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ny bennett - the shadow of your smile
느지막한 저녁 대리운전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의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대부분은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내일 출근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 그들은 서비스를 이용하는 셈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많은 손님들은 가정으로 전화를 한다. 아내에게, 남편에게, 아니면 자녀들에게 말이다. 대부분 "지금 대리 불러서 집으로 가는 중이야." "30분 정도 걸릴 거 같아." 뭐 특별한 대화는 없다. 훔쳐들으려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족들과 통화할 때 유독 마음에 걸리는 대화 내용이 있다. "ㅇㅇ는 자?", "ㅇㅇ 좀 바꿔줘"같은 대화이다. 자녀들을 찾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를 듣는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적인 대화 내용들이지만, 집에 있는 딸이 유독 아른거린다. 대리운전 서비스를 이용하는 손님이 자녀들과 만나기 위해 난 운전을 하지만, 정작 나와 우리 딸은 자고 있는 모습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다. 집에 가면 곤히 자고 있는 딸의 모습으로 보고 있자면 보고 싶었던 마음보다 미안하고 측은한 마음이 앞선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수면조끼를 입고 곤히 자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으니 누군가는 대리운전을 하고 누군가는 그 서비스를 이용하는 게 당연하다.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은 없다. 다만 아쉬움이 많이 남을 뿐이다. 비단 저녁에 일찍 퇴근해서 딸과 놀아주지 못하는 미안함 때문만은 아니다. 친구들과의 인형 놀이보다 영어 대화를 재미있어하는 딸의 영어 유치원 이야기를 아내에게서 들었을 때 현 우리 가족의 경제 상황에서는 무리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부모의 무능함과 불성실함으로 아이가 누려야 할 것들이 제한되고 있다는 사실들을 하나둘씩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 난 지금까지 살아오며 느꼈던 그 어떤 무력감보다 더 큰 무력감을 느꼈다. 남들과의 비교를 신경쓰기보다는 우리들 마음속 행복이 우선이라 믿으며 의연했던 나 자신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도 딸아이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나와 동생은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어머니의 우유배달을 도왔다. 3년 동안 주말을 제외하고는 방학 때를 포함해서 쉬어본 적이 없었다. 당시에는 15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 아파트라고 해봐야 5층짜리가 대부분이었다. 쉴 새 없이 5층과 1층을 오르내리락 거리며 열심히 어머니의 일을 도왔다. 18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할머니와 우리 네 식구가 살았지만, 부족함을 느끼지는 못했고, 부자 친구들이 있어도 그리 부럽다고 느끼진 못했다. 우유배달을 하는 것을 아는 친구들도 있었고 주변 어른들은 오히려 그런 나를 칭찬했다. 자랑스럽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불행함을 느끼며 투정 부리지는 않았다. 가끔은 여자 친구들의 집에 우유배달을 갈 때 친구들과 마주치면 부끄러운 적도 많았지만, 그때 잠시 뿐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어머니는 김밥집을 하셨다. 아버지 사업이 문제를 일으키자 어머니는 극장 앞에서 김밥을 파셨다. 학교가 끝나면 나는 교복을 그대로 입고 어머니 가게에 가서 가끔 서빙을 도왔다. 여고 앞 김밥집은 여고생들로 늘 가득했고, 여드름 가득했던 사춘기의 난 초등학교 시절보다는 더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일하는 것에 대한 것으로 부끄러웠던 것은 없었다. 집안 사정이 넉넉지 못해 우유배달을 했던 것과 어머니 가게에서 서빙을 했던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 아니라, 그냥 여자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부딪히는 것이 부끄러웠을 뿐이다. 넉넉한 집안의 친구들이 오락실을 드나들고 pc방, 만화방을 다니며 놀고 있을 때 난 부모님을 도와 일했고, 친구들이 걸어서 집을 다니는 동안 또래 친구라고는 동생과 나밖에 없는 시골 동네로 1시간 남짓을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곤 했다. 