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처를 무기로 삼지 말아야지
입에 칼을 물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떠오르는 파괴적인 생각들에
상대방이 상처입지 않길 바라니까.
다시 삼키자.
내 상처가 나 자신을 찌르기도 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찌를 때가 있다. 아니 많다. 나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방식 중 하나로, 자기 파괴적인 단어들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주변 사람들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므로 그들을 정신적으로 멍들게 하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다양한 생각들이 떠오르는데, 좋은 것들만 떠오르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머릿속에서 어두운 생각들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파괴적인 생각들로 나 자신을 멍들게 하느니 차라리 아무런 생각이 없는 편이 더 나았을 것 같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시 말해서 가족들에게는 내가 아픈 것 자체가 상처일 수 있다. 가족 전체는 감정의 덩어리로서, 당신의 감정과 내 감정의 분리가 되지 않는 상태인 경우가 많다. 내가 아프기만 해도 가족도 같이 아프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힘든 지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은유가 되어서 입 밖에 나오는 경우들이 많았다. 그런데 사실 나도 내 마음을 자세히 풀어서 설명할 능력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심상을 이야기할 뿐인데, 이를 단편적으로 설명 없이 받아들이게 되면 듣는 사람에게는 비관적인 말이 되고 그들에게 상처가 된다. 그런데 내가 그 심상을 단편적이 표현이 아닌 자세한 설명과 함께 곁들일 능력이 없었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예를 들면 나는 고등학생일 때 위와 같은 말을 하곤 했다. 고등학생이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을 때 이를 듣는 가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말하는 나도 복잡한 심경이었겠지만, 듣는 가족들의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말이었을 것이다. 가족들은 매우 최근까지도 이때 나의 서툰 감정 표현들로 받은 상처를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그 말은 무슨 뜻이었어?"
내가 그런 말을 했을 당시에,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이 이 질문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나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족들이 나에게 그 질문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질문을 했다가 그 뒤에 어떤 더 파괴적인 말이 이어질지 겁이 났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 질문을 했더라도, 내가 조리 있고 알아듣기 쉽게 이 말 뜻을 설명할 수도 없었을 수도 있다. 나 자신조차도 내 마음을 잘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이 나에게 그 말의 뜻을 물어봤든 아니든 나는 그 말의 뜻을 지금처럼 자세히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자기감정 표현 능력에 있어서 유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참 많이 어렸다.
성인이 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때 내가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했던 말의 뜻에 대해서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사실 그 말의 뜻은 가족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파괴적인 뜻은 아니었지만, 직접적인 말 자체가 매우 파괴적이었기에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었고, 걱정이 되었으며, 나는 그렇게 밖에 내 마음을 표현할 줄 몰랐기에, 그게 가족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나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마저 표현하지 않으면 나는 더 심각한 위기에 빠졌을 테니 말이다. 그런 아픔 가운데 내 말을 들어주고 받아주고 지금껏 사랑해주고 있는 가족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다.
나는 이제 그 말에 담긴 심경을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고등학생 당시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매일 열심히 공부하고 성적을 올리느라 고군분투했다. 매일 열심히 공부를 했다기보다는 매일 고군분투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이 컸다. 시험일, 수능일은 점점 다가오고, 내가 만족하는 수준의 성적을 내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내 능력은 턱없이 부족해 보였고, 나는 내 욕심과 실력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하루하루를 꽉 채워서 공부 일정을 소화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게 쉽지만은 않았다. 잠자고 공부하고 학교 가고 생활하고... 하루하루를 내가 원하는 만큼 온전히 아낌없이 쓰려면 매일매일 마음을 다잡고 파이팅해야 했는데 생각보다 체력과 실력은 받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가 저물어 가는 시점에서 다음날을 생각하면, 그다음 날은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긴장과, 과연 오늘보다 더 열심히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과,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뒤섞여서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가족들은 '그랬구나'하는 반응과 함께 '오해했다'라고도 말했다. 내가 죽음에 대해 말한다고 생각했고, 생명에 대한 존중심이 부족하다고도 생각했단다. 그들이 당시 나를 그렇게 생각했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은, 그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은 결국 나였고, 나부터도 나 자신에 대해서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부터도 내가 죽음에 대해 말한다고 생각했고, 내가 생명에 대한 존중심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나부터도 나를 오해했는데, 그들에게 나의 마음을 대신 알아주길 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기대였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 이제야 나도 내가 그렇게 완벽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나는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내 마음을 가지고, 아무렇게나 던진 은유들로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일을 줄이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의 반응을 보니 내가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많은 상처를 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어떤 부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나 생각해보니, 그렇게 오해가 될 수 있는 표현들이 생각나고, 이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할 수 없다면, 혹은 설명할 시간이 없다면, 그 말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이 부면에 대해 얼마나 많은 잘못과 실수를 해왔는지 생각이 나서 매우 부끄럽다. 그리고 결심은 했지만, 실천하기란 쉽지 않으니 앞으로 노력해야겠다.
그러던 최근의 어느 날 정말 파괴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만, 이렇게 내가 했던 결심을 떠올리며, 하고 싶었던 말을 삼켰다. 그 말에 상대방이 상처 입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삼키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삼킨 말이 너무 날카로웠다. 너무 날카로워서 속이 아팠다. 그 날카로운 말이 무뎌져서 둥글둥글한 말이 될 때까지 삭히고 발효시켜서 상대방에게 유익한 말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는 어른이 되었으니, 내 감정을 좀 더 어른스럽게 표현할 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나는 또 하나의 반성문을 쓴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파괴적인 말을 하는 것도 내가 사랑하는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방법 중 하나이다.
때때로 주변 사람들에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에는 '힘들다', '도움이 필요하다', '옆에 있어달라' 등의 표현을 할 수 있고, 그 머릿속에 떠오르는 파괴적인 단어들을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을 땐, 일기를 쓰면서 내 마음을 정리하자.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욱 아프게 되어 날 떠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사랑이라는 이유로 내 곁에 머무르고 있을 때, 더 이상 그들에게 아픔을 주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