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마실 맥주를 내일로 미루지 말라”라는 글귀를 게시한 어느 술집에 가보니 다음과 같은 글도 있었다. “걱정을 한다고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걱정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의심과 공포까지 불러일으키니 두통이 동반하고 마치 고문을 당하는 것 같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를 사방에서 포위해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바늘이 다가오며 계속 위협하는 것만 같다. 걱정이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법은 일이 발생하기 전부터 우리를 주눅 들게 하는 것이다. 일종의 기선제압이다. 이는 실제보다 문제를 더 크게 보이는 효과가 있다. 차라리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실제 걱정했던 일이 발생하는 게 거의 대부분 나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기도 하다.
인류가 신피질로 버전이 업그레이드되어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파악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게 축복인 줄 알았는데 부작용도 나타났다. 바로 걱정이다. 아무리 위대한 현자라 하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지혜의 총량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그래서 사물이나 관념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때 그 어원과 유래를 생각해본다.
걱정(worry)이란 말이 늑대가 순록 등을 사냥할 때 목을 끈질기게 물고 마구 흔든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걸 확인하고 소름이 돋았다. 걱정에 대해 이보다 어떻게 더 적확(的確)하게 묘사할 수 있단 말인가. 늑대나 개가 사냥감의 목을 공격하는 건 그곳이 가장 취약한 걸 알기 때문이다. 목을 마구 흔드는 건 과다출혈을 유도하고 숨통을 빨리 끊으려는 공격 행동이다. 걱정의 속성과 정확히 일치한다. 걱정은 한 번 물면 웬만해선 공격을 늦추거나 물러서는 법이 없다. 처음부터 상대하지도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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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도 팔자라는 속담이 있지만 확실히 걱정하는 것도 습관이다. 걱정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것이긴 하지만 통계적으로 볼 때 걱정하는 일의 85%~97%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수상도 어떤 노인이 죽음을 앞두고 한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그 노인은 평생 걱정만 하고 살았는데 대부분은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한다. 나머지도 사전에 막을 수 없는 게 대부분이라고 할 때 지나친 걱정이 끼치는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걱정은 대개 사소한 일에 큰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말처럼 대부분 과장되어 나타나기 마련이다. 최선의 것을 생각하고 최악에 대비하면 인생이 훨씬 즐겁다. 한 지인의 말이 생각난다. 인생은 어렵지만 고통은 선택이다(Life is difficult but suffering is optional.) 어쩌다 운이 따라 고위직에 올랐지만 일하는 시간보다 걱정하는 시간이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이러면 행운이 따르지 않는다. 걱정하는 것과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영역이다. 흔히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수가 많다. 걱정(worry)과 관심(concern)은 전적으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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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을 안 할 순 없지만, 걱정의 노예가 되면 안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걱정은 우리의 생산적인 활동을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또 걱정하면서 하는 활동은 결과가 신통치 않다. 걱정은 무한 배율의 확대경 아니 현미경과 같아서 사소한 일도 큰 문젯거리로 만든다. 파괴력이 보통이 아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대미지 컨트롤(damage control)을 잘하면 된다. 걱정을 하는 시간을 따로 지정하거나 걱정거리를 리스트로 작성하는 방법도 있다. 또 일을 한다거나 운동을 하는 등 바쁜 생활을 하면 쓸데없는 걱정을 대폭 줄일 수 있다.
걱정을 많이 하면 단명을 할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의학적으로도 검증이 된 사실이다. 걱정을 지나치게 하면 코티솔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한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도 사람들이 일보다 걱정을 더 많이 하기 때문에 일보다 걱정 때문에 더 죽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예전에 하던 걱정이 모두 필요한 것이었는가 검증하려면 정확히 일 년 전 오늘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는지 떠올려 보라. 아마 대부분 기억조차 못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