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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Mar 14. 2022

책가방과 학원 가방의 랑데뷰


  아이가 3살 무렵 남편은 욕조에서 아이 목욕을 시켜주고 있었다. 아이는 욕조에서 물놀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오리 오리” “공뇽 공뇽”하며 자신의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그런 아이의 뒤에 앉아 반복된 단어에 장단을 맞추어 주며 행여 온기가 사라질까 아이의 작고 보드라운 등에 따뜻한 물을 끼얹어주고 있었다. 아이는 그런 줄도 모르고 아빠의 등을 대고 앉아 자신의 놀이에 명랑하게 열중했다. 아이는 아이로서 자신의 놀이에 열중하고, 아빠는 아이를 뒤에서 돌보는 그 모습은 자연스러웠다. 그때 나는 어쩌면 아이의 등을 보고 있는 것이 부모의 역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의 시작을 닮은 아이와 손을 잡고 등교를 하는 아침의 봄은 오늘도 아름다웠다. 교문에 다다르면 내가 한쪽 어깨에 메고 걸었던 책가방은 아이의 작은 어깨에 메어주고 실내화 주머니는 손에 꼭 쥐어준다.   

   

  아이의 등에 메어진 학교 책가방에는 엄마의 걱정이 잔뜩 묻어 있다.

‘제 교실을 잘 찾지 못해 복도에서 헤매다가 울지는 않을지...’

‘고무줄 바지가 아닌 버클과 지퍼로 된 바지를 입혔는데 화장실에서 입고 벗고는 해낼 수 있을지...지퍼 안 올려서 남대문 열고 나오면 어쩌나...’

‘오늘 급식에 아이가 못 먹는 토마토가 나온다고 했는데, 한 입이라도 먹으려나...’

‘밥 먹는 속도가 느린데 긴 젓가락을 사용하느라 더 느려지면 안돼는데...’

‘과연 오늘은 지난 금요일 학교에 놓고 온 점퍼를 가지고 올 것인지...’     


  아이는 엄마의 마음이 행여 입 밖으로 나올까봐 그 전에 안녕! 할 사이도 없이 교문으로 쏘옥 들어간다. 나도 아이를 따듯하게 안아주며 “잘 다녀와.”도 하고 싶고, 뒤돌아보는 아이에 대고 연신 “안녕!”하며 양팔을 높이 올려 인사를 해주고도 싶은데 아이는 자신의 앞을 보고 들어간다. 나는 아이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 혹시나 아이가 뒤돌아볼지 모르니 가볍게 흔들 팔과 손을 준비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 팔은 반대편 팔에 단단히 꼬여 팔짱을 낀 채 돌아 나온다. 그래도 학교에 씩씩하게 들어가는 모습에 마음이 내심 뿌듯하다.

‘이만큼 컸구나! 나도 이제 학부모구나!’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궁금한 것이 많다. 나는 주간 학습 안내를 미리 체크해둔 준비된 엄마이므로! 아이에게 오늘 창체 시간에 화장실 위치는 잘 배웠는지, 복도 통행 방법은 어떻게 하는 건지, 올바른 학용품 사용 방법은 어떻게 하는 건지 물어본다. 아이는

“첫째, 가위를 상대방에서 줄 때는 손잡이 방향으로 돌려줘야 해요.”

“둘째,...”하며 설명을 한다.      


  하교 후 잠깐의 평화로운 대화를 나누고 나니 안심이 된다. 교실에서 제 몫을 찬찬히 해내고 왔구나. 제법 선생님께서 하시는 설명을 귀 쫑긋하며 잘 듣고 온 것 같아 기특한 마음이 든다. 그렇게 내 걱정이 묻어있고 아이의 노력이 배어있는 학교 책가방을 우리의 집에 내려놓는다. 그 자리엔 뿌듯함이 잔잔히 배어있다.      


  벌써 학원에 갈 시간이다. 책가방 옆 학원 가방을 꺼내서 숙제를 다 했는지 확인하고 필통에 연필과 지우개를 넣고는 그 지퍼를 단단히 잠근다. 얼른 가야지! 하고 황급히 학원 가방을 아이의 등에 메어주었다.   

