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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Jul 20. 2023

진짜 마음을 읽어주는 건, 대신 전화해 주는 게 아니다

  "주윤아! 수영 가자!"

오늘 아침 따라 주윤이의 눈꺼풀은 더 무겁기만 하다. 조금이라도 떠보려고 하면 눈꺼풀에 모래가 들어간 듯 한결 까끌해 보인다. 나름의 불금을 보내느라 평소보다 1시간을 늦게 잔 주윤이다. 아홉 살에게도 삶은 얄짤 없다. 내일에 대한 긴장과 걱정 없는 금요일 밤의 편안한 나른함을 알기에 그냥 두었더니 삶은 여지없이 그 피로를 토요일 아침에 남겨둔 것을 보면.


  

  "엄마, 수영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겨우 눈꺼풀을 밀어올리며 일어나 옷을 입는 주윤이의 목소리는 까끌거렸을 눈꺼풀보다 더 까끌하다. 수영가방을 목에 맨 채 바나나를 먹으며 주윤이의 하소연이 시작된다. 얼마 전부터 늘 수영이 어렵고, 힘들다는 말을 들어왔기에 나는 으레껏 오늘도 그러려니 한다.

  "엄마, 수영을 제가 제일 못한단 말이에요. 배영이 너무 어려워요. 선생님에게 갈 때마다 혼나요. 못한다고.   선생님이 이렇게 하면 모자 떨어트린다고 했어요. 지금 노란 모자인데 하늘색 모자로 떨어지면 어떻게 해      요?  차라리 안 가면 모자가 안 떨어질 텐데."



  결국 주윤이는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간 수영에 대한 어려움과 부담은 어제의 피로와 만나 삽시간에 눈덩이처럼 커져 주윤이의 온 마음을 잠식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주윤아, 그렇게 어려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다시 한번 알려달라고 선생님께 말해봐. 이건 이렇게 해야 해요? 저는 어떻게 하고 있어요? 하고. 선생님들은 열심히 하는 친구들은 도와주시잖아."




  "엄마, 아니에요. 혼난단말이예요. 엄마가 한번 내가 어떻게 하는지 한 번 봐야 해요. 엄마는 모르면서."

  "알았어, 알았어. 일단 오늘은 엄마가 세수도 안 하고 머리도 안 감아서 당장은 못 가. 월요일에 수영할 때 그때 가서 볼게. 알았지? 일단 오늘은 다녀와!"

  그 말에 주윤이는 겨우 무거운 현관문을 밀고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내겐 주윤이의 한 마디가 남았다.

  '엄마가 와서 봐야 해요.'



  주윤이가 하교한 월요일 오후, 우리 둘은 함께 손을 잡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주윤이와 동네를 걸으니 속없는 엄마는 일단 기분이 좋았다. 가볍게 수영장으로 들어가는 주윤이를 보니 별일 아니었네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윤이반은 4명의 어린이가 한 반이었다. 적은 숫자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어라! 그런데 함께 수업을 받는 형아들, 그러니까 너무 형아들이었다. 최소한 5학년은 되어 보이는 형아들은 체격도 좋고 수영실력도 월등했다. 주윤이는 이제 배영을 끝내고 평영을 배우는 단계여서 노란 모자를 쓰고 있는데, 형아 2명은 모든 영법에 능한 단계인 블랙 수모를, 한 명은 접영을 마친 레드 수모를 쓰고 있었다. 그 건장한 형아들 틈에 나무젓가락 같은 팔과 갈비뼈가 앙상한 아홉 살 주윤이가 노란 모자를 쓰고 파닥파닥 움직이며 형아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아이 귀여워. 노랑모자!'

  주윤이도 밖에서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싱긋 웃으며 손짓을 한다. 노랑 모자에 흰 수영복을 입은 주윤이가 나는 유난히 더 반가워 함께 손을 흔든다. 그렇게 30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주윤이는 발차기-자유형-배영을 바꿔가며 형아들을 따라 쉼 없이 수영장 레일을 돌고 돌았다.



  와락, 작년 여름의 내가 생각났다. 수영 클래스에서 언제나 뒤에 서던 내가 어느 날 잘하는 분 뒤에 섰던 그날. 그분을 따라가느라 내 심장은 얼굴까지 튀어나와 뛰었고, 다리는 이미 뼈를 잃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던 그날이. 내 차례가 오는 게 너무 부담스러워 내 차례 전에 살짝 쉬었다가 선생님의 출발! 손짓에 어금니 꽉 깨물었던 그 여름의 그날이 내 면전에 훅 들어왔다.



