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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Mar 10. 2022

초1의 과업. 학원 스케줄이라는 챌린지

“전공이셔서 더 잘 아시잖아요.”

“아니에요. 전 집에서 엄마표 영어 안 해봤잖아요. 제가 연후 어머님께 배워야죠. 자세히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전화기 너머로 진실의 손사래와 고마운 마음을 담아 전화를 끊었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가면 영어 공부를 어떻게 해야할지 온 겨울동안 고민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사교육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하니 닿을 길이 막막했다. 인터넷의 글들을 읽고 또 읽었는데도, 아니 읽을수록 선택이 어렵다. 화상영어? 영어 도서관? 어학원? 인터넷에는 각자 경험담을 써둔 고마운 글들이 가득한데, 나의 아이는 어떤 성향인지를 아직은 알 수가 없으니 탐색할수록 오리무중이다. 



  문득 언젠가 아이의 유치원 친구의 엄마가 엄마표 영어를 만족스럽게 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된 나는 며칠 망설이다가 출처를 알 수 없는 용기로 그녀에게 엄마표 영어에 관해 조언을 구한다는 문자를 남겼다. 그녀와 평소 오가며 안면은 있었지만, 집에서 하는 엑스트라 공부에 관해 직접적으로 물을 만큼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사교육은 사적인 영역인데다 누군가에겐 비밀이라면 비밀일 수 있는 부분이라 혹시나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뜬금없이 훅 물어보는 내 질문이 그녀에게 당황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점점 부풀어올랐다. 하지만, 내 막막함과 탐색만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의 기압은 점점 커져서 내 마음이 버티기 힘들었나보다. 결국 압력밥솥에서 김이 터져나오듯 나는 그녀에게 문자를 남겼다.



  주변머리 없기로는 뒤져본 적 없는 사람이 나다. 나에게 부탁의 말이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마도 부탁의 말이라는 것은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없는 마음속에서 구성한 것이라 힘이 딸리는 것이 분명하다. 그 힘없는 말들이 목구멍이라는 가파른 경사를 올라 입 밖으로 소리에 실려 나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무거운 손가락을 도구 삼아 글자 하나, 단어 하나에 겸손을 담은 메시지를 작성하여 보내기 버튼을 누른 후, 휴대폰을 소파에 휙 하고 던졌다.

 


  느리게 포물선을 그리며 소파에 부드럽게 안착하는 휴대폰은 그제야 긴장이 풀려 편안해 보였다. 이 거실에서 이제 나만 긴장된다. 나는 지금 소개팅 후 나에 대한 호감에 확신 없는 상대에게 애프터를 신청하는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다. 태연한 척 내 일상에 눈길을 보내려 애쓰지만 마음은 두근두근하면서 휴대폰 알람에만 귀를 쫑긋하는 중이다. 이런 쫄보인 내게 친절히 자신의 경험을 나눠주는 그녀가 참 고마웠다. 그리고

“저는 만족해요.”하고 확신이 담긴 말을 남긴 그녀의 목소리는 내내 기억에 남았다.



  '나는 확신이 안 들어요.'

 이미 몇 년간 집에서 자녀를 지도해본 경험이 담긴 그녀의 말에 담긴 안정감이 지금 내겐 없다. 시작 투성이인 1학년 엄마인 나는 모든 것이 불안하다. 선택 유예의 시간에 떠올려보는 가능성들은 언제나 기대만큼, 아니 기대보다 더 큰 불안을 달고 온다. 나는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선택은 내가 책임지면 되는 것이 아닌, 내 아이가 겪어야하는 시간들이라는 생각은 더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지금으로선 차라리 시간을 접어서 3월 시작 앞으로 성큼 걸어가버리고 싶다. 



  지금은 무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1, 2월. 올해의 1, 2월은 여느때처럼 한 해를 지낸 아이를 격려하고, 올해는 또 얼마나 성장할까 기대하며 쉬고 여행을 다니다가 다시 익숙한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이 아니다. 3월의 매끈한 시작을 위한 고민들이 불안의 파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는 시기이다. 그 고민이란, 학원 스케줄 짜기! 대단한 나랏일이라거나 내 인생의 중대한 고민이라면 사유라는 멋진 말을 써보고 싶지만, 이건 그냥 고민이다. 



  새해의 시작을 이런 시시한 고민들이 삼켜버리다니! 가끔 올라오는 분한 마음을 달래본다. 나의 시시한 고민은 나와 여덟살의 하루들을 짜임새있게 해주는 집안일 같은 것일지 모른다. 눈에 띄지 않지만 닿은 손길과 닿지 않은 손길은 차이를 만드는 그것들. 원래 보기에 자연스럽기 위해서는 물밑에 세심한 고민들이 생각보다 많이 필요한 것이라 스스로 다독여본다. 겨울의 고민들이 매끄러운 봄을 만들어 줄 것이라 믿으며.



