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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Jan 01. 2023

풍선같은 여덟살의 지독한 연산세상

규칙의 세계로의 입문

  언제나 나는 내 마음의 모든 긍정들을 모으고, 행여 무너질세라 긍정들을 손으로 탄탄히 다져놓고 시작한다.

  "주윤아! 연산하자!"

  물론 시작 전에 몇 분 후에 연산공부를 하자고 미리 예고를 해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지루한 연산의 세계에 들어오기 전, 나의 주윤이에게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왜냐! 하기 싫으니까. 너어무 하기 싫으니까. 정말 하기 싫으니까.


  한글엔 ㄱ, ㄴ, ㄷ이 있고, 영어엔 A, B, C가 있듯이 숫자와 +, -, x, % 기호, 그리고 그들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연산은 수학의 입문이다. 처음엔 하나 둘 셋만 세어도 칭찬을 듣게 된 아이는 숫자를 알아가는 데에 흥미가 있었는데, 연산을 시작하며 숫자와 멀어지고 싶어 진다. 특히나 숫자와 +, -들의 조합 열댓 개가 나열된 연산 문제집의 페이지들은 규율과 규칙과 질서만이 가득한 세계이다. 문제들은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질서 정연하게 서있는데 더 무서운 것은 정답은 단호하게도 단 하나이다.



 오, 맙소사. 내 마음대로 하면 안 되고, 정답은 단 하나이고, 심지어 빨리 하라는 거지? 주윤이에게 연산의 지루함은 그 깊이가 지구의 핵을 뚫을 만큼 충분하고 하기 싫음은 끝없는 우주를 채울 만큼 넉넉하다. 이 세계를 눈에 담을수록 둔 주윤이의 마음은 지구의 핵이 끓고 있는 온도만큼 뜨거워진다. 하기 싫음의 연기로 온 마음이 채워져 간다.



  한 문제를 풀기 전마다 주윤이는 딴짓의 세계에 빠진다. 일단 코를 한 번 만지고 눈을 비빈 후, 왼 손으로 문제집 모서리를 접었다 펴고, 오른손으로 지우개를 세웠다가 눕힌다. 그리곤 정면을 한번 응시하고 어쩔 수 없이 눈앞의 문제를 한번 쳐다보지만 여전히 하기 싫다. 아니, 딴짓이 침투할수록 주윤이의 마음은 연산과 더 멀어져 간다..  



  그런 주윤이를 보면, 처음엔 안쓰러운 마음에 한껏 오버스럽세 격려를 해준다.

  “우와! 우와! 어제보다 더 빨라진거 느꼈지?”

  “역시!”

  “우리 한 줄 풀고 간식먹자!”

한결 호들갑을 떨면, 주윤이는 나를 보고 두 팔을 뻗는다. 나와 주윤이는 포옹과 함께 힘듦을 나눈다.



  하지만, 이 과정이 계속되며 내 마음엔 화의 불길이 피어오른다. 반복되는 주윤이의 딴짓은 문제와 문제 사이 뿐만 아니라, 일의 자리 계산을 한 후 십의 자리 계산으로 가는 사이에도 쏘옥 자리잡는다.

  ‘아니, 7-2 이게 이렇게 시간이 걸린다고?’

 나의 마음은 이미 증기로 가득찼고 더이상 수용 불가능하다. 내 마음은 이미 폭발행 급행열차를 탔고, 언제라도 저 우주까지 너끈히 발사가능한 로켓이다. 이만하면 나도 그만 더하고 그만 빼고 싶다.



  여덟 살 주윤이는 풍선 같은 아이다. 빨강, 노랑, 초록빛깔 동그란 모양 안에 명랑하게 채워진 가벼운 공기는 주윤이 그대로이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저도 살랑살랑 떠다니고, 손만 살짝 대어도 어디론가 둥둥 떠다닌다. 풍선은 그래도 된다. 풍선이 나타나면 공간이 바뀐다. 우리가 단단히 구축해놓은 규칙과 질서의 세계에 비선형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풍선의 자유롭고 비선형적인 움직임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의 공간은 천진한 아이의 세계로 피어오른다. 풍선의 움직임이 가져온 목적과 방향과 규칙과 예측이 무너진 세계에 들어서면 우리는 모두 아이의 웃음을 갖는다. 풍선의 모든 딴짓은 다 괜찮아진다.