  주윤이가 짠하다. 얼마나 힘들까. 잘하는 형아들 따라가느라 체력적으로 힘들었을 주윤이가 이해가 된다. 그동안 나는 힘들다는 주윤이 말에 역시나 주윤이가 운동신경은 없구나. 하는 생각만 해왔다. 그래도 운동은 해야지 하는 생각에 밀어붙였는데, 주윤이의 벌떡 일 심장과 후들거릴 다리가 내 심장이고 내 다리인 것만 같다.



  더욱이 어린이 수영장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연령이 좀 더 어리고 남녀가 섞여있어서 그런지 다른 레인의 클래스들은 유독 하하 호호 웃음이 보인다. 하지만 주윤이가 속한 남자들의 레인에는 웃음기는 없다. 전진만이 있을 뿐. 30분을 그렇게 돌고 나서 잠시 수영장을 한 바퀴 걷고, 선생님께서 물총으로 잠깐 놀아주신다. 그러다 바로 이제 평영연습에 돌입. 이미 주윤이 다리는 제 역할을 다 한 것만 같은데. 평영 배울 다리는 없는 것 같은데.



  모든 문제에는 방법이 있다. 수영장을 보고 있는 내 뒤편 데스크에는 지금 원장님이 앉아 계신다. 주윤이도 힘들다고 하고 내가 봐도 짠한 지금, 가장 간편한 방법은 원장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주윤이가 형아들 사이에서 힘들어하니 비슷한 학생들 있는 반으로 옮겨주실 수 있으실까요?'  또는

  '선생님께 수업하실 때 쉬는 시간은 조금 더 주시라고 부탁드려도 될까요?'



  마음속에서 몇 번을 망설인다. 뒤를 돌아 정중히 부탁을 드릴까? 아니, 좀 더 지켜볼까. 그래도 타이트한 반에서 배우니 잘 배울 것 같은데. 그리고 선생님께서도 열심히 지도해 주시는 게 보인다. 운동은 집중적으로 배우는 게 좋다고 여기는 나이기에 고민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한 가지 생각 때문에 결국 뒤돌아보지 못했다.



  '주윤이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다.'


 

  엄마인 나는 주윤이를 짠하게 여기는 마음에, 덜 힘들었으면 하는 마음에 가볍게 전화기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전화를 한 이후 상황이 변화했다면 나는 내 말로 상황을 통제했다는 것에 갑의 힘을 느끼며 흐뭇해할지 모른다. 아이를 위해서 잘 되었고, 나의 말도 통했다는 그 가벼운 승리감.



  하지만 결국 그 클래스에서 수업을 받고, 그 수영장을 다닐 아이는 주윤이다. 선생님의 지도 의도를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내 요구를 먼저 했을 때 내 요구를 들어야 할 선생님과 얼굴을 맞대고 수업을 해야 하는 사람은 주윤이다. 엄마가 가벼운 승리감을 느낄 때 뒷감당은 주윤이가 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주윤이가 선택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나는 겨우 내 오만을 접었다.



  수업을 마치고 주윤이가 나왔다. 유치원 하원 때 나를 보며 반갑게 웃어주던 주윤이처럼 아홉 살 주윤이는 또다시 환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온다. 나는 오늘도 주윤이를 꽉 안아준다. 한 시간 만에 만나는 주윤. 한 시간 동안 심장을 최대치로 썼을 그 시간을 알기에 더 꽉 안아주었다.



  "오늘 수영 어땠어?"

  "오늘은 괜찮았어요!"

  "아 그래? 다행이다. 엄마가 보니까 우리 주윤이 힘들겠더라. 형아들이 진짜 객관적으로 잘하는 레벨이더라고. 주윤이가 제일 레벨이 낮고. 이건 주윤아 2학년과 5학년의 차이인 데다 먼저 배운 형들이라 주윤이가 형아들에 비해 못하는 게 당연하던데. 그 형아들 최소 5학년으로 보이더라."

  "진짜요? 그래서 형아들은 잘하나?"

  "주윤아, 주윤이가 오해하고 있는 게 있어. 엄마가 오늘 와서 직접 보니까 주윤이가 수영을 못한다고 느끼는 건 주윤이의 운동신경과 수영실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더라고. 체격과 체급의 차이였어. 알지? 운동경기는 체급이라는 게 있잖아. 그게 공정한 거잖아. 주윤이는 체격도 학년도 레벨도 형아들과 다른 거지 못하는 건 절대 아니던데. 30분 동안 쉬지 않고 그 형아들 뒤에 따라가는 데 뒤처지지 않더라고. 엄마가 보니까."

  "정말요?"

  "그럼! 엄마가 주윤이 말 듣고 직접 보러 오길 잘한 거 같아. 다음에도 초대해 줘."



  격려가 절로 잔뜩 터져 나오는 내 말을 듣고, 주윤이의 동그랗고 큰 눈에 방울방울 눈물이 차오르고, 코 끝은 붉게 물든다.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 어쩌면 주윤이는 반을 바꾸는 것보다, 쉬는 시간을 더 갖는 것보다 그게 더 필요했을지 모른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 그리고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그 다행.



