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을 안쳐놓고 환기한다고 창을 열었더니, 그새 겨울이 코앞이다. 벌써부터 SNS엔 내년도 다이어리 광고가 심심찮게 보인다. 올해도 정말 다 지나갔구나 싶다. 일단 놀자면서 여름이 시작될 무렵 아무런 계획 없이 백수생활을 시작했던 우리 부부는 지금도 여전히 백수다. 하지만 신나게 놀았던 초반과는 달리, 가을을 지나면서부터 각자의 행보가 확연히 달라졌다.
남편은 9월부터 대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나고, 간간이 들어오는 알바도 하면서 여전히 바쁘다. 아마도 남편에게 이번 백수생활은 '자아를 확인하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본인이 얼마나 일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사람들 속에서 활력을 얻는 사람인지, 쉼 없이 굴러가는 조직의 일원으로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인지 확실히 깨달았을 거다. 그래서인지 요즘 남편의 구직활동은 진심 그 자체다.
나는, 지워지고 있다. 가족을 제외하곤 누구도 만나지 않고 연락도 안 한다. 애초에 퇴사 후 계획이 '사회에서 삭제되기'였다. 그냥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잊혀지길 바랐다. 그렇게 백지를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정말 새롭게, 내가 정말 원하는 걸 찾아서 하고 싶다. 마음은 조급하지만 어쭙잖게 일자리를 찾아보지 않는 이유다. 그저 나에게 이번 백수생활은 '자아를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뜸 들이는 중에 밥 냄새가 좋다. 요맘 때면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남편의 선배가 수확한 햅쌀을 맛볼 수 있다. 평소엔 잡곡밥을 먹지만, 쌀을 받으면 며칠간은 일부러 흰쌀밥을 한다. '밥이 달다'라는 느낌을 충분히 즐기고 싶은 욕심에서다.
"맛있는 백미 취사를 완료했습니다. 밥을 잘 저어주세요."
뻐꾸기 소리와 함께 안내 음성이 들려온다. 새삼 그 친절함이 반갑다. 무슨 밥을 짓고 있는지, 지금 어떤 과정을 거치고 있는지, 완성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다 끝난 후에는 뭘 해야 하는지 놓치지 않고 알려주는 세심함. 내 인생에도 이런 친절한 알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가야 다다를 수 있는지, 그곳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내해 주는 다정한 이정표 같은. 언젠가 나도 이 친절하고 똑똑한 밥솥처럼 내가 해야 하는 것, 가야 하는 길을 명확히 알아서 훗날 맛나고 때깔 좋은 인생을 뚝딱 지어내고 싶다.
밥솥을 여니 뜨겁고 고소한 김이 훅 올라온다. 잘 저어서 밥그릇에 꾹꾹 눌러 담는다. 어릴 때부터 우리 가족은 '머슴밥'을 먹었다. 놋밥그릇 위로 수북하게 올린 밥은 몸 쓰며 일하는 부모님에게 보약 대신이었다. 그래서일까. 한국인의 주식이라고 얘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쌀 소비가 줄었다는 요즘, 나는 하루 한 끼는 꼭 밥을 먹어야 속이 편하다. 윤기 흐르는 고슬고슬한 밥을 입에 넣을 생각을 하니 마음까지 든든해진다.
자자, 고민이 무어든, 얼마나 깊든
밥 먹고 합시다!
"여보, 요즘 아침마다 당신 지난 밤 꿈 이야기 들으면서 마음이 많이 아프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으면 매일 취업 관련 꿈을 그리도 생생하게 꿀까. 나는 말야, 우리 백수생활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당신이 원하는 그곳에 곧 일하러 갈 것 같거든. 그 전에 삼시세끼 맛있는 밥 나눠먹으면서 에너지를 비축해보자구. 아, 과식은 말고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