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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Apr 13. 2024

시험은 흐른다

학교 낙관 학교심리

시험은 참 고약하다. 공부를 해도 힘들고 안해도 힘들다. 공부를 안 하면 혈관에 가시가 돋친 듯 불안하고 죄책감이 드는 데다 노력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실망이 온몸에 번진다. 시험공부를 하면 모든 것이 공부하기 어려운 이유가 된다. 쓸데없이 맑고 푸른 하늘에 살랑살랑 꽃이 만개해서 앉아있기 힘들고, 비가 오고 우중충한 날엔 머리에도 먹구름이 낀 듯 하품이 절로 나고 방금 외웠던 것도 전혀 기억나지 않아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의 염치에 책임감을 더해 책상에 앉기로 한다. 책은 펼쳤으나 손으로 연필 한번 잡고, 휴대폰 한 번 만지고, 갑자기 눈앞에 보이는 몽당연필들을 좀 치우고, 오른쪽에 너저분하게 쌓아둔 책을 좀 정리해 본다. 이제야 좀 개운해서 공부할만한 책상이 되었다.


                          

  첫 줄을 읽는다. 수업시간에 배웠던 내용이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알고 있는 내용을 만나니 자신감이 생긴다. 게다가 나는 이 날씨가 좋은(나쁜) 날에도 공부를 하고야 마는 학생이다. 공부하는 내 모습에 내가 반하는 건 공부의 덤이다. 뒷 장을 열어본다 이건 무슨 내용이지? 이걸 배웠나? 수업시간에 잠깐 안면을 튼 것 같은데 아리송하다. 확실한 건 새로운 내용과의 낯가림이 시작되었다는 것. 한 번에 외워지지도 않고, 이해도 잘 안 된다. 갑자기 이건 중요하지 않게 보인다. 이렇게 중요하지 않은 내용은 내일 시험에 안 나올게 분명하다.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잘 외웠고 잘 풀 수 있는 문제를 풀며 자신감을 더해간다.


                          

  깍쟁이처럼 네모 반듯하고 1g도 채 되지 않을 만큼 후들거려 나부끼는 선풍기 바람에 쉽게 날리는 여리여리한 시험지가 내 앞에 놓인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각 잡히고 무거운 1g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내 책상 위, 내 손바닥 아래에 깔려 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고, 언제나 불행은 불현듯 나타나 내 등에 칼을 꽂는다. 어김없이 오늘 시험엔 어제 낯가림을 하던 문제가 나온다.


           

  우리 열 한 살들도 사뭇 진지하다.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하는 수현이, 이미 시험지가 나오자마자 책상에 냅다 엎드린 연우, 과연 40분 안에 다 풀 수 있을까 싶은 왕느림보거북이 속도로 문제를 하나하나 읽고 있는 규윤이도 보인다. 어떻게든 제 손으로 제 앞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그 노력이 우리 20평 남짓의 교실보다 더 크게 부풀어 오르는 시간이다. 물론 이 25문제를 벌써 끝낼 리가 없는데 이미 시험지를 넣고 평온하고 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준서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마디.

  “시간을 충분히 쓰세요. 검토하세요. 빠진 문제는 없는지, 번호를 써야 하는 데 기호를 쓴 문제는 없는지. 계산이 틀린 문제는 없는지 꼭 검토하세요.”



  검토를 하고 있던 친구들이 흠칫 놀라 다시 한번 시험지를 손에 쥔다. 드디어 맑은 종소리가 온 교실에 내린다. 덕분에 교실 바닥을 가득 채웠던 무거운 공기는 가벼운 아지랑이가 되어 피어오른다.


           

  참 신기하고 알쏭달쏭한 순간이 있다. 채점한 시험지를 나눠주겠다고 하면 어린이들은 눈을 반짝이고 손을 가슴에 모은다. 그리고 잔뜩 기대한다.

  “와! 궁금해요!”

  “선생님! 100점 있어요?”

  어린이들은 등수가 궁금하지 않다. 100점이 궁금하다. 무엇보다 그 100점이 나이길 바라는, 아니 나일 수 있다는 연둣빛 기대가 밝은 싹을 틔워 곧 땅 위로 솟아오를 참이다.


