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 가장 기쁜가?
이 질문을 종이에 쓰기 전에, 나는 조금 다른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기쁜가?
이미 쓴 문장을 굳이 수정한 이유는, 내가 무엇을 ‘해야만’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내 무의식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기쁨을 쟁취하기 위해, 우리는 너무 지나친 노력을 하는 건 아닐까. 거기에 행복이 있다는 착각을 하는 건 아닐까.
나는 ‘내가 만들어 온 나’보다 먼저 존재했던, ‘원시림과도 같은 나’를 만나고 싶은 게 틀림없다. 몇 달째 미완의 전자책을 붙들고 퇴고를 거듭하면서 나는 '원시림 같은 인간' 혹은 ‘인간의 본성’을 무던히도 퇴고와 짝짓기했기 때문일까.
짝짓기라니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나는 퇴고의 즐거움이 나에게, 그러니까 뇌에 주입되기만을 갈망하도록 만드는 중독적이고 강력한 자극에 길들지 않은 '원시림 같은 인간'에게 반드시 내재해 있다고 써야 하는 상황이다. 이것 봐라. 짜맞추기 아닌가? 짜맞추기라니. 그 단어는 내 양심을 건드리는 것 같으니 짝짓기라고 하자. 지금은 짜맞추기 같지만, 곧 운명처럼 이어진 듯한 기분이 들 테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이 있었던가? 오히려 즐거움을 위해 하는 행동이 나의 일상에 가깝다. 그렇다면 나의 일상에서 기쁠 만한 일은 없었던가? 애초에 ‘희’와 ‘락’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희’와 ‘락’을 인터넷 어학 사전에 찾아봤지만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단어로 각각 일축되어 있었다. 단답형의 답을 원하는 시험문제도 아닌데 예상보다 글자 수가 적어 성의 없는 풀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비슷한 단어의 어감을 구분해 개념의 차이를 명확하게 하는 일은 국어사전만으로 해내기 어렵다. 이럴 때는 자료조사를 병행하면서 본인이 경험했던 여러 가지 문장들을 종합해 개념의 범위를 더듬어 보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원시림 같았던 나’의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어감의 차이와 문맥의 흐름에 집착하는 습관은. 그것은 분명히,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존재할 것이다. 이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알아차리는 재미, 문맥을 다시 짚어가며 내가 이 글의 어느 문장에서부터 정신을 흡입 당했는지 추적하는 재미. 이 재미를 맛보다 보면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만 알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는 와중에도 좀 더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데 화자의 마음을 미처 다 녹여내지 못한 글이 보이면 그게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요청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의했고, 내가 운영하던 커뮤니티에서 신청받아 그렇게 타인의 글들을 퇴고하게 됐다. 정확하게는 코칭이다. '마음이 이러이러하셨던 것 같은데 맞나요?'에 이어 ‘그렇다면 이러이러한 표현도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하는 식의, 강한 윤문을 포함한 코칭.
그중 한 분의 글을 세 편, 꼼꼼하게 코칭과 윤문을 해드렸다. 미국에 사는 60대 피아노 연주자이자 음악 선생님이었다. 장문의 코멘트를 보내면 그녀는 몇 번이고 다시 글을 써서 보내왔다. 몇 달 동안 문서 파일을 주고받으며 늘 감사의 말을 들었다.
아무런 대가도 예상하지 않고 한 일이었다. 내가 가진 능력이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게 신기했고, 글을 읽을 때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들이 떠오르니 여기저기 체크하면서 코멘트로 정리했을 뿐이다. 몇 차례가 되든 상관없이 글을 수정해 다시 보내오는 그녀의 열정에 감탄했고 도리어 에너지를 얻었다. 그해 겨울, 만날 수 없어 아쉽다며 그녀는 나에게 10만 원을 송금해 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브런치 작가 합격 소식을 전해왔다.
돈을 받았을 때, 기뻤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설렘이 몰려왔다. 나를 옭아매던 걱정거리들이 사라지고 온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 이 사실을 소문내고 칭찬받고 싶었다. 누군가가 함께 기뻐해 준다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누구한테 말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