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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Apr 06. 2024

에필로그_낙관은 학교에 있다

  요즘 나는 매 순간 나를 의심하느라 바쁘다. 나이가 들며 실종된 주의력 탓에 물건도 생각도 빠트리느라 도무지 나를 믿을 수가 없다. 오늘도 그렇다. 오후 강의를 위해 차에 타서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 난 깨달았다. 오늘 주제인 창의성에 대한 추가 설명을 위해 출발 5분 전에 인쇄해 둔 자료가 여전히 프린터 위에 그대로 놓여있다는 사실을. 나에 대한 익숙한 분노와 실망, 그리고 허무가 차 안을 가득 채운다. 그래도 차 키와 휴대폰을 한 번에 챙겨서 시동 걸고 나온 것이 다행이라며 자조하며 마른걸레 짜듯 어떻게든 기억을 쥐어짜내어 정리했던 내용을 머릿속으로 복기한다.    


       

  메모리가 없나 싶은 나에게도 다행스러운 것이 하나 있다면 나에겐 내 위주의 기억 편집 능력이 있다. 부정적 정서는 그 순간 처절하게 겪는 대신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곳에도 오랜 기억에도 저장해두지 않는 편이다. 다만 숨 가쁘게 온 마음으로 좋았던 순간은 최대한 내 쪽으로 가까이 두는 편이다. 그 덕에 내 정서에 행복으로 각인된 순간이 몇 가지쯤은 있다. 일상의 구태의연함에서 나를 지켜주는 그 순간에 대한 기억들. 납작한 내 삶에도 몇 번쯤은 혼자서 몰래 행복을 꽉 쥐어본 순간들이 내게도 있다. 그때의 시간, 공기, 내 마음이 여전히 생생한 그 순간들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나는 11반이어서 6층 꼭대기에 교실이 있었다. 여고생에게 6층은 매번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데, 등교를 위해 오르는 아침의 계단은 혹독함이 가득하다. 계단 앞에 닿기까지 집에서부터 30분을 쉬지 않고 걸어왔는데, 신에겐 아직도 6층 계단이 있다. 계단마다 팽팽해지는 허벅지 근육의 긴장을 느끼며 ‘나 죽겠다. 이러다 안 그래도 굵은 내 다리 더 굵어지겠네.’ 곡소리를 하며 바닥만 주구장창 보고 꾸역꾸역 올라간다. 쉬는 시간의 계단은 속도가 매서운 무빙워크로 용도변경을 해낸다. 매점을 향해 돌진하는 여고생은 계단에서 걷는 법을 모른다. 1층 매점까지 컵라면을 하나 먹고 다시 올라오는데 허락된 시간은 단 10분. 라면은 따듯해지면 먹는 게 맞다. 아직 수분을 가득 담지 못한 바삭한 면은 올라오며 소화를 시키면 그만이다. 오독오독 씹어먹는 반 생라면 덕분에 수혈을 받고 다시 6층을 날아오른다. 그 어려운 일을 매번 해내고야 만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저녁시간의 계단은 그래도 너그럽다. 그날도 전력질주하기 가장 좋은 광활한 복도를 뛰어 급식소에 들어가 급식을 해치우고 아이스크림 한 입을 물고 교실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계단 중간에 다른 반 친구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친구들은 먼저 들어가고 나는 천천히 혼자 계단을 올랐다. 문득 내 두 발은 6층 교실 앞 난간에 멈췄다. 가을이 담긴 노을이 느리게 머물러 있던 초저녁. 대학생이 되고는 싶었지만 나이가 들면 내 말랑말랑하고 촉촉한 소녀의 감수성이 건조해질까 봐 노심초사했던 열일곱의 나는 허세를 담아 걸음을 멈췄다. 감성의 계절 가을이라면 일상과 거리를 두며 고독을 찍어봐야 하지 않나. 삶에 대한 회의, 김동률 님의 노래에서 들었던 이별의 무드, 이제는 이문세 님의 광화문 연가도 들어봐야 세상을 좀 아는 거지. 하며 감수성 예찬론자로서 이 순간 세상의 고독은 다 짊어져보리라 다짐했다.        


   

  별안간 계획에 없던 이상한 기분이 내 온 마음을 감쌌다. 서서히 내 마음이 벅차올랐다. 장갑 낀 손으로 어설프게 만져보려 했던 허세의 마음, 느껴지기 전에 마음부터 먹었던 어른의 고독이 아니었다.