학교 다니며 크게 문제 일으기는 일도 없었고, 오히려 나름 공부도 잘하고 품행도 바른 학생이었다. 가지고 싶었던 것이 있어도 부모님께 졸랐던 기억 하나 없고, 옷 한 번을 내가 사고 싶은 옷을 사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사다주시면 그대로 입을 뿐이었다. 그렇게 별 탈 없는 조용한 학생 시절을 보내는 동안 밤낮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답답하거나, 다른 친구들이 부러웠을 법도 한데 그렇게 넉넉지 못한 가정의 학생이었던 나는 늘 고생하시는 부모님 걱정이 우선이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다.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 성실함과 근면함을 가르쳐주셨고,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는 믿음으로 지금도 살고 계신다. 부모님 손을 벗어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서울로 학교를 다니게 되며 난 혼자 사는 삶을 즐기기 시작했고, 나름의 일탈을 했다. 어려서 속 깊었던 아이는 스무 살이 넘어가며 제멋대로 세상을 바라기 시작했고, 이상한 신념들이 생기며 세상 모든 것들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남 탓으로 일관하고, 할 수 없다는 신념 덕분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나날들이 많아졌다.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로버트 키요사키의 책을 읽으며 '내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8할이 부모님 때문이야'라는 형편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돈 많은 손님이 자녀에게 취업 선물로 자동차를 사주러 가는 길에 따라갔을 때는 서울에 전셋집 하나 해주지 못하는 부모님이 무능력하다 느낄 때도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참 못났었다. 그렇게 근 20여 년을 부족한 나의 노력을 탓하기보다는 환경 탓을 하며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기 시작했다. 불운을 핑계 삼아 그렇게 기나긴 나날을 물처럼 흘려보냈다. 눈 깜짝할 사이 부모님 아래에서 20년 그리고 혼자의 삶을 산 20년 이 지나고 난 이제 딸 하나의 아버지이자, 아내의 남편이 되었다. 성실과 불성실의 그 중간 즈음에서 모든 경험을 마치고 나니 참으로 생각이 많아졌다. 무능력한 아버지이자, 무책임스러운 자식이 현재 내 모습이었다.
근면하게 20년, 낭비하며 20년을 보냈다. 가파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오르내리며 믿을 만한 것은 이제 단단해져 버린 내 두 발뿐이다. 신념을 논하기에 아직은 완성되지 못했고, 노력으로 커버하기엔 내 그릇이 너무 작다. 이대로라면 우리 딸은 또래들이 모두 느낄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잊어가며 부모의 노고를 이해하며 자신의 것을 하나씩 포기해 나갈 것이다. 어린날 내가 그랬듯이 녀석은 애어른이 되며 자랄 것이고, 힘없는 부모의 모습을 답습하며 답답한 인생을 살아갈 확률이 높다. 우유배달을 하며 김밥집을 하던 어머니도 똑같은 생각이셨으리라. 새벽부터 일어나 4시간씩 잠을 자며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어머님의 슬픔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본인의 고생일지언정 자녀의 행복한 인생을 위함이었다 스스로 등 두드리며 위로하셨으니라.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아들을 보며 자책을 하고 계시진 않을까 걱정되고, 내 딸도 그 길을 걷게 되진 않을까 두렵다. 못난 아들, 못난 아빠가 현재 내 모습이다.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안압이 높아 수술을 하신 어머니와, 다리 수술을 하신 아버지 걱정에 오늘은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세상모르게 곤히 자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욱더 잠이 오질 않는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문을 열어 창밖을 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렇게 계절은 바뀌고 시간은 지나는구나!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질 않는데 시간만 자꾸 흐르는 것 같아 마음만 자꾸 조급해진다. 보름달이 높이 떠서 예쁘게 반짝이고 있었지만, 어두침침한 밤거리의 모습이 왠지 내 모습처럼 처량하게 발 아래 누워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