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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Apr 06. 2024

에필로그_낙관은 여전히 학교에 있다

  요즘 저는 매 순간 스스로를 의심하느라 바쁩니다. 나이가 들며 실종된 주의력 탓에 물건은 당연하거니와 생각도 빠트리는게 일상인 나를 내가 도무지 믿어주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도 그랬습니다. 뭔가 허전한 그 느낌은 틀린 적이 없습니다. 오후 강의를 위해 차에 타서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  오늘 강의 주제인 창의성에 대한 추가 인쇄물이 여전히 프린터 위에 그대로 놓여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나에 대한 익숙한 분노와 실망, 허무가 차 안을 가득 채우는 순간입니다. 그래도 차 문이 열리고 휴대폰이 차의 블루투스와 매끄럽게 연결되는 것을 보고는 차 키와 휴대폰을 한 번에 챙겨 나온 덕에 차 문이 제때 열린 게 얼마나 다행인가 자조하는 것 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마른걸레 짜듯 어떻게든 기억을 쥐어짜내어 정리했던 내용을 머릿속으로 복기하는 것도 포함해서요.


       

  메모리가 없나 싶은 나에게도 다행스러운 것이 하나 있다면 제가 가진 주관적 기억 편집 능력입니다. 부정적 정서는 그 순간 처절하게 겪는 대신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곳에 저장해두지 않는 편입니다. 다만 숨 가쁘게 온 마음으로 좋았던 순간은 최대한 내 쪽으로 가까이 두는 편입니다. 그 덕에 행복으로 각인된 순간이 몇 가지쯤은 자주 만지작 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일상의 구태의연함에서 나를 지켜주는 그 순간에 대한 기억들. 납작한 내 삶에도 몇 번쯤은 혼자서 몰래 행복을 꽉 쥐어본 순간들이 내게도 있었거든요. 그때의 시간, 공기, 내 마음이 여전히 선명한 그 순간들을 제 호주머니 속에 굴려가며 당이 떨어질 때 하나씩 까 먹곤 합니다.   



  제 행복을 처음으로 선명하게 감각했던 곳은 학교였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저는 11반이어서 6층 꼭대기에 교실이 있었습니다. 여고생에게 6층은 매번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등교를 위해 오르는 아침의 계단은 혹독함만으로 가득합니다. 계단 앞에 닿기까지 집에서부터 30분을 쉬지 않고 걸어왔는데, 신에겐 아직도 6층 계단이 있다니요. 계단마다 팽팽해지는 허벅지 근육의 긴장을 느끼며 ‘나 죽겠다. 이러다 안 그래도 굵은 내 다리 더 굵어지겠네.’ 곡소리를 하며 바닥만 주구장창 보고 꾸역꾸역 올라갈 수 밖에요. 쉬는 시간의 계단은 고속 무빙워크 매직이 열립니다. 매점을 향해 돌진하는 여고생은 계단에서 걷는 법을 모르죠. 1층 매점까지 컵라면을 하나 먹고 다시 올라오는데 허락된 시간은 단 10분. 라면은 따듯해지면 먹는 게 맞잖아요. 아직 수분을 가득 담지 못한 바삭한 면은 올라오며 소화를 시키면 그만이니까요. 오독오독 씹어먹는 반 생라면 수혈을 받고 다시 6층을 날아오릅니다. 그 어려운 일을 매번 해내고야 마는 게 K-여고생이죠.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저녁시간의 계단은 너그러운 속도를 내어줍니다. 그날도 전력질주하기 가장 좋은 광활한 복도를 뛰어 급식소에서 급식을 해치우고 아이스크림 한 입을 물며 교실로 올라오는 길이었습니다. 친구들은 먼저 들어가고 저는 천천히 혼자 계단을 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문득 두 발이 6층 교실 앞 난간에 멈췄습니다. 오늘처럼 가을이 담긴 노을이 느리게 머물러 있던 초저녁. 대학생이 되고는 싶었지만 나이가 들면 내 말랑말랑하고 촉촉한 소녀의 감수성이 건조해질까 봐 노심초사했던 열일곱의 허세가 발걸음을 멈추었던거죠. 감성의 계절 가을이라면 일상과 거리를 두며 고독을 찍어봐야 하지 않나. 삶에 대한 회의, 김동률 님의 노래에서 들었던 이별의 무드, 이제는 이문세 님의 광화문 연가도 들어봐야 세상을 좀 아는 거지. 하며 감수성 예찬론자로서 이 순간 세상의 고독은 다 짊어져보리라 다짐했습니다.      


   

  별안간 마음먹지 않은 이상한 기분이 내 온 마음을 감쌌습니다. 어머나, 서서히 내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이 먹차오르는 마음은 장갑 낀 손으로 어설프게 만져보려 했던 허세의 마음, 느껴지기 전에 마음부터 먹었던 어른의 고독이 아니었습니다.



