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더 깊은 내면의 글쓰기 : '그냥'은 없다.

by 이지영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라는 노래가 있다.


처음엔 / 그냥 걸었어 / 비도 오고 해서 /

오랜만에 빗속을 걸으니/ 옛 생각도 나데.


제법 오래된 가요지만, 추억의 K-POP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첫 소절을 기억할 만큼 유명한 노래다. 나도 라디오 방송을 하던 시절에는 비가 오는 날 틀었던 노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에서 자꾸만 '그냥'이라는 말을 강조한다. 이 노래의 가사를 찬찬히 되짚어 보자.


처음엔 그냥 걸었다고 한다. 비도 오고 해서. 오랜만에 빗속을 걸으니, 옛 생각도 났다고 한다. 그렇지만 좀 더 면밀히 따져 보았을 때, '그냥 걷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뭐라도 이유가 있었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두 가지 이유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뭔가를 했던' 이유를 쥐 잡듯 잡아 낼 수 없거나, 감추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그렇게 따져야 해?라고 반문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처음 보는 누군가가 내 집 앞에, 그것도 비 오는 날,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을 목격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저 사람이 왜 우리 집 앞에 서 있지?'라고 생각하며 놀랄 것이다. 이후에 경찰의 도움으로 자초지종을 전해 듣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 내 집 앞에 있었던 사람은 '그냥 걷다 보니 그리 되었다.'라고 했단다.


당신은 어쩐지 그 말속에 나오는 '그냥'이 심하게 거슬릴 것이다. 악의적인 의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그냥'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의도 없음'를 의도한 단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다분히 의도적이다.


경찰의 말에 따르면, 이로써 당신의 민원 요청이 별일 없이 종결된다고 한다. 아마 이 말을 들으면 화가 날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이렇게 따져 물을 것이다. "아니, 그게 말이 돼요? '그냥' 그러는 게 어딨냐고요!"


그렇게 따져 묻는 마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분명히 어떤 의도가 있고, 의미가 있어서 어떤 행동을 했을 거라는 전제조건이 깔려있는 것이다. 정처 없는 발걸음은 없다. 당장 정해진 목적지가 없을 뿐, 그 '걸음'을 통해 해소하려는 욕망은 분명히 주인공에게 내재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점차 수면 위로 떠올라, 그 윤곽이 명확해질 것이다.




반대로 아침에 출근했더니, 누군가가 예쁜 카드에 간단한 인사를 써서 내 책상에 놓았다고 해보자. 당신은 대체 누가 이 카드를 나에게 준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하루 종일 마음이 설렐 것이다. 그동안 당신에게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생각하며 자신이 짐작해 볼 만한 사람을 모두 머릿속으로 불러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이 그랬단다. 주인공으로 설정된 ‘당신’에게는 남편이 있었다! 당신은 남편에게 묻는다.


“왜 그랬어?”

“그냥.”


너무 취조하는 말투일까? 그렇다면 ‘이거, 왜 날 준거야?’ 혹은, ‘무슨 좋은 일 생겼어?’, ‘나한테 뭐 미안한 거 있어?‘, ‘오다 주웠어?’ 같은 말로 대체할 수 있겠다. 어쨌든, 남편은 싱긋 웃으며 ‘그냥’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러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치, 그냥이 어딨어, 암튼 고마워.’라고 지나가는 말이라도 해볼 법하지 않은가.


이때는 무사하게도(?) ‘그냥’이라는 단어가 거슬리지 않는다. 아내인 당신은 본심을 감추는, 다분히 의도적인 ‘그냥’이라는 단어를 용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따져 물었던 마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냥) 너에게 주고 싶었어’라는 말을 굳이 듣고 싶은 애교 섞인 투정이다.

이때 남편이 되풀이하는 단어 ‘그냥’은, 약간의 쑥스러움과 동시에 사랑, 고마움, 존경, 아끼는 마음 같은 것을 굳이 드러내가며 상대방에게 부담 지우지 않으려는 배려가 담긴 ‘그냥’이다. 역시 다분히 의도적인 단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 이 노래를 받아들이는 대중의 정서도 이 노래에서 말하는 '그냥'을 받아들인다, 처음에는.


정말이야 / 처음엔 그냥 걸었어/

비도 오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


그렇지만 한국어는 끝까지 들어봐야(읽어봐야) 안다고 하지 않는가. 사실, 이 노래의 가사에서 오는 감동은 '그냥'이 아닌 '진짜 이유'를 드러내는 데에서 나온다.


정말이야 / 거짓말이 아냐/

미안해 / 너의 집 앞이야 /

난 너를 사랑해 / 우우우/


‘그냥’이라는 말로 적당히 뭉뚱그리고 감추면 된다고 생각했던 ‘진짜 감정’이 결국 터져 나오는 대목이다.


가사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헤어진 그녀를 우연히라도 보고 싶어 걸었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전화도 해봤을 것이고, 정말 만 분의 일이라도 그녀 생각을 안 했다고 쳐도 비 오는 날 곧장 집으로 가기엔 답답했을지 모른다. 그만큼 그의 심정이 울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빗속을 걸어 다니다 그녀의 집 앞에 서 있었던, 합당한 이유다.

우리가 의외로 자주 쓰는 말, ‘그냥’은 우리 마음속의 수천 가지 합당한 이유를 안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그냥’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나의 마음도 한번 들여다보고, 간단하게나마 글로 옮겨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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