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심리 행동주의 인지주의 구성주의
“선생님! 사월 노래 불러야 하지 않아요?”
“아차차! 그러네, 선생님이 또 잊었지 뭐예요.”
메모리가 없는 선생님이지만 기억력이 파릇파릇한 열한 살들 덕에 오늘도 놓쳤던 한 가지를 주워 담는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나는 알고 있네 나는 알고 있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교실은 열한 살의 목소리가 서정의 음계 위를 노닌다. 아침이어서 고음이 마저 나올 준비가 되지 않아 쥐어짜 낸 쇳소리도 다섯 줄의 음계를 명랑하게 넘나 든다.
‘우린 오늘도 희망을 노래하고 있구나.’
모두의 명랑함 속에 마흔의 나만 뭉클하다. 주책이다.
학생과 교사보다 학교를, 배움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배우는 게 중요한 사람들이기에 하루 중에 가장 귀한 시간을 내어 학교에 모인다. 교실은 스스로가 나를 키우는 노력들이 모여 있다. 당연히 나의 열한 살들의 24개 책상과 의자는 그 자리에서 반짝반짝 빛을 낸다. 그 빛을 받아 나도 반짝일 수 있는 곳이 학교이다.
“좋은 월요일 아침이예요. 선생님은 월요일 아침에 여러분 얼굴을 보면 웃음이 나요. 주말의 여운이 아직 묻어있는 얼굴이 이제 학교의 얼굴이 되려는, 참 어색한 순간이 보이거든요.
오늘은 이걸 이야기해볼까요? 아침에 이불을 뒤로하로 일어나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학교에 왔지요. 왜 왔을까요?“
“배우려구요.”
“그쵸, 그러면 여러분은 배워서 어떤 점이 달라졌어요?”
그렇게 월요일 아침, 우리 교실엔 한 명 한 명이 경험한 배움의 꽃이 피어오른다.
“저는 등고선을 몰랐는데, 이젠 등고선을 알게 되었어요.”
“저는 각도를 어려워했는데 공부하니 이젠 각도기로 각도도 잘 재고 각도를 잘 알게 되었어요.”
유리와 주언이는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린이들의 새 지식은 그들이 세상을 보는 해상도를 높여준다. 아는만큼 보이는 것을 나의 어린이들은 매일 깨닫는다.
“저는 행동이 달라졌어요. 이전에는 친구를 밀쳤어도 그냥 가거나 미안해 까지만 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께 배우고는 미안해를 꼭 하고, 그 다음에 친구에게 괜찮아? 많이 아파? 같이 보건실 갈까? 이렇게 말하게 되었어요.”
“저는 예전엔 동생이 때리면 같이 때려서 엄마에게 혼 났는데, 이제 동생에게 때리지 마! 아프고 기분나빠! 하고 분명하게 말해요.”
영서와 서인이가 행동이 달라졌다는 말에 나는 놀랐다. 굳이 행동주의가 무엇이고 어떻게 교육되어야하느냐를 떠나 어린이는 이미 생활 속에서 행동을 수정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원만한 관계를 얻는 건 어린이가 실천하는 배움이 가져온 덤이다.
“저는 표현력이 좋아진 것 같아요. 예전엔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하려고 했는데 이젠 제가 좀 바꿔요.”
“저는 발표하는 게 달라졌어요. 예전엔 생각을 발표하는 게 어려웠는데 지금은 하고 있어요.”
“저는 보고서 쓰는 게 늘었어요. 우리 지역 문화유산을 조사해서 보고서로 쓰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요. 생각보다 우리지역 문화유산이 멋지더라구요.”
“예전엔 교과서 읽는 법을 몰랐는데 이젠 교과서에 밑줄도 긋고 동그라미도 치면서 읽어요.”
승유와 혜윤, 연서는 이젠 제 과제에서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많아진 어린이들은 누구에게나 같은 모양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 같은 세상에 저만의 지도를 그려가고 있다. 기특하기도 하지.