  ‘아, 어쩌면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구나. 나는 학생이고, 학교에 있다. 몇 걸음만 떼면 내 교실에 내 자리가 있고 내 옆엔 실없는 농담만 주고받는 내 친구들이 있다. 아, 나 지금 행복하구나!’    


      

  그 이후에 교실에 들어왔을 때의 장면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순간 감각했던 가을 초저녁의 노란빛의 은은한 공기, 교복 블라우스 지나며 내 팔에 남긴 살랑이던 가을 저녁의 마른바람, 열일곱의 정서에 불어 들어와 온 마음을 채웠던 그 공기는 영원히 내가 가지고 있다.           



  덕분에 나는 그 저녁부터 행복한 학생이 되었다. 내가 배우고 있는 과정을 걷고 있는 게 좋아서 시험만 아니면 공부를 계속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가끔 틀려도 괜찮은 학생의 특권에 안심이 되었다. 학교는 너그러운 곳이어서 1교시가 끝나면 2교시가 있고 오늘 수학 시간에 틀렸어도 내일 수학 시간이라는 기회가 있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는 이어폰을 끼고 김동률 님의 노래를 들으며 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하곤 했는데, 그 순간에는 30명이 함께이면서도 개별적인 외딴섬이 되어 교과서에 쓰인 글씨를 내 글씨로 옮겨 적는 은은한 고독의 시간이 좋았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가 내게 꽂히는 시선에 얼굴 빨개지던 순간도 웃겼다. 쉬는 시간 종이 치면 와르르 모여 농담을 주고받는 소녀들과 하루종일 함께여서 좋았다. 힘든 게 투성이고 웃긴 게 투성이던 오늘들이 썩 마음에 들었다.           



  대학을 가서 매일의 최대 고민은 하나였다.

  ‘오늘 점심 뭐 먹지?’

메뉴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작은 규모의 학교인 탓에 학교 앞 식당도 적어서 기껏해야 김치볶음밥, 오징어볶음, 중국집, 어쩌다 학생식당이 다였다. 주로 선택을 잘해주던 친구가 없는 날엔 그 친구에게 전화하기도 했다.

  “어디야? 큰일 났어 우리. 뭐 먹을지 모르겠어. 우리 오늘 뭐 먹을지 좀 정해줘.”

까르르 까르르 한 바탕 웃고 나서 계단을 지나 봄이 내린 아담한 교정을 친구들과 함께 걸었다. 명랑한 걸음마다 연둣빛 봄이 묻고, 분홍빛 봄이 양 볼을 간질거린다. 맑고 투명한 봄의 푸른 햇살 샤워를 하며 걷는 순간 나는 또 찌릿했다.

  ‘어쩌면 지금이 내 인생의 화양연화일 수 있겠다. 나 지금 행복한 순간을 살고 있구나. 나중의 나는 오늘의 나를 힘껏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구체적으로 행복했던 공간은 학교였다. 학생인 나는 학교에서 배웠고, 놀았고, 나를 발견했다. 때론 나에게 실망했고, 친구에게 서운했고, 싸우기도 했고, 친구를 위로하기도 했다. 소녀의 감성을 담은 쪽지를 주고받았고, 처음 마셔보는 교내 자판기 커피 앞에서 친구들과 종이컵을 맞대고 여고시절의 답답함을 서로 토로하면서 짐짓 드라마 속 어른이 된 듯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나는 어떤 시험은 선명한 숫자를 기억할 정도로 잘 봤고, 어떤 시험은 잊을 수 없을 만큼 망치기도 했다. 등수와 점수라는 숫자에 압도당해 뾰족해지기도 했었고, 그럼에도 다음날이면 아무렇지 않게 습관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의 무던함에 놀라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학교에서 컸다.           