  혼자 알아서 하교 후 생활을 하는 데에 서툰 1학년을 둔 엄마는 하교 후 내가 올때까지 학원 스케쥴 짜는 것이 중대한 일이다. 먼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내용과 방법으로 교육하는 학원을 찾아내야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영어학원을 중심으로 스케쥴을 짜기로 했는데, 시중에 많은 좋은 학원 중 내 아이에게 맞는 기관을 선택하기란 마치 웨딩드레스 투어같았다. 둘 다 좋은 학원이어서 다니면 다 괜찮을 것만 같은데, 그 미세한 차이의 느낌적인 느낌을 구분해야하는 상황.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가 살짝은 아쉬울 것 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이것만큼 중요한 것은 선벽한 학원들 사이에 중간에 뜨는 시간이 없도록 요일과 시간을 잘 재단하여 블럭 짜기를 하는 것이다. 이는 엄마에겐 큰 일 하시는 분의 의전을 분단위로 세우는 일에 비견될 정도로 중대한 일이다.

 

  나는 일단 주변 영어학원을 모두 물망에 올려두고 선택을 해본다. 내 아이의 영어 레벨은 어느 정도라서 어떤 반, 어떤 요일에 배치될 수 있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수학, 피아노, 태권도 수업과 효율적인 블록 쌓기는 어떻게 이루어내야 하는지에 관해 며칠 동안 시간표를 짜고 또 짠다. 1안은 A라는 영어학원을 기본으로 세팅하고 나머지 학원들을 넣는 방식, 2안은 B라는 영어학원을 기본으로 세팅하는 방식, 3안은 A 영어학원의 월수금 반에 배치가 안되고 화목 반에 배치가 되었을 때의 스케줄 등 임시 안만 수십 개에 이른다. 이쯤 되면 이제 스케줄 블럭 짜기는 취미생활이다.



   며칠을 연습장에 줄을 긋고 학원 블록을 끼우다보니 나는 이렇게 선택은 없고 스케줄만 짜는 것은 내용엔 관심 없으나 예쁜 볼펜과 글씨체로 노트 정리하는 것이 공부하는 행위라 여기며 자기 위안을 삼는 어리석은 학생이 된 것만 같다. 선택을 하고 싶다. 이에 내 선택의 방향과 스스로를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기 위해 밤낮으로 불특정 한 개인의 경험이 남겨져있는 인터넷에서 학원 후기를 검색해본다. 누구는 어떤 학원이 도움이 되었고, 누군가는 그 학원이 맞지 않았단다. 또 누군가는 엄마표로 해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래, 자기 아이가 잘 다녔으면 좋은 학원이고, 그렇지 않으면 안 좋은 학원이지. 결국은 나의 아이의 성향을 봐야지.’

 ‘내가 선택을 잘못했을 때 아이가 영어를 질려하면 어떻게 하지?’

 ‘영어 레벨도 쑥 올리고 싶은데, 숙제가 너무 많은 곳이면 안되잖아.’

 ‘이런 아마추어. 어떻게 놀면서 잘하니? 선택과 집중이야!’

.

.

.

  ‘언어 4대 영역 중에서 집에서 못 해주는 게 말하기와 쓰기인데, 이를 중점적으로 하는 학원을 선택하자!’

  ‘나는 영어를 왜 교육시키려고 하는 걸까. 그래, 나는 영어라는 도구에 지배당하기보다는 잘 활용할 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지! 허들을 낮춰 주는 거야.’


  나는 생각이 정리되자 갑자기 스스로가 영어교육에 대해 관심뿐만 아니라 주관까지 있는 엄마가 된 듯하다. 이제 선택을 할 수 있겠다! 여러 학원들을 내 주관의 체에 넣어 내려봤더니 요 영어학원이 똥그랗고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래! 네가 마음속 1번이다! 그리곤 이제 그 이유를 머릿속으로 정리한다. 내 선택이 나 스스로 납득이 되고 타인에게도 자신있게 '난 이래서 이 학원을 선택했어.' 하고 내 선택을 설명할 수 있는 설득력을 갖는 것은 내 선택의 합리화에 너무나 중요하다. 이 순간 나는 소신 없는 타인과 다른 사람이다. 나는 돌연 주관 있는 사교육 선택 자가 되었다. 나는 꽤나 자신 있고 현명한 엄마가 되어 남편에게 자신 있게 학원의 이름과 선택의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내 마음속엔 하나의 뿌듯함이 자리 잡고 있다. 드디어 선택했다. 그것도 내 기준에 따라 선택했으니 나는 이 순간 주관 있는 엄마다! 드디어 내가 되고 싶은 엄마가 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같은 고민을 하는 아이의 친구 엄마나 선배 엄마가 알려준 고급 정보 내지는 누구는 어디로 결정했다더라와 같은 소식이 들린다. 순간 내 마음속에는 1번 스케줄에 대한 의심이 피어오른다. 그리곤 다시 인터넷 검색에 돌입한다. 나를 기다리는 건 비슷한 키워드로 검색했기에 읽었던 글이지만 또 새롭게 다가오는 그 글들이고 나는 또다시 읽는다.



