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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Apr 15. 2023

사랑과 연민의 얼굴들

- 김정환의 『개인의 거울』을 읽고



사탕처럼 달기 위하여

몸이 너를 향해 한없이 줄어든다.

식물이 이렇게 사랑할 것이다.

당분이 다 빠져나간 것을

본 후에도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화가들이 이렇게 사랑할 것이다.

색 쓰고 색을 쓰며 온몸이 투명한 유리의

타자로 될 때까지 사랑은 계속된다.

시인들이 이렇게 사랑할 것이다.

한 행보다 더 가는 몸의 마지막 남은

성가신 의미가

유리로 될 때까지.

                                                      - 「유리」 中  


  ‘유리’하면 으레 떠오르는 심상들이 있다. 투명함, 단단함, 차가움 같은 것들. 허나 그뿐이랴. 만사가 양면적이듯 유리 역시 마찬가지. 투명한 탓에 더러움이 쉬이 들통나고, 유연하지 못해 자칫 깨지기 쉽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도 뭔가 양가적인 느낌이 들었는데, 차가운 듯 뜨겁고 날 선 듯 은근한 느낌이랄까. 너를 향해 나를 줄이고, 당분을 다 내어주어도 멈추지 않으며, 온갖 색깔과 의미가 다 빠져나간 자리에 투명으로만 남는 사랑이라니. 열정 끝에 맞이하는 공허가 상상되기도 했다. 희생, 헌신, 소진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다 문득 ‘성가신’이라는 수식어가 눈에 띄었다. 어쩌면 사랑은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떨쳐내고 본질로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인 걸까. 사랑을 통해 닿을 수 있는 어떤 지점이 있다면, 그게 어떤 모습이든 만만할 성싶지는 않다. 시에서도 삶에서도 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얼마간 난해하고 묘연한 채로.



아내는 파계 수녀였으나 종교개혁과 상관이 없고

농민전쟁 한가운데 우리는 난파선을 타지 않았다.

결혼은 공포의 화석. 화석화에는 미치지 못한다.

말랑말랑해서가 아니다. 통로가 두 겹 연민이고 곁이

곁의 결핍을 낳고 우리 생에 숱한 생들의 온전한

세계들이 소요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고 죽은 그들이

나라는 세계의 일부였으니 더욱 그렇다.

                                                                       - 「상호의 실내」 中     


  사랑이 본질적이고 추상적인 주제라면, 결혼은 보다 현실적이고 일상적이다. 첫 두 행은 담담한 가운데 무언가 의미심장하다. 역사의 큰 소용돌이에서 살짝 빗겨있는, 이른바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자기 인식을 드러낸 걸까. 결혼은 공포의 ‘화석’이지만, ‘화석화’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인가. 반복과 모순, 부정에서 촉발된 낯선 충격이 구절을 몇 번이고 곱씹게 한다. ‘연민’과 ‘결핍’, ‘소요’와 ‘일부’ 같은 단어들이 눈에 띈다. 부부와 결혼으로 운을 뗐으나 이야기의 범위는 돌연 확장된다. ‘숱한 생’과 ‘온전한 세계’, ‘죽은 그들’은 다 무엇인가. 저마다의 결핍을 매개로 이어진 삶, 역사적 또는 동시대적인 타자들과의 불가분의 관계, 이 모든 건 ‘연결성’이라는 키워드로 모아진다. 제목 속 ‘상호’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 세상에 연결되지 않은 건 없다는 생각,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삶은 무언가에 빚지고 있다는 자각. 이 와중에 일생을 함께 하는 부부지간에서야 말해 무엇하리. 겹겹이 쌓이는 시간 속에서 공포든 연민이든 함께 한 흔적을 화석으로 아로새길 수밖에. 결핍을 통한 연결과 서로에 대한 연민은 결국 사랑을 지속하는 힘이 돼줄 것이다.



나보다 더

강력한 근육이다.

나보다 더

이유가 분명한 부리다.

나보다 더

목적이 뚜렷한 시선이다.

나보다 더

불길한 운명이다.

나보다 더 엄혹한 중력이다.

그래서 어디에나 있는

새.

몸무게 없다.

연민 없이는.

한 천년 전부터.

                                      - 「새」 전문


  이 시에도 ‘연민’이 언급된다. 연민 없이는 무게를 갖지 않는 존재, 세상에 대한 연민의 무게로 비상하는 존재는 새에서 그치지 않고 ‘나’에게로 확장된다. 연민이 존재의 조건인 셈. 일전에 한 지인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가 대답했다. 사랑은 측은지심이라고, 가엽게 여기는 마음 그 깊은 곳에는 필시 사랑이 있어서라고. 당시엔 그러려니 했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그 말이 현답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사랑 없는 연민은 업신여김이나 시혜적 관점과 다름없고, 연민 없는 사랑은 한순간 격정에 그치고 말 것이다. ‘한 천년 전부터’ 그래왔듯이, 사랑과 연민의 힘이야말로 우리에겐 ‘믿을 구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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