  나는 나다움으로 잘 삶을 실현하고 싶은 욕구가 가득한 사람이다. 내가 꿈꾸는 삶은 내가 가진 기능을 최선으로 수행하는 삶인데, 내 욕구에 도통 응답하지 않는 듯 보이는 내 삶이 자주 초라하게 느껴졌다. 내 직업을 누가 알까 봐 내 직업을 꽁꽁 싸서 감춰두기가 일상이었고, 일은 생계라며 내가 가르치고 배우며 누렸던 소중한 기쁨의 순간을 애써 외면했다.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내가 마흔이 다되도록 학교에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교복은 벗은 지 오래고, 친구들과 책걸상에 앉아있던 내가 1m 남짓 이동해서 교탁과 강단에 홀로 서 있지만, 나는 여전히 교실에 있고 강의실에 있다. 8살에 학교에 입학한 이래 지금까지 30년을 넘는 시간 동안 나는 학교에서 컸고 여전히 학교에서 자라고 있다. 무엇보다 배움의 과정에 서 있는 나를 나는 꽤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나는 교실에서 어린이들을, 대학에서 청년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새롭게 배운다. 배우는 과정에서 내게 없던 세상에 대한 새로운 폴더가 추가된다. 세상에 대한 해상도를 높여가는 확실한 행복은 나를 자주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준다. 덕분에 나는 여기에 고여있지 못한다. 게으른 나에게 가르치고 배우는 내 일은 나를 살리는 일이다. 수업이 시작되면 어린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본다. 대학생들은 새로운 이론과 자신의 삶을 견주어가며 미간과 눈에 힘을 준다. 내 생각과 어린이, 청년의 생각이 만난다. 그때 어린이와 청년의 반짝이는 눈은 매번 새로워서 매번 감격스럽다. 그들은 절대 못 볼 자신들의 신선한 눈빛과 진지함을 나는 본다. 지성의 전구가 반짝이는 눈과 생각이 담긴 표정을 본다는 건 강의하는 사람이 가진 특권이다. 그 표정을 스스로 본다면 그들은 스스로에게 반할 게 분명하다. 내가 이 순간을 누리며 그들에게 반하듯. 학교의 행복은 다른 모양으로 내게 자주 다가온다.           



  학교가 어렵다고 말한다. 밖에서 보면 희극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고 하지만 학교는 반대이다. 밖에서 보면 불안 가까이 보면 희망이 학교다. 학교 밖에 있는 사람들은 과거의 개인적 경험으로 학교를 판단하는 모습을 본다. 신문 기사 속 무서운 학교 소식에 불안한 시선으로 학교를 곁눈질한다. 물론 기사는 사실이고 과거의 개인적 경험에 의한 불신도 개인적 서사가 분명하다.           



  하지만 학교는 늘 현재진행형으로 오늘을 산다. 학교는 늘 과정의 무빙워크 위에 움직이고 있는데 과거의 경험으로 오늘의 학교를 오해하는 건 시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학교에 대한 슬픈 사건도 사실이나 사건은 일상의 삶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문에서 사건을 다루는 목적은 그 시의성으로 인해 우리의 학교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함이라 믿는다. 우리는 병을 고치고 싶어서 의사의 진단을 받는 것이지, 진단만을 위해 병원을 가지는 않듯이 말이다.      



  언제나 그랬듯 여전히 학교는 배움과 생각들로 반짝반짝 빛나는 곳이다. 애매한 수사가 아니다. 수업이 이루어지는 교실엔 구체적으로 반짝이는 눈빛들이 전구를 켠 듯 여기저기서 밝게 울려 퍼진다. 어린이도 그렇고 대학생도 그렇다. 우리는 고정되어 학생은 자리에 앉아있고 나는 서 있지만, 우리는 생각을 언어로 주고받으며 서로의 생각을 넘나 든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고 우리의 사이엔 생각들이 잔잔히 흐르고 움직인다. 매일의 하늘이 같은 적이 없듯 매시간 우리의 생각은 새것이어서 매번 신선하게 반짝이는 호수를 이루어낸다.          


  교실엔 각자의 고유한 빛이 잔잔하게 뿜어져 흐른다. 무한히 흐르는 생각들을 만나는 일은 내 기쁨이다. 어린이의 끄덕이는 눈빛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대학생들이 아하! 하는 통찰의 눈빛에서 배움을 통해 세상에 대한 해상도를 높여가는 날것의 표정을 나는 본다. 쉬는 시간이면 어린이도 대학생도 기지개를 켜며 발가락 끝부터 머리끝까지 맑고 낯선 공기를 불어넣는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노닌다.      


     

  덕분에 교실에서는 매 시간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된다. 수업에서 생각을 나누고 키운 우리는 수업이 끝날 때 새로운 배움 덕분에 새로운 폴더가 생성되고 때론 기존의 지식이 정교화된다. 그렇게 강의실 문을 닫고 나갈 때 우리는 강의실을 들어왔던 과거의 나와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된다.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자라고 있는 자신을 격려하는 하루와 매 시간이 있는 곳. 배움과 공부는 늘 학교를 가득 채우며 뿌듯함을 건네준다. 학교는 그런 곳이다.           



  내가 학교에서 만난 낙관의 순간이 흘러넘친다. 어쩔 수 없이 그 반짝이는 순간들을 모아 보기로 한다.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자랑스럽게 하나를 굳게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낙관은 학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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