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 공주, 피터팬, 금발 머리 소녀 중에서 가장 덜 매력적인 캐릭터는 금발 머리 소녀다. 자기 공감을 하고 문제에 직면하는 주도적이고 생동감 있는 에너지가 함께 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품은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겨버리는 모습을 보고, 공감하기보다 어리석다고 느껴 타산지석 삼는 용도(?)로 그 이야기를 소비한다면 모를까.
줄거리가 단순하고 짧아서 그런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 동화들은 분석하는 이유가 작품 비평이 아니라 '어떻게 자기 공감을 하며 쓸 것인가'를 논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자. 그렇다고 나의 이야기를 무조건 길게 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고, 진짜 문제를 볼 수만 있다면, 짧은 글을 쓰더라도 쓰는 동시에 치유와 내면의 성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을 때 주인공의 진짜 욕망과 진짜 문제를 들여다본 다음, '내게도 그런 것이 있을까?'하고 스스로 되물어 보면 되는 것이다.
금발 머리 소녀의 욕망은 '배고픔'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곰 가족의 집을 발견하고 문이 살짝 열린 것을 보니 괜히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 금발 머리 소녀는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들어간다. 이때,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과 배고픔이라는 욕망은 이미 무시된 상태다. 자기 욕망에 대한 공감보다 호기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집 안으로 들어가 나란히 놓인 죽 세 그릇을 보니 먹고 싶다. 뜨거운지, 차가운지, 하나씩 맛본다.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심이다.
금발 머리 소녀의 진짜 문제는 곰 가족을 무시했다는 데 있다. '의자가 부서진 건, 너희가 허술하게 만들어서야!', '내가 잠이 오는데 조금만 자도 되겠지? 들키지 않으면 되잖아!' 하지만 그녀는 틀렸고, 들켰다. 아빠 곰이 생각보다 크게 화를 냈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놓고 남의 것을 훔쳐 먹고, 파손하고, '날 좀 보소, 그러게, 문 좀 잠그고 다닐 것이지.' 하며 자고 있는데, 이게 보통 화낼 일인가.
그러나 애초부터 약자의 '화'는 강자의 입장에서 비교적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고 마는 것이었다. 사람이 동물을 무시한다는 게 아니다. 어린이는 때로 영악하게 강자의 입장이 될 줄 안다. 어린이가 욕망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대상은 오냐오냐하며 품어주는 부모이거나, 아이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어른일 경우가 많다. 아이의 부모에게 호감을 사야 하는 어른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공생관계다. 일방적으로 호감을 사야 하는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아기 곰과 또래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금발 머리 소녀는 어쩌면 어린이의 특수성과 권위를 이용해 자기 욕망을 드러내고 자기만족에 취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진짜 욕망을 알고 진짜 문제에 직면했다면, 곰 가족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자신을 들여보내 줄 것을 요청했을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망가느라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은 아닐까.
동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린이가 강자의 입장이 되는 상황을 제시했지만, 어른도 늘 경계해야 한다. '내게도 그런 것이 있을까?'하고 스스로 되물어 보아야 한다. 또 일깨워야 하는 것은, 어른일지라도 누구나 내면에 어린아이가 있으며, 어린이의 막무가내 떼쓰기보다, 어른의 권위가 훨씬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경쟁력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이야기를 글로 쓴다면, 적어도 금발 머리 소녀의 이야기처럼 삐뚤어진 욕망과 도망으로 끝맺지는 말자. 이 이야기는 동화지만 실존하는 누군가가 쓴 실화라면, 에세이라면, 자기 고백 또는 고발에 가까울 테니. 그러나 반드시 글로 쓰고자 한다면 써야 한다. 단, 문제를 바로보고, 제대로 해결하고자 하는 힘이 있을 때가 제대로 쓸 준비가 된 상태라는 것을 미리 알아두면 좋겠다.
누구나 살면서 자신의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하고 삐뚤어진 욕망을 드러내는 실수를 한 번쯤은 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회고하며 낙서처럼, 일기처럼, 초고처럼 글로 옮기다 보면, 거듭 변명과 후회가 되풀이될지라도 결국에는 문제를 바로 보게 된다. 그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자신의 문제에 직면해 또 언젠가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조금씩 덜 삐뚤어지도록, 자신을 더욱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스스로 치유한다는 것은 삶의 주도권을 어느 정도 찾았다는 뜻이다.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 더 솔직해지고, 자신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이전보다 더 평안하고 뚜렷한 자아를 가꾸어 냈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자존감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러온다. 그것이 나의 이야기에서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