  그렇게 나는 지금 3월 초등 1학년 스케줄표 짜기 세계에서 주관 따위는 무엇인지도 모르며 매일 새롭게 돌을 밀어 올리는 불안한 시시포스(Sisyphus)이다. 시시포스도 가끔은 돌을 못 본 척 도망가고 싶진 않았을까? 이쯤 되니 나는 좋은 게 좋은 거고 아이는 아직 어리니 놀면 좋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시작도 하지 않은 나는 벌써 질려버렸다. 그리곤 다시 한번 매일 떨어지는 돌을 밀고 다시 정상까지 올라갔던, 심지어 니체는 행복하다고 말했던 시시포스를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곤 한 가지 생각에 이른다.



  지금 내가 질려버린 건 생각에 갇혀있어서라는 것.



  나는 방구석에서 생각만을 하고 있다. 실제로 아이를 그 학원을 보내면서 고민하는 것도 아니고 내 팔 뼘만 한 책상에서 연필로 줄을 긋고만 있다. 아마도 시시포스는 매일 돌을 다시 정상까지 밀고 올라가며 어떤 날은 돌이 더 습하고 어떤 날은 더 까칠함을 제 맨손으로 느꼈을지 모른다. 그 순간 오늘 손에 닿는 돌은 좀 더 미끄러우니 오늘은 정상에 좀 더 반반한 쪽이 닿도록 조절해보기도 하고, 행여 날이 서 있는 돌의 면은 좀 더 깎아가며 매일 같은 돌을 매일 다르게 밀었을지 모른다. 그리곤 어쩌면 어제보다 오늘 그 돌이 정상에 찰나의 순간이라도 더 버티고 있는 모습을 기대하며 매일 돌을 밀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날, 그의 소망이 이루어진 그 짧은 순간의 희열이 다음 날 다시 돌을 밀게 했을지도 모른다. 나만의 경험, 내 맨손에 닿는 느낌은 무엇보다 확실한 확신이 되어준다.

 


  고민의 안개가 무색하리만큼 나는 소위 말하는 대세라는 학원이 아닌 유치원과 연계된 영어학원을 선택했다. 이 곳은 집에서 가장 가깝고 아이에게 익숙한 선생님이 계시는 데다 아이가 꼭 듣고 싶어 하는 과학 과목이 있는 학원이었다. 또 말하기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충분한 말하기 시간이 확보된 곳이었다. 직접 공부할 아이가 원하는 가장 원하는 요인을 손에 꽉 움켜쥐고, 나머지 아쉬운 부분인 책읽기는 내가 보완해보려 한다. 다행히 온 겨울 동안 엄지를 움직여가며 검색한 끝에 엄마표 영어학습에 어느 정도 실마리가 보였다. 그때 검색해서 알게된 사이트에서 나는 아이 수준에 맞는 동화책을 몇권 구입해서 함께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은 없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가는 언제나 우리의 몫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들여 선택한 결과는 이제 나와 아이에게 기회로 되돌아온다.  오늘부터. 그리고 충실히. 시시한 고민을 치열하게 한 만큼 나와 아이는 매일 진심의 하루를 경험 할 생각이다. 그 과정에서 운이 좋아 학원과 엄마표의 병행이 아이에게 맞는다면 '우리에겐 이 방법이 맞는구나!' 하는 확신이 찾아오는 날도 만날 것이다. 때론 불행히도 적잖이 실망한다거나 아이가 힘들어한다면 그 실패는 아이의 성향을 알게해주는 의미있는 실패 경험을 보여줄 것이다.길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이 아닌 행동을 해본다.

그 행동들이 내 손에 확신들을 점점 쥐어줄 것이라 믿는다.

무엇보다 내 아이의 성향에 관한 비밀을 하나씩 열어줄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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