   

  순간 학원 가방이 참 커 보인다. 이렇게나 여리고 작은 아이의 어깨와 등을 학원 가방이 꽉 움켜쥐어버린 것만 같다. 아이는 아침과 마찬가지로 ‘네~!’하고 무심한 듯 또 뒤돌아보지 않고 학원으로 쏙 들어간다. 나 역시 아침과 같이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다만, 아이의 등에 걸린 학원 가방에서 내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시선에 온전히 담은 짠한 마음이 내 마음에 울린다.

 '이거 맞는 거지?'    


  나는 자신을 실현하는 삶을 동경해왔다. 나의 유전적인 재능과 후천적 노력이 더해져서 매 순간 나를 발견하고, 발견된 나를 실현하는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 생각해왔다. 나의 일상에 주어진 경험을 충실히 겪어내면서도 새로운 배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를 통해 나의 재능을 알아챈 후 꾸준한 훈련과 노력으로 나를 실현하는 삶은 힘듦도 보람도 의미가 된다 믿었다. 나는 행복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헤도닉(hedonic) 관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동시에 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추구해가는 삶인 유데모니아(eudaimonia)에서 오는 행복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왔다.      


  ‘나를 실현하고 있다는 그 영혼의 기쁨을 경험하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이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내가 뒷받침을 못해줘서 자신을 실현하는 삶의 근처에 가지 못하면 어쩌지.’

  ‘무언가를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가 만들어져 있는 사람은 자신이 진정하고 싶은 일을 찾았을 때 그 태도가 힘이 되어 주진 않을까.’     


  나는 삶의 기본이 되는 태도를 몸과 마음에서 키워가기를 바라며 학교에 가는 아이의 뒷모습에 걱정하는 마음을 보낸다.

“학교 교실에 가면, 눈 선생님! 귀는 쫑긋! 경청하는 거야.”

“급식 반찬을 받을 때 조리사 선생님들께 반찬을 미리 보고 조금만 주세요. 덜어주세요. 이건 못 먹어요. 하고 분명히 말하는 거야.”

“학교에서 선생님을 뵈면 안녕하세요! 하는 거야.”     


  동시에 나의 아이가 학업적 수월성이 주는 선택의 기회를 잡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며 피아노, 영어, 과학실험 등의 사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이 책 정말 재미있다! 엄마가 읽어줄까?”하며 독서의 세계로 아이를 꼬드기기도 하고

 “자, 이제 학원 숙제하자.”

 “한 페이지 풀 때까지 집중하는 거야!”

하는 으름장에 짠한 마음을 속이며 매일 학원 숙제와의 씨름도 감내하기도 한다.


  아이는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부모는 늘 뿌듯하면서 짠하다. 나는 아이가 세상에 두 발로 서있을 수 있도록 보드란 손을 잡고 걸음마 연습을 시켜주었으면서, 걷게 되면 그 보드라운 발바닥이 나의 발처럼 딱딱해질 것을 생각하니 짠했다. 하지만 단단한 발바닥이 있어야 제 힘으로 곧게 서서 제 길을 걸어갈 수 있음을 안다.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의 몫의 삶을 산다는 것은 기대가 되는 멋진 일인 동시에 고단한 일인 것이다. 우리는 이 고단함의 가치를 안다. 고된 노력과 훈련으로 자신만의 삶을 이루어가는 행복의 의미를 존중하고 존경한다.


  다만 먼저 살아본 부모는 자녀의 그 과정이 짠하다. 그래서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주고 아이의 등 뒤에서 따뜻한 온기를 채워주는 것이 부모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한 아이는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에 온전히 빠져서 뒤를 돌아보지 못함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모는 그렇게 뒤에 서 있으면 된다. 가끔 아이가 뒤를 돌아보면 힘껏 기쁘게 손을 흔들어주면 그만이다. 나의 고단한 삶을 응원하며 짠하게 생각하는 사람 한 명쯤 있는 삶은 꽤 든든하다. 부모는 그렇게 배경이 되어주면 된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는 각자의 몫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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