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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영 Oct 27. 2024

9. 원시의 기쁨

  나는 언제 가장 기쁜가? 

  이 질문을 종이에 쓰기 전에, 나는 조금 다른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기쁜가? 

  이미 쓴 문장을 굳이 수정한 이유는, 내가 무엇을 ‘해야만’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내 무의식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기쁨을 쟁취하기 위해, 우리는 너무 지나친 노력을 하는 건 아닐까. 거기에 행복이 있다는 착각을 하는 건 아닐까.   

  나는 ‘내가 만들어 온 나’보다 먼저 존재했던, ‘원시림과도 같은 나’를 만나고 싶은 게 틀림없다. 몇 달째 미완의 전자책을 붙들고 퇴고를 거듭하면서 나는 '원시림 같은 인간' 혹은 ‘인간의 본성’을 무던히도 퇴고와 짝짓기했기 때문일까. 


  짝짓기라니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나는 퇴고의 즐거움이 나에게, 그러니까 뇌에 주입되기만을 갈망하도록 만드는 중독적이고 강력한 자극에 길들지 않은 '원시림 같은 인간'에게 반드시 내재해 있다고 써야 하는 상황이다. 이것 봐라. 짜맞추기 아닌가? 짜맞추기라니. 그 단어는 내 양심을 건드리는 것 같으니 짝짓기라고 하자. 지금은 짜맞추기 같지만, 곧 운명처럼 이어진 듯한 기분이 들 테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이 있었던가? 오히려 즐거움을 위해 하는 행동이 나의 일상에 가깝다. 그렇다면 나의 일상에서 기쁠 만한 일은 없었던가? 애초에 ‘희’와 ‘락’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희’와 ‘락’을 인터넷 어학 사전에 찾아봤지만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단어로 각각 일축되어 있었다. 단답형의 답을 원하는 시험문제도 아닌데 예상보다 글자 수가 적어 성의 없는 풀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비슷한 단어의 어감을 구분해 개념의 차이를 명확하게 하는 일은 국어사전만으로 해내기 어렵다. 이럴 때는 자료조사를 병행하면서 본인이 경험했던 여러 가지 문장들을 종합해 개념의 범위를 더듬어 보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원시림 같았던 나’의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어감의 차이와 문맥의 흐름에 집착하는 습관은. 그것은 분명히,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존재할 것이다. 이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알아차리는 재미, 문맥을 다시 짚어가며 내가 이 글의 어느 문장에서부터 정신을 흡입 당했는지 추적하는 재미. 이 재미를 맛보다 보면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만 알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는 와중에도 좀 더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데 화자의 마음을 미처 다 녹여내지 못한 글이 보이면 그게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요청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의했고, 내가 운영하던 커뮤니티에서 신청받아 그렇게 타인의 글들을 퇴고하게 됐다. 정확하게는 코칭이다. '마음이 이러이러하셨던 것 같은데 맞나요?'에 이어 ‘그렇다면 이러이러한 표현도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하는 식의, 강한 윤문을 포함한 코칭.


  그중 한 분의 글을 세 편, 꼼꼼하게 코칭과 윤문을 해드렸다. 미국에 사는 60대 피아노 연주자이자 음악 선생님이었다. 장문의 코멘트를 보내면 그녀는 몇 번이고 다시 글을 써서 보내왔다. 몇 달 동안 문서 파일을 주고받으며 늘 감사의 말을 들었다. 


  아무런 대가도 예상하지 않고 한 일이었다. 내가 가진 능력이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게 신기했고, 글을 읽을 때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들이 떠오르니 여기저기 체크하면서 코멘트로 정리했을 뿐이다. 몇 차례가 되든 상관없이 글을 수정해 다시 보내오는 그녀의 열정에 감탄했고 도리어 에너지를 얻었다. 그해 겨울, 만날 수 없어 아쉽다며 그녀는 나에게 10만 원을 송금해 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브런치 작가 합격 소식을 전해왔다. 


  돈을 받았을 때, 기뻤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설렘이 몰려왔다. 나를 옭아매던 걱정거리들이 사라지고 온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 이 사실을 소문내고 칭찬받고 싶었다. 누군가가 함께 기뻐해 준다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누구한테 말하지? 


  그때는 셋째를 임신하기 전이었고, 두 아이의 겨울방학을 이용해 2주 동안 창원에 있는 친정집에 내려온 참이었다. 바로 옆에서 동생과 엄마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의 친정 식구들은 내가 일을 했다고 하면 싫어할 것이다. 집안일과 요리, 그리고 아이들 키우는 데 더 집중하라고 하겠지. 주변 친구들과는 연락을 그리 자주 하는 편은 아니라서, 갑자기 이 사실을 알리면 자랑하려고 연락했다는 오해를 살지도 모르겠다. 막상 친구들이 이 얘길 듣는다면 어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며 섭섭해하려나. 