  엄마인 나는 언제나 쉬운 방법을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주윤이는 아직 어리니까 내가 해결해 줘야지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에게 전화해서 해결해주려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어쩌면 주윤이를 무시하는 엄마였던 건 아닐까. 아이는 어리니까 미숙하다는 생각. 그 생각엔 아이는 그 상황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엄마의 오만과 아이에 대한 무시가 깔려있는지 모른다. 아니 대개의 경우 그렇다.



  얼마 전, 주윤이와 함께 원더 (Wonder)라는 영화를 보았다. 선천성 안면 기형을 가지고 태어난 주인공 어거스트가 5학년때 처음으로 학교에 가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어거스트는 우려를 했던 바와 같이 친구와 선생님의 짐짓 놀래는 낯선 눈빛을 감당해야 해서 눈을 바닥에 맞추어야 했고, 점심을 혼자 먹는 시간, 놀림을 당하는 일,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는 일을 겪어야 했다. 결국 어거스트와 또래 친구들은 어린이들만의 방식으로 서로를 진심으로 알아봤고, 그랬기에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부모는 지켜보았다. 속상해하고, 걱정하고, 우려하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로 화가 잔뜩 난 어거스트가 말을 하지 않으면 지켜봐 주었고, 말을 하면 들어주었다. 어거스트의 부모는 어거스트를 믿었다. 부모가 해결해 주겠다고, 어려움이 있으니 잘 봐달라고 학교에 전화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어거스트는 자신의 화를 겪었고, 문제를 겪었고, 해결을 겪었다. 그렇게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충분히 겪어냈다. 우리는 안다. 충분히 겪은 사람만이 그 사람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삶의 지문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상담은 대신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어려움을 끝까지 듣고 방법이 없지만은 않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또는 네가 생각하는 방법 이외에도 그 문제에는 여러 갈래의 해결방법이 있다고 말해주며 내가 알고 있는 여러 경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까지이다. 결정은 그 삶의 주인인 당사자가 해야 한다. 우리에겐 고유한 삶의 방식이 있어서 같은 결정이어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그 경험이 모여 나만의 고유한 지문을 만든다. 충실한 경험 없이 밀도 높은 지혜는 생기지 못한다.



  아이의 마음을 읽어준다는 것도 이와 같다. 아이가 미숙하니 부모가 대신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의 말을 들으며 답답해서 끓어오른 내 마음의 부글거림을 내가 해소하고 싶어 전화기를 드는 것이 아니다.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는 모든 문제에는 방법이 있다고. 내가 알고 있는 방법은 이런 것들이 있더라며 여러 대안을 보여준다면 멋진 일이다. 그리곤 넌 어떻게 해보겠냐고 물으며 제 삶의 주도권을 아이가 쥐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의 삶에는 해결사 부모가 아닌 들어주는, just listener로서의 부모가 더 힘이 될 수 있다.



  그런 부모는 아이를 믿는 사람이다. 아이들은 아이만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그 과정에서 나만의 지문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지켜봐 줄 수 있는 사람이다.


v. 아이의 말을 들어주는 일

v. 아이가 상황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면 사실을 읽어주는 일

v. 여러 보기들을 제시해 주는 일

     그리고, 가장 어려운 하나는

v. 기다려주는 일


그렇게 아이를 믿어준다.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어 그 덕에 내 삶의 키를 쥐고 사는 삶은 단단하고 풍요로우며 어려움 앞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가진 삶이라 믿는다. 도무지 잘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리라 믿는다.



  주윤이의 힘듦을 보고, 알아준 나의 말에 주윤이는 눈물을 가득 담으며 웃었다. 오늘도 너와 손잡고 걸은 덕분에 나는 배운다. 알아주고 들어준다는 것의 진짜 행동 방법을. 그리고 그 의미를.



  물론 다음 수영시간에 주윤이는 여전히 얼굴에서 심장이 뛰고 다리는 후들거릴 게 분명하다. 그래도 이 힘듦을 알아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믿음은 그 과정을 겪는 주윤이의 발차기에 힘을 실어줄 수 있지 않을까. 주윤이의 심장 박동의 무게를 좀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



  진짜 들어준다는 건, 대신 전화해 주는 것이 아니다. 대신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충분히 겪도록 끝까지 들어주고, 지켜봐 주는 일이다. 내가 아는 방법만이 아닌 여러 경로를 알려주기 위해 많이 읽고 배우고 생각해야 하는 일이다. 뜸이 들때까지 기다려야하는 일이다. 시간이 걸리고 마음이 쓰이는 일이다.

나는 주윤이에게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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