누군가에게 학습은 행동의 변화이다. 반복훈련을 통해 나에게 유리한 행동을 만들어가는 것도 학습이다. 상대의 말에 경청하는 태도, 나의 실수에 미안하다고 말하며 친구의 안위를 묻는 태도, 내 뒤에 오는 친구를 위해 문을 잠시 잡아주는 태도, 화장실 물을 잘 내리고 오는 태도도 학교에서 배운다. 즐거움은 안전에서 오기에 복도와 계단에서 걷는 습관, 수업시간이 되면 쉬는 시간 스위치를 끄고 수업시간 스위치를 켜는 태도, 모둠 토의를 할 때 말하는 친구를 바라보고 친구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태도도 학교에서 배운다. 배운 열한 살은 행동이 달라진다.
우리 교실엔 하나의 행동규칙이 있다. 놀다가 중간에 놀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으면 무조건 껴주기. 수줍은 친구, 수업 과제가 늦은 친구, 화장실에 다녀와야 했던 친구도 놀고 싶다. 미리 놀고 있는 친구에게 같이 놀자는 말을 하는 건 누군가에게 까치발을 들고도 손가락 끝까지 쭈욱 펴서 겨우 초인종을 누를 만큼 높은 일이지만, 놀고 있던 친구는 내 손 높이의 문을 돌려주면 되는 일이기도 하다. 내 어릴 적에 고무줄놀이를 할 때 수가 맞지 않으면 한 사람은 깍두기가 되었다. 깍두기는 양 팀 모두에서 뛸 수 있어서 하고 싶어 했다. 모든 일엔 방법이 있다고 믿을 때, 서로의 마음의 허들이 낮아진다. 너그러움은 늘 다정한 방법을 만든다.
또 누군가에게 학습은 인지구조의 변화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머릿속의 노트정리가 변해야 공부한 것이다. 오늘 음악시간에 악보를 보고 바장조를 배웠으면 플랫이 반음을 내린다는 것을 머릿속 노트정리에 추가할 수 있다. 플랫의 으뜸음은 ‘파’ 음이라는 것을 더 추가하고, 이미 알고 있는 다장조의 음계에 바장조의 음계를 추가한다. 조성에 대한 머릿속 노트정리가 변했다는 것은 학습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존에 내가 가진 노트정리를 수정하고 변형하고 추가하며 세상을 이해하는 해상도를 높여간다. 배움을 통해.
사회시간엔 중요한 내용을 교과서에 밑줄을 긋고 노트 정리를 한다. 과학시간에도 실험기구의 명칭과 원리를 교과서에서 확인하고 정리한다. 생각의 질은 정교함에서 마무리된다고 믿는다. 요리사의 멋진 생각도 정교한 칼질이 있어야 완성된다. 정확한 이론을 알고 이를 자유자재로 숙달할 때 창의성이 실제가 된다고 믿는다.
누군가에게 학습은 내 필터로 배움을 걸러내 내 목소리와 내 생각으로 무언가를 생산해 내는 일이다. 내 생각이 없이 배운 걸 외우면서 안도하는 일은 마치 블루투스 스피커가 음원을 재생하며 내가 이 음악을 만들어 연주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과 같다. 오늘 우리가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관해 배웠다면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세상에 객관적 지식이란 없다. 세상은 그렇게 당연하지도 납작하지도 않다. 내가 내 필터로 걸러보았을 때, 내가 내 경험과 생각으로 정의해 보아야 진짜 내 앎이다.
미술시간엔 큐비즘을 감상하고 나만의 인물화를 그려본다.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숫자에 따라 눈, 코, 이의 방향이 달라진다. 왼쪽 눈은 아래에서 본 방향이고 오른쪽 눈은 정면에서 본 방향이 당첨되는 식이다. 배웠으면 내 필터에 큐비즘을 걸러보며 내 손이 그린 형태와 내가 선택한 색감으로 나만의 큐비즘을 만들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때야 큐비즘이 내 경험이 된다.
행동변화, 인지구조의 변화, 내 필터로 내린 지식을 내가 편집하는 일 모두 학습이다. 이 가치로운 일을 우리는 매일 우리의 교실에서 함께 한다. 우리의 하루가 매일 보람찬 이유는 그래서 수억 가지이다.