  나는 내 휴대전화의 최근 대화 목록들을 살피다가 풀이 죽어 그만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나쁜 일을 해서 돈을 번 것이 아닌데도 왠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러니까 자랑을 할 만한 일도, 당당하게 드러낼 만한 일을 하고 있지도 않은 셈이 되었다. 스스로 뿌듯해 마지않는 일이지만 주변에 자랑을 할 만한 사람도 없고, 내가 이 일을 했다고 해서 반길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열심히 책을 읽어주고 놀아주던 아이들에게 등을 내보이며 10만 원을 벌었다고 칭찬해 줄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금세 마음이 무거워졌다. 10만 원의 위상이란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작 그런 정도다. 




  그래도 내가 퇴사 후에 처음으로 번 돈이나 마찬가지니까. 나에게 10만 원은 다시 내 인생을 걸어 볼 수 있는 일말의 희망과도 같았다. 경력 단절이란, 생각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작가 모집 공고에 빠지지 않고 쓰여 있던 ‘35세 이하 지원 가능’은 나에게 아슬아슬한 조건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가진 경력으로 턱걸이 지원을 하려니 심사가 뒤틀리는 듯한 기분이다.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수원에서 상암동이나 여의도까지 다녀오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그래, 이렇게 구인 중인 프로그램들을 이리저리 거르다 보면 나는 결국 방송작가와는 동떨어진 일을 하게 되겠지. 하지만 기꺼이 나의 20대를 불태우며 열정을 쏟았던, 내가 가장 좋아하면서도 자부심을 느껴온 일을 평생 나 자신에게서 방치할 수 있을까? 눈물 콧물 다 짜 바쳐 쌓은 내 경력을 모른 체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소명 의식을 가지고 정말 원하는 일들을 해왔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에 표출될 것이다. 그렇담 이왕이면 가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드러나는 게 좋지 않을까? 방법을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편은 내가 ‘첫 후원금’을 받았다며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 잠깐의 시간 동안 나는 머뭇거렸다. 후원이라니, 꽤 근사하고 감동적인 단어가 아닌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모님 말고 나를 후원해 주는 사람이 있었던가. 그저 퇴고에 대한 금전적인 대가라고 해도 좋았지만, 후원이라는 말은 또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나를 응원한다는 증표처럼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계속해서 이 일을 해도 된다는, 또 누군가에게 내가 필요 하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를 도우려 나서도 된다는 의미 같았다. 


  나는 기뻤다.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남편의 ‘축하한다’라는 말이었다. 누구도 축하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일을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칭찬해 주었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 지금은 이따금 남편이 내 노트북 앞을 지나다니며 내가 일에만 빠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곤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 순간만큼은 기쁜 일을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있었다. 마음 놓고 기뻐한다는 것은 기쁨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뜻이며, 어떤 걱정거리나 다음의 목표를 내세우지 않고 잠시 그 기쁨에 젖는다는 뜻이다. 


  이윽고 나는 이 기쁨을 느끼기 위해 내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은 타인에게서 응원의 증표를 받기 위한 일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남편에게서 칭찬을 듣기 위해서 특별히 한 일도 없었다. 누군가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떤 노력이 존재해 왔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내가 모르는’ 노력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기쁠 만한 일을 이루어 냈다고 하더라도, 나의 기쁨을 누군가와 나눌 수 없다면 그것은 나에게 기쁜 일이 될 수 없다. 10만 원보다도 더 가치 있는 기쁨을, 나라고 경험하지 않았을까. 나는 주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일보다 그들이 반기지 않는 일들을 더 많이 해왔던 탓에, 기쁨을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더 기쁜 일인지를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런 건 생일에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려는 일들은 늘 반대에 부딪히곤 했기 때문에. 글을 쓰는 일은 가끔 그런다. 돈 안 되는 예술이라고 생각해서다.


  ‘네온레온’(Neon-Leon)이라는 그림책이 있다. 카멜레온인 주인공 ‘레온’은 다른 친구들처럼 주위 환경에 따라 몸의 색을 바꾸지 못한다. 결국 자신처럼 형광을 띠는 숲을 찾아 나선다. 다행히 그 숲에는 형광의 몸을 지닌 다른 카멜레온도 있다. 그렇게 새로운 친구를 만나면서 해피엔딩. 아이들에게는 자신을 닮은 숲과 친구를 찾은 레온의 이야기로 비춰질 수 있었지만, 나에게는 레온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과 환경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여정으로 느껴졌다. 


  어떤 환경에 적응하기 어렵거나 혹은 나처럼 무얼 해도 주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힌다면. 늘 자신을 증명해 보이려 바쁠 것이다. 완벽하게. 아니, 이보다도 더 완벽하게. 완벽하게 나를 궁지에 몰고 나면 깨닫는다. 아무리 나를 증명하고 성공해도 기쁘지 않다는 것을. 


  나의 아이들도 항상 가족이 바라는 일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기쁜 일이 생긴다면, 가장 가까운 사람인 가족과 그 기쁨을 나눌 수 있게 열심히 응원해 주고 싶다. 적극적으로 주변 환경을 바꾸는 건 삶의 지혜가 분명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건 좀 슬픈 일이다. 결국에는 자신을 응원해 줄, 가족보다 더 가까운 이를 곁에 둘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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