  주윤이의 세계도 그렇다. 아침을 먹고 이 닦으러 가기 전에 큐브 잠깐 만지다가 "이 닦아야지!" 하는 엄마의 말에 흠칫 이를 닦으러 가고, 신발을 신으러 가는 길에 놓지 못하는 마법천자문 때문에 "신발 신어야지!" 하는 불호령에 놀라곤 한다. 내복 티셔츠는 100%의 확률로 앞뒤를 바꿔 입고, 큐브 종류별 세계기록을 신나게 말하느라 밥 먹는 것은 이미 잊은 지 오래다.



  우리가 사는 규칙과 질서의 세계는 순서가 있고 정돈된 행동으로 효율을 이루어가는 곳이다. 하지만 여덟 살 주윤이는 이 선형적 세계에 1학년 신입생이다. 1학년이 제 교실도 못 찾듯 도무지 우리의 선을 못 찾는듯하다. 찾았다고 하더라도 정신 똑떽이! 차리고 똑바로 걸어야 하는데, 계속 발이 선 밖으로 나간다. 발뿐 아니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눈 때문에 멈춰 서느라 속도도 느리다.



  이 선형적 세계에 너무나 익숙한 나는 방향이 안 맞고, 속도가 느린 주윤이를 보면 이해가 안 된다. "28+9" 이게 뭐가 어렵다고 시작을 안 하고 있는 걸까? 왜 이 간단하고 쉬운 문제를 앞에 두고 딴짓으로 5분을 쓰는 거지?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더 영특한 행동은 하면서 고작 선에 맞추는 간단한 일을 못하는 것은 답답함에 더해 불안이 된다. 규칙의 세계 자체를 힘들어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연산은 수학의 세계에 더해서 규칙의 세계로 입문하는 것은 아닐까. 자유롭게 동동 떠다녀도 되던 아이는 이젠 규칙을 지켜야만 한다. 이것은 우리의 약속이니까. 무엇이든 괜찮은 놀이의 세계에 살던 아이는 이젠 정답의 세계로 들어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합의가 되니까.



  세상의 틀에 깎이고 꼭 맞게 다듬어진 엄마는 가끔은 내 아이는 지금처럼 살았으면 싶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지켜온 약속과 합의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안전한 틀이 되어 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나도 스케치북에 쉽게 그릴 수 있게 단순히 생긴 롤러코스터에도 치열하고 엄정한 섬세함이 숨어있듯이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정리 안에는 복잡하고 정교한 세계가 숨어있다. 우리는 덮어놓고 아는 척하기보다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초등 덧셈뺄셈 연산에서 시작해서 이렇게까지 할 일이냐 싶지만, 연산은 다음 수학문제를 위한 도구 그 이상의 것이다. 규칙과 질서의 세계로의 입문을 통해 도구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엄정한 과정을 거쳐 단순한 세상을 만들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해상도를 높여주는 배움의 시작이 연산이 아닐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일렬로 세워진 문제들을 빠르게 해결하는 속도와 정확도에만 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십의 자리끼리 더한 후 일의 자리를 더해서 두 수를 더한다던지, 10의 보수를 먼저 만들어보고 남은 수를 더한다던지, 앞의 두 자릿수에 뒤의 십의 자리 따로 일의 자리 따로 더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던지 될 수 있으면 정답으로 가는 다양한 경로를 경험해보면 좋겠다. 그리고 나에게, 이 문제 해결에 가장 적합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힘도 함께 길렀으면 좋겠다.



  수학이 많은 정리 중 가장 최적의 정리를 선택하는 것이듯 결국 우리의 삶은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닌 선택의 과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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