을 먹으면 될 거 아냐! 나머지 하나는 남겨 뒀다가 내일 먹고. 돌멩이라 하더라도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눈물을 흘렸으리라.

  19세기 에밀 졸라가 <목로주점>에서 묘사한 노동자들의 말, 말, 말이다. 식탁은 절망이다.       




 <바베트의 만찬>의 요리사 바베트는 프랑스 내전으로 모든 것을 잃고 노르웨이로 망명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고 전 재산을 들여 음식을 차렸다. 그녀에게 요리는 창조적 예술 행위였다.      


베를레보그 사람들은 잘 차린 음식을 먹을 때면 분위기가 진지했다. 그런데 오늘 밤은 달랐다. 먹고 마실수록 몸과 마음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 이자크 디네센, 바베트의 만찬, p.62     

  

음식을 먹은 사람들은 기뻐했다. 이웃을 용서하고 친구와 화해했다. 천국을 느꼈다. 음식에 신비한 묘약을 넣은 것도, 포도주로 감각을 마비시킨 것도 아니었다. 혼을 다한 음식이 육체적 만족을 넘어 영적 치유를 이루었다. 식탁은 치유다.    

 

식탁을 차린다. 김장김치를 종류별로 썰고 제철 요리를 하고 국을 끓이고 정갈하게 밑반찬을 담고 생선을 굽는다. 먹는 게 사는 일의 전부인 것처럼.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지, 분노가 스멀스멀 치밀어 오른다. 서둘러 마음을 여민다.      


반복해서 하는 행위의 위대함을 믿고 싶다. 반복해서 먹는 데는 이유가 있으니 반복해서 잘 먹어야 하지 않을까. 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이가 밥 냄새를 맡고 문을 열고, 노인이 성근 이로 오래 씹는다. '밥 먹어'라는 말로 부부는 어색한 화해를 시도한다. 식탁은 사랑이다.        


머리를 맞대고 먹는다. 마술이 시작된다. 견고하게 묶인 몸의 매듭이 풀리고 아득한 의식이 담을 넘는다. 갓 찐 감자가 몸의 구석을 채운다. 소고기 뭇국 냄새는 날 선 신경을 가라앉히고 된장찌개는 다친 마음을 감싼다. 유자드레싱을 두른 샐러드가 싱그럽다.      


배가 부르다. 오늘은 조금 덜 뒤척이다 잠이 들 것이다. 내일의 해가 뜨면, 어른은 일을 하고, 아이는 넘어지며 놀고, 정상들은 나랏일을 도모하고, 돈 버는 사람들은 더 많이 버는 법을 궁리하고, 사람들은 사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세상 모든 곳에 식탁 테라피가 작동한다.     



#음식에세이

#세상모든식탁

#바베트의만찬

#감자를먹는사람들

#목로주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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