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음악회는 정명훈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수상을 하여 귀국연주회를 했던 이화여대 강당 에서의 피아노 콘서트이다. 아버지와 엄마는 피아노를 배우고 있던 초등생인 나를 연주회에 데려가 주셨다. 다른 건 다 잊었고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하늘거리는 흰색 셔츠를 입은 정명훈의 모습은 내 기억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이후로도 나의 음악회 편력은 계속 이어졌는데 몇 십년동안 쌓인 국내외 연주자와 오케스트라등등 클래식 위주로 감상했던 나의 음악회 데이터 베이스는 용량이 꽤 되는 것 같다. 모든 것의 시작은 아버지의 음악사랑이 나의 유전자에 깊이 박히게 된 덕분이다.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난 이미 음악을 아주 많이 들었을 것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주말마다 우리집은 클래식 음악 소리로 하루를 열었다. 아버지는 볼륨을 높여서 듣는 것을 좋아하셨다. 릴 테이프와 엘피 음반이 집에 아주 많았고 릴 데크와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나를 사로잡았다. 성탄절에는 헨델의 메시아를 릴 테이프로 들었는데 곡이 아주 길었지만 졸면서도 끝까지 들었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감상했고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으로 새해를 맞았다. 매 년 치러지는 의식이었고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없이 온 가족이 신성한 의식처럼 지켰다. 엄마는 음악보다는 맛있는 걸 만들어서 우리들에게 주는 걸 더 좋아하셔서 우리 형제들은 맛있는 걸 먹고 뒹굴면서 마냥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예술의 전당 가까이에 살게 되어 개관공연부터 종종 갔었는데 그 감동은 오디오를 통해 집에서 듣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엄청난 만족감을 주었다. 그렇게 빠져들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세상의 갖가지 기쁨들 중에 가장 강력하고 중독성이 강한 것이 현장 음악의 맛이었다. 연주자가 다르면 같은 음악이 다르게 표현되는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면서 더 좋아졌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뜸 해 졌던 음악회 탐닉은 두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고 악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내 아이들도 나처럼 음악을 좋아했는데 후천적인 경험에 노출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유전인자에 음악이 새겨진 것처럼 내 아이들도 그런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렇게 아이들은 배우고 싶어하는 악기를 골라서 배우며 성취감을 맛보는 것 같았다. 큰 아이는 클라리넷을 작은 아이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둘 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오케스트라를 하면서 나보다도 더 깊이 음악에 빠져들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앞두고는 합숙하며 연습을 했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든 아이들이 새벽부터 연습을 시작한다고 했다. 음악의 신은 이렇게도 매혹적인 것이다.
작은 아이는 중학교에 다닐 때 사물놀이에 빠져들기도 했는데 그 경험은 나중에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할 때에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우리 음악의 가락과 장단이 무심히 작은 아이의 곡에서 묻어나올 때 미소를 짓게 된다. 그걸 찾아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건 오히려 다른 나라 음악인 들이라는 게 놀랍다. 음악을 너무나 사랑했던 할아버지와 엄마를 거쳐서 드디어 작곡가도 등장하게 되었다.
나의 형제들이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음악으로 달랬던 것처럼 나의 아이들도 삶의 고난을 음악으로 극복하며 살아온 것 같다. 음악이 아이들의 삶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덜 좌절하고 또 덜 슬퍼하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하나씩 이루어 나갔던 것 같다.
악기를 다룰 줄 알면 아무래도 음악의 이해가 수월해진다. 십 년쯤 전부터 해금을 배우면서 국악공연에도 가끔 갔다. 배우는 곳이 국립국악원이어서 공연을 접하기가 쉬웠다. 국악의 매력은 서양음악과는 달리 사랑방의 문화여서 소규모 연주회가 많고 악기 하나하나의 소리에 더 집중하게 된다. 또한 일 년에 한 두 번은 종묘제례악 공연을 보는데 그 시간은 내가 배달민족인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새롭게 느끼게 해준다. 그렇게 느리고 그만큼 단순한 음과 가락으로 그런 웅대한 세계를 그려내는 음악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가장 가라앉아있던 시기에 오르간을 배울 용기를 냈었다. 레슨을 받은 지 두 달이 되면서부터 미사반주를 맡게 되었는데 성가대를 하며 미사를 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나혼자 다 책임을 지며 미사의 중요한 일부가 되는 것이고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연습할 때의 기분은 그대로 기도였다.. 사실 내가 오르간 레슨을 받으려던 시점은 나의 삶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고립되어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출구가 안 보이는 닫힌 방에서 내 불안한 정신은 빙빙 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쉽게 배우게 될 줄 알았던 오르간 마저 피아노와는 다른 터치감으로 나를 곤경에 빠뜨렸다. 그래서 일주일에 세 번씩 오르간 연습을 하러 성당으로 갔는데 그러면서 나는 우울감에서 빠져나오게 된 것 같다. 오르간 연주는 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나의 삶에서 음악은 중심을 차지하고서 내 삶을 지탱해준다. 내 삶 전체를 통해 한 발 한 발 들어갔던 음악의 숲은 아직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안에 아직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무궁무진한 나무와 돌과 향기가 가득할 것이다. 내 삶을 다 바쳐도 절대로 전모를 드러내지 않을 그 곳에서 노니는 나는 가장 순수한 모습일 것이고 또 번번이 충만함에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어떤 슬픔과 고난이 닥친다해도 내 옆에서 나를 지탱해줄 귀한 친구, 음악은 나의 삶을 빛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