  ‘아, 어쩌면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구나. 나는 학생이고, 학교에 있다. 몇 걸음만 떼면 내 교실에 내 자리가 있고 내 옆엔 실없는 농담만 주고받는 내 친구들이 있다. 아, 나 지금 행복하구나!’    


      

  그 이후에 교실에 들어왔을 때의 장면은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순간 감각했던 가을 초저녁 노란빛의 은은한 공기, 교복 블라우스를 스쳐 내 팔에 남긴 살랑이던 가을 저녁의 맑은 마른바람, 열일곱의 정서에 불어 들어와 온 마음을 채웠던 그 공기만은 영원히 가지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그 저녁부터 행복한 학생이 되었습니다. 배우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 좋아서 시험만 아니면 공부를 계속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가끔 틀려도 괜찮은 학생의 특권에 안심도 되었습니다. 학교는 너그러운 곳이어서 1교시가 끝나면 2교시가 있고 오늘 수학 시간에 틀렸어도 내일 수학 시간이라는 기회가 있었으니까요.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는 이어폰을 끼고 김동률 님의 노래를 들으며 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하곤 했는데, 그 순간에는 30명이 함께이면서도 개별적인 외딴섬이 되어 교과서에 쓰인 글씨를 내 글씨로 옮겨 적는 은은한 고독의 시간도 편안했습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가 내게 꽂히는 시선에 얼굴 빨개지던 순간은 웃겼죠. 쉬는 시간 종이 치면 와르르 모여 말도 안되는 농담을 주고받는 소녀들과 하루종일 함께여서 좋았습니다. 힘든 게 투성이고 웃긴 게 투성이던 오늘들이 썩 마음에 들었던 소녀시절을 학교에서 보냈습니다. 



  대학을 가서 매일의 최대 고민은 하나였습니다.

  ‘오늘 점심 뭐 먹지?’

제가 다닌 대학 주변은 식당이 적어서 메뉴가 많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기껏해야 김치볶음밥, 오징어볶음, 중국집, 어쩌다 학생식당이 다였죠. 주로 선택을 잘해주던 친구가 없는 날엔 그 친구에게 전화하기도 했습니다.

  “어디야? 큰일 났어 우리. 뭐 먹을지 모르겠어. 우리 오늘 뭐 먹을지 좀 정해줘.”

까르르 까르르 한 바탕 웃으며 봄이 내린 아담한 교정을 친구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명랑한 걸음마다 연둣빛 봄이 묻고, 분홍빛 봄이 양 볼을 간질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맑고 투명한 봄의 푸른 햇살 샤워를 하며 걷는 순간 나는 또 찌릿했습니다.

  ‘어쩌면 지금이 내 인생의 화양연화일 수 있겠다. 나 지금 행복한 순간을 살고 있구나. 나중의 나는 오늘의 나를 힘껏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제가 구체적으로 행복했던 공간은 공교롭게도 늘 학교였습니다. 학생일 수 있던 덕분에 저는 학교에서 배웠고, 놀았고, 나를 발견했습니다. 때론 나에게 실망했고, 친구에게 서운했고, 싸우기도 했고, 친구를 위로하기도 하는 사소한 일상도 함께였습니다. 소녀의 감성을 담은 쪽지를 주고받았고, 처음 마셔보는 교내 자판기 커피 앞에서 친구들과 종이컵을 맞대고 여고시절의 답답함을 서로 토로하면서 짐짓 드라마 속 어른이 된 듯 허세를 부리기도 했죠. 어떤 시험은 선명한 숫자를 기억할 정도로 잘 봤고, 어떤 시험은 잊을 수 없을 만큼 망치기도 했습니다. 등수와 점수라는 숫자에 압도당해 뾰족해지기도 했었지만 다음날이면 아무렇지 않게 습관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의 무던함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학교에서 컸습니다.           



  학교에서 행복했고 학교에서 컸던 저는 여전히 학교에 남아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을 숨겨왔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죠. 저는 교사라는 옷이 제 몸에 맞지 않는다 여겼습니다. 교사가 너무나 하고 싶어서 하게된 것이 아니었거든요. 고3 담임선생님의 책상 앞에서 10분만에 원서를 써서 결정된 진로였다는 생각은 오랜시간동안 마땅치않았습니다. 진짜로 내가 원하는게 뭔지를 알고 역경에도 불구하고 쟁취해야하는 게 멋진 삶인데, 저는 그냥 떨어진 감을 주워먹은 낙하산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내 삶이 자주 비겁하고 초라하게 느껴지기를 수십년이었습니다. 교사라는 직업을 누가 알까 봐 꽁꽁 싸서 감춰두기가 일상이었고, 일은 생계라며 가르치고 배우며 누렸던 소중한 기쁨의 순간을 애써 외면해왔습니다.           