          

  “우리는 시험을 왜 볼까요? 시험은 나 100점이야, 나 80점이야 하고 점수를 받기 위해 보는 게 아니에요. 시험은 하나의 과정이에요. 시험을 보고 배운 내용 중에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이고, 잘 모르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보는 거예요. 그래서 틀린 문제를 다시 한번 풀어보면서 다시 한번 배우는 기회를 갖고 구멍을 메꾸어 튼튼한 배움을 만들기 위해 시험을 봐요. 그래서 선생님은 점수를 적어주지 않아요. 여러분도 다른 친구의 점수를 궁금해하지 않고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알아차리는 시간을 가지길 바래요.”


          

  나는 시험지를 채점한 후 점수를 적어주지 않는다. 어린이들이 단호한 숫자에 눌려 자신들이 들인 노력의 과정을 살피는 일에 소홀해질까 싶은 마음이 들어서이다. 40분 간 전력질주하며 이십 여개의 허들을 넘었을 어린이들에게 빨간 펜으로 숫자만 적어주기가 미안하다. 단호한 붉은 숫자보다 더 큰 의미와 노력이 한 문제마다 담겨있다고 믿는다. 점수는 확실한 지표가 되어주지만 점수만 보면 어린이를 볼 수가 없다. 무엇보다 어린이들이 난 80점짜리야, 나는 90점짜리야 하고 점수에 몰입하여 자신의 과정을 살피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된다.


          

  어린이들은 문제를 푸느라 문제를 보고 또 보고, 배운 내용을 끄집어내어 요리조리 돌려보고 적용해 보느라 안간힘을 쓰는 걸 나는 보았다. 참새처럼 종알거리던 아이들은 소리를 내지 않고 제 자리에서 열심히 달렸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 문제를 맞았고 누군가는 틀렸다. 오답을 썼다고 해서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니다. 시험을 보는 동안 진심으로 대했으나 아직 서툰 과정이 있었을 뿐이다. 시험 덕분에 알게 된 부족한 점은 채우면 된다. 그걸 위해 우리는 시험을 본다. 그 문제를 맞기까지 유리는 한 주의 즐거움인 나 혼자 산다의 앞부분 30분을 포기하며 공부했을 게 분명하다. 오늘의 정답은 유리가 들인 시간과 노력의 결과이다. 시험지 1g의 무게가 무겁듯 한 문제는 한 문제 이상의 이야기를 갖는다. 나는 그 과정들을 뭉뚱그려 붉은색 펜으로 숫자를 써주지 못한다.


          

  능력을 고정된 개념이 아닌 노력에 따라 성장 가능한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마인드 셋을 제안한 스탠퍼드 심리학과의 캐럴 드웩 교수는 사람들이 어떤 일의 원인을 무엇으로 생각하는지에 관한 ‘귀인’에 관한 실험에서도 과정의 중요성을 제안했다. 두 그룹이 있다. 처음엔 두 그룹 모두에게 성공 경험을 처치한다. 이후 A그룹은 성공의 원인을 과정과 노력에 귀인 했고, B그룹은 아무 처치도 하지 않았다. 이후 두 그룹에게 실패 경험을 처치했을 때 두 그룹의 태도는 달랐다. 성공의 원인을 노력이라는 과정에서 찾은 그룹은 실패의 원인도 과정에서 찾았다. 지난 성공의 방식을 답습하느라 새로운 과제 분석을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방법이나 전략이 적절했는지를 파악했고, 행여 방심하지 않았는지,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는지 점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이렇게 과정을 살폈고 덕분에 과정의 정교함을 더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성공의 원인을 과정에 귀인하지 않은 B그룹은 실패 후에 더 노력하지 않았다.