그렇게 학교엔 우리는 매일 나는 가치있는 배움을 하고 있는, 가치있는 사람임을 깨닿는 하루가 있다. 하루는 같지만 그 색은 24개씩, 나까지 더해서 25개의 다른 빛으로 잔잔히 빛난다.
“오늘도 일주일이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하루마다, 매 시간마다 스스로 가진 싹을 잘 키워오고 있었네요. 오늘도 좋은 날이예요. 오늘도 우리는 배우고 변화할 거니까요. 오늘 2024년 4월 22일 오전 8시 40분에 교실문을 들어선 순간의 여러분은 오후 1시가 넘어 교실을 나갈 때 또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거예요. 우리는 배우고 변하니까요.
매일 수업시간에 선생님과 친구의 말에 경청하며 자신의 생각과 키재기를 했던 눈빛을 선생님은 매 시간 봤어요.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힘껏 웃고 놀이하고 떠들며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는 것도 보았어요. 새로운 배움에 여러분의 머릿속 지식들을 채워 넣거나 가지치기를 해가는 모습도 보았죠.
스스로에게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 주세요. 다른 사람이 칭찬해 주기 전에 내가 먼저 해주세요. 내 노력은 내가 가장 잘 아니까.
우리 친구들은 또 얼마나 배우고 싶겠어요! 오늘도 5교시나 준비되어있으니 걱정말아요! 또 배우고 우리를 키웁시다. “
나의 배움 예찬에 이제는 면역이 생긴 열한 살들이다. 학년초엔 “선생님이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하며 어이없어하던 눈빛들이 이젠 수궁의 눈빛으로 순해졌다.
내 과장과 유난스러움의 바람은 하나다. 열한 살들이 지금 자신의 일인 배움을 무엇보다 가치롭게 여기기를. 우리가 보내는 모든 순간이 나를 키우는 순간임을 알기를. 내 가치를 내 하루에서 모아가기를. 충분히 우리의 배움은 가치롭다는 것을, 그래서 나와 내 하루가 의미를 이룬다는 것을 알고 하루를 살기를. 그렇게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고 나의 하루를 사랑하기를. 별은 제 빛 그대가 아닌 보는 사람의 눈에 작은 반짝임만 남기듯 배움에 대한 나의 과장과 유난스러움도 그랬으면 좋겠다.
”선생님, 제 작품이 벌써 마음에 들어요. 이미 사랑에 빠졌어요.“
큐비즘 인물화를 그리던 윤서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선생님! 앞 구르기가 되었어요!”
도무지 고개를 양 팔 안으로 넣지 못하던 선우가 저 멀리서 소리친다.
“___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발표하기 부끄러워하던 주한이가 발표를 하고 발개진 볼과 살짝 가뿐 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는다. 열 한살들의 작은 움직임에 뿌듯함이 스며든다.
오늘도 학교는 작은 소란들이 가득하다. 나는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뿌듯함의 소란은 명랑하기도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고, 때론 아무일도 없는 듯 느껴지는 일상이다.
어쩌면 공부가 지루한 일이라는 것, 내 일이 힘들다는 것, 학교와 회사에 가기 싫다는 것도 학습된 게 아닐까. 좋아하는 친구에게 되려 짖궂게 대하고 좋다고 말하면 낯간지러워 손사레 치기도 하고, 볼멘소리에 공감해주다가 싫다는 생각에 오염된 것은 아닐까.
공기중에 산소가 있어도 보이지 않듯 학생에겐 배우는 게 일상이어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싫은 부분만 돋보기를 놓고 확대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오늘도 공기중에 당연히 있는 배움의 기쁨을 과장해서 손에 쥐어주는 게 내 일이다.
나의 어린이들이 이미 알고 있듯, 우리는 배움으로 내 교실과 학교, 내 책상에서 느낀 뿌듯함을 이미 감각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 당연한 좋음에도 이젠 조명을 비춰준다. 그렇게 좋은 쪽으로 나를 데려간다.
배우고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니
나는 그 노래를 믿고 오늘도 낙관주의자가 되어본다. 덕분에 나는 오늘도 나의 하루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