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다. 나는 백수 5개월 차, 남편은 7개월 차. 무대책 백수 부부에게도 슬슬 계획이라는 게 생겨야 할 시점이다.
일단, 얼른 일하고 싶어서 드릉드릉 시동을 걸고 있는 남편부터 밥벌이 전선에 내보내기로 했다. 남편의 휴식은 이미 치사량을 넘긴 듯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이렇게 길게 쉬어본 적 없던 남편은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됐다. 본인은 일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지지고 볶아도 일터가 가장 마음 편한 곳이라는 걸.
때마침 오래전부터 채용공고가 나길 기다리던 곳에서 자리가 나서 응시하기로 했다. 나는 가을 탄답시고 PC 전원 한 번 안 켜보고 흘려보낸 지난 한 주를 남편은 오롯이 이력서와 자소서, 직무계획서를 쓰면서 성실하게 보냈다. 남편은 확실히 진심이다.
제출 전 '감수'라는 명목으로 남편이 쓴 서류들을 한 번 쓰윽 읽어보는데, 아아... 정말 간절하다. 읽는 내내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정해진 분량에 꽉 차게 꼭 필요한 말들만 적어놔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다. 직무 계획서도 완벽하다. 관련 경력도, 배경지식도 충분. 이런 사람 안 뽑아주고 누가 배긴담.
하지만, 그렇게 따숩게만 흘러가면 그게 어디 인생인가. 지인들을 통해 낙하산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회장님이 친히 내려보내시는 '금 낙하산'이시란다. 지원해도 병풍밖에 안 될 거라며 너무 애쓰지 말라는 소리까지 들리자 남편은 풀이 죽은 눈치였다. 젠장, 뭐 이런 누추한 곳까지 회장님이 친히 관심을 가지고 정성스레 낙하산을 꽂으시는가. 그거 말고도 신경 쓸 일이 많은 걸로 아는데. 속이 상해서 궁시렁 험담을 늘어놓다가, 이러면 붙어보기도 전에 패배를 인정하는 꼴밖에 안 되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 허기지면 더 서러우니까 일단 밥부터 먹자.
"...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배부르게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는데 울리는 카톡 알림. 매일 받아보는 오늘의 성경 구절에 눈이 번쩍 뜨였다. 딱 오늘의 나를 위한 이야기 아닌가. 바라고 기도했다면 조용히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그리고 주어진 상황에 그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회장님은 낙하산을 꽂지만 그분은 적재적소에 말씀을 꽂아주셨다.
"아직도 게임은 끝나지 않았어~♩♪"
요즘 남편이 흥얼거리는 투데이송은 마이앤트메리의 <골든 글러브>다. 자기 자신에게 불러주는 응원곡이자, 회장님보다 위에 계신 그분을 향한 SOS이자, 간절한 기도인 것만 같다. 집 안이 떠나가라 무한반복 해도 좋다, 멈추지만 말아다오.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채용 관련 서류 제출 완료.
"여보, 그 회장님 말야. 그분보다 한참 아래야. 알지? 지금 그 기세 꺾지말고 갈 데까지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