           

  과정에 진심을 다하는 태도는 힘이 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내 수고를 알아주고 나만의 뿌듯함을 경험할 수 있다. 대학생 시절, 유화 수업을 들었던 나는 학기 마지막 작품으로 유화 한 점을 제출해야 했다. 서둘러 학교 앞 미술학원에 등록한 나는 속성으로 유화 수업을 듣고 작품을 시작했다. 내 캔버스엔 여름의 세찬 햇살을 받아 온몸으로 제 빛을 발하는 빨강, 분홍, 하얀색의 접시꽃으로 흐드러졌다. 색을 올리고 올릴수록 나는 내 작품과 사랑에 빠졌다. 내 미흡한 손과 붓이 내 사랑을 전달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했던 날도, 움츠렸던 날도, 때론 자뻑에 취했던 날이 다 캔버스에 있었다. 어느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 깊은 초여름 밤, 나는 택시를 타고 화실로 향했다. 자정에 이르러 아무도 없는 화실에서 나는 내 그림을 만났다. 풋내 나는 초여름을 닮은 서툰 색을 나는 올리며 내 진심과 사랑을 더했다.


           

  당연히 내 작품은 A+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것이다라고 쓴 이유는 내 학점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사랑에 빠진 내게 학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부모는 자식이 최고였을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잠을 자고 있는 아이 같은 표정에,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어린 목소리에, 학교를 가는 뒷모습도 사랑스럽다. 나도 그랬다. 내 작품이 A+아니라고 해서 내 접시꽃밭을 그리는 과정에서 내가 느낀 낯선 환희와 기쁨의 색이 바래는 건 아니다. 학점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초여름의 순간을 나는 기억한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고, 진심을 다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아이 학원을 픽드랍할 때 나는 진심으로 운전한다. 열 살이 좋아하는 음악과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우리는 때론 신나게 때론 잔소리와 볼멘소리도 주고받으며 차 안에서 오늘을 나눈다. 저녁을 먹고 난 설거지를 할 때 내 저녁을 담아준 접시를 꼼꼼하고 신나게 닦는다. 가설을 세워 수집한 자료의 통계를 낼 때 수십 번을 실패하고 또 시작한다. 내 모든 실패에도 내 진심은 모두 담겨있다. 진심을 다해본 사람이라는 나 자신에 대한 경험은 이렇게 힘이 세다.


            

  과정에 진심을 다해본 경험은 실패 후에도 다시 노력할 수 있는 힘인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길러준다고 믿는다. 성공을 과정 덕으로 보낼 수 있는 사람은 다음 성공을 위해서도 과정에 진심을 다한다. 내 노력으로 결과를 컨트롤할 수 있다는 통제력을 가진 까닭이다. 실패를 과정 덕으로 보는 사람은 전략과 노력의 양과 방향을 수정한다. 결국 과정을 가진 사람은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결과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이 결과에 좌지우지되는 것과는 다르다.


               

  물론 결과도 중요하다. 단순해 보이는 숫자는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누군가는 한 문제 4점을 맞기 위해 노는 시간을 줄였을 것이고, 누군가는 모르는 내용을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머리를 쥐어짜며 자신의 최선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시켰을 것이 분명하다. 각자의 최선이 만든 숫자는 경건하고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 단, 우리는 숫자가 아닌 과정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결과를 위해 들인 노력의 시간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시험의 가장 큰 목적은 다시 과정으로 돌려보내기 위함이다. 나 몇 점이야로 끝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잘 하는 영역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지에 대한 파악이다. 동시에 내가 모르는 영역은 무엇이고 약점은 무엇인지 파악하여 다시 기회를 주기 위한 과정이 시험이다. 시험의 방향은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향해야하는 이유이다.


           

  과정 위에 살고 있다는 것은 참 기쁜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요즘이다. 배우고 있는 과정, 실패하는 과정, 감탄하는 과정. 어쩌면 우리 삶은 과정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톨스토이도 말했던 오늘의 운명이 내 편이면 내일은 남의 편이듯, 우리의 과정은 늘 변한다는 것도 하나의 위안이다. 오늘의 성공이 영원하지 않듯 오늘의 실패도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지금도 흐른다.