  발령받으면 일 하는거지. 하는 생각으로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제가 보입니다. 여전히 학교에서 행복한 제가 말이죠. 가르치며 뿌듯해하고, 어린이와 대화하며 재미있어하는 저를 자주 만납니다. 더 잘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가서 더 배우는 게 좋은 저도 만났습니다.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 배우는 일, 대학 강단에서 청년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 위해 배우는 일을 하며 저는 또 배웁니다. 새로워집니다. 낯선 시선을 가지게 됩니다. 이 삶이 마음에 썩 듭니다. 


        

  수업이 시작되면 어린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봅니다. 대학생들은 새로운 이론과 자신의 삶을 견주어가며 미간과 눈에 힘을 줍니다. 그들은 절대 못 볼 자신들의 신선한 눈빛과 진지함을 저는 가르치는 덕분에 볼 수 있습니다. 지성의 전구가 반짝이는 눈과 생각이 담긴 표정을 본다는 건 강의하는 사람이 가진 특권이겠지 싶습니다. 저는 그 표정들에 매번 반합니다. 그 표정을 스스로 본다면 그들은 스스로에게 반할 게 분명합니다. 내가 이 순간을 누리며 그들에게 반하듯. 학교의 행복은 다른 모양으로 내게 자주 다가옵니다.         



  학교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밖에서 보면 희극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고 하지만 학교는 반대입니다. 밖에서 보면 불안 가까이 보면 희망이 학교입니다. 간혹 학교 밖에 있는 사람들은 과거의 개인적 경험으로 학교를 판단하는 모습을 봅니다. 신문 기사 속 무서운 학교 소식에 불안한 시선으로 학교를 곁눈질하곤 하죠. 물론 기사는 사실이고 과거의 개인적 경험에 의한 불신도 개인적 서사가 분명할 것 입니다.           



  하지만 학교는 늘 현재진행형으로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학교는 늘 과정의 무빙워크 위에 움직이고 있는데 과거의 경험으로 오늘의 학교를 오해하는 건 시점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 대한 슬픈 사건도 사실이나 주목 받는 사건은 일상의 삶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으니 이슈가 되는 것일테니까요. 신문에서 사건을 다루는 목적은 그 시의성으로 인해 우리의 학교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함이라 믿는습니다. 우리는 병을 고치고 싶어서 의사의 진단을 받는 것이지, 진단만을 위해 병원을 가지는 않듯이 말입니다.      



  언제나 그랬듯 여전히 학교는 배움과 생각들로 반짝반짝 빛나는 곳이 분명합니다. 애매한 수사가 아닙니다. 수업이 이루어지는 교실엔 구체적으로 반짝이는 눈빛들이 전구를 켠 듯 여기저기서 밝게 울려 퍼지거든요. 어린이도 그렇고 청년도 그렇습니다. 선생과 학생은 각자의 생각을 언어로 주고받으며 서로의 생각을 넘나 듭니다. 교실과 강의실에 들어서면 우리 사이에 생각들이 잔잔히 흐르고 움직입니다. 매일의 하늘이 같은 적이 없듯 매시간 우리의 생각은 새것이어서 매번 신선하게 반짝이는 호수를 이루어냅니다. 무한히 흐르는 생각들을 만나는 일은 학교의 기쁨입니다. 어린이의 끄덕이는 눈빛에서 저는 희망을 봅니다. 청년의 아하! 하며 반짝이는 통찰의 눈빛에서 배움을 통해 세상에 대한 해상도를 높여가는 날것의 표정을 봅니다. 



  덕분에 학교에서 우리는 매 시간 새로운 사람이 된다. 수업에서 생각을 나누고 키워낸 우리는 배움 덕분에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폴더를 생성하거나 기존의 지식이 정교화시킵니다. 그렇게 학교의 문을 닫고 나갈 때 우리는 학교를 들어왔던 과거의 나와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된다.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자라고 있는 자신을 격려하는 하루와 매 시간이 있는 곳. 배움과 공부는 늘 학교를 가득 채우며 뿌듯함을 건네줍니다. 학교는 그런 곳이다.           



  어쩔 수 없이 고백합니다. 아마도 저는 학교를 사랑하는 게 분명합니다. 좋아하면 더 알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겠지요. 학교를 더 관찰하고 감각하고 경험합니다. 매번 새로워지는 학교의 배움덕분에 저는 낯선 눈을 가지게 된 것은 덤입니다. 덕분에 여덟살 이후로 30년 넘게 몸담은 학교를 매일 낯선 눈으로 관찰하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만난 학교에는 낙관의 순간이 구석구석에서 빛을 냅니다. 어쩔 수 없이 그 반짝이는 순간들을 모아 보기로 합니다. 더 이상 학교에 여전히 남아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자랑스럽게 낙관의 순간을 수집하려고 합니다. 도무지 손에 꽉 쥐어질 수 밖에 없는 하나를 굳게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낙관은 여전히 학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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