          

  나의 열한 살들도 과정 중에 진심으로 재잘거리고 있다. 시험지를 받아 든 수영이는 눈물이 글썽거린다. 붉어진 볼과 차오른 눈물을 숨기고자 괜스레 우유박스 쪽으로 가서 우유를 집어 들었다가 놓았다가 초록색 반듯한 우유박스 모서리를 만지고 있다. 시험지를 제일 마지막에 냈던 수영이는 쉬는 시간에 채점을 다 맨 나에게 와서 조심히 물었었다.

  “선생님, 저 많이 틀렸어요?”

  “응, 수영이 맨 마지막 페이지를 좀 틀렸더라.”

수영이의 비밀스러운 눈물에 조금 전에 했던 내 말을 호로록 주워 담고만 싶다. ‘괜찮아’라고 말해줄걸.

          

  나의 열한 살들이 많이 틀린 문제를 다시 설명해 주었다. 문제를 푸는 여러 방법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이 문제를 푸는 1번 방법은 이거예요. 우리는 삼각형 세 각의 합이 180도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 두 각을 더해서 180도에서 빼면 되겠죠. 2번 방법은 이거예요. 우리는 2 직각이 180도인 것을 알고 있죠. 외각을 통해 안쪽 두 내각의 합을 알게 돼요. 그러면 나머지 한 각을 구할 수 있죠. 혹시 다른 방법으로 풀어본 친구 있나요?”



  시험지 속 작은 수학 문제 하나에도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답이 하나일 때에도 그 답을 찾아가는 경로는 다 다를 수 있는데 세상의 답은 하나가 아니다. 나는 나의 열한 살들이 각각의 방법으로 문제를 경험하길 바란다. 시험지 사이사이에 나 있는 좁은 칸에서 경험한 과정의 기쁨과 어려움, 그 과정을 진심으로 대해본 경험은 세상의 문제를 만날 때에도 힘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어린이에게 부러운 것이 아주 많은데 그중 하나는 어린이들은 감정의 진폭이 넓은데 그 무게는 아주 가볍다. 어린이들은 시험 결과를 잔뜩 기대하고 잔뜩 실망한다. 그리곤 이어진 5교시 체육시간에 언제 그랬냐는 듯 앞 구르기를 하는 파란색 매트 앞에서 진심이다. 티셔츠를 츄리닝 바지에 넣고, 저 뒤에서부터 뛰어와 앞 구르기를 하는 아이, 어떻게 하는 거예요? 하며 고개를 못 숙이는 아이, 옆으로 구르는 아이, 손 짚고 옆돌기를 뽐내는 아이까지 체육관은 이제 푸른 웃음과 활력으로 가득하다.           



  그렇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뛰고, 웃었던 하루가 지났다. 서로의 주말 안부를 바라며 아이들은 집으로 간다. 나의 수영이도 나에게 안부를 건넨다.

  “선생님! 주말 잘 보내세요!”

  “수영이도 좋은 주말 보내!”

우리 어린이들은 감각적으로 아는지 모른다. (사실 어린이들은 꽤 많은 걸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 흐르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을. 껄끄러운 수학 시험이 끝나면 체육 시간이 오고, 쉬는 시간이 오고, 점심시간도 온다는 것을. 가라앉던 마음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내가 파란 매트 위에서 뛰고 구를 때 내 마음도 달라진다는 것을.          



  다만,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답답하고 고루한 선생님께서 알림장 써주신 문구만 빼면 완벽한 주말의 시작이다.

[틀린 문제 고쳐오기. 시험은 공부하는 과정. 월요일 수학 2단원평가 재시험]


  나의 열 한살들은 노력의 시간을, 나는 재출제의 과정을 나눠갖는다. 나의 열 한 살들이 제 노력으로 결과를 바꾸었다는 뿌듯함을 위해 비슷한 유형의 문제의 난이도를 조정하는 건 열 한 살이 들일 노력에 대한 내 응답이다. 눈물의 수영이도, 얼굴이 붉어졌던 민훈이도 제 노력으로 효능감을 꽉 쥐는 경험을 만드는 일이 내 일이다. 열한살들의 과정에 한 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이 참 감사한 이유이다.


  광활하고 빛나는 사월의 주말, 무거운 짐 하나 가진 것도 삶의 과정이니 우리 함께 나누자,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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