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
오늘은 평화롭다. 아무런 사건이 없어서이다. 날씨도 보태주려는 듯 따스해졌다.
너무 적요하고 따뜻하니 자고 싶다. 머릿속도 고요하고 자극되는 게 없다.
도서관에 나와 있는데 여기 지금 이용자들이 모두 다 엄청 예의 바른 지 조용하다.
어제는 바람마저도 어긋날 듯 반항하며 거세게 불어 젖히더니 오늘은 모두가 합을 이룬 듯 고요하고 침착하다.
이 상태가 더 가면 심심하다고 이 궁리 저 궁리할 것 같다.
나는 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일까.
가만히 있으면 자는 것이다.
그 외에는 무언가를 하든 해야 한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은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인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려고 하는 것은 권태를 잊기 위함 일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순수한 창작력일까.
그렇다면 그동안 무언가를 만들어낸 게 있기는 할까.
아이 낳고 키우고 일하고 살아온 것 밖에 없다. 남들과 똑같다.
특별히 나만의 것을 이룬 것은 없다.
나만의 것을 하고자 끊임없이가 아니라 띄엄띄엄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는 없다.
지속되는 것도 없다. 그래서 지속해 보려고 노력 중이다.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만큼만 하고자 하는 것을 지속했으면 성공했을 것이다.
늦지 않았다 여기고 이제부터라도 지속해 보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머릿속에서는 끊임없는 생각들이 들락거린다.
생각으로 사는 것처럼 무수한 생각들이 의식되기도 하고 의식되지 않기도 한다.
의식된 생각은 의식되지 않은 생각들에 비하면 파편일 뿐이다.
이 생각들이 전부 나의 생각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생각이라 하는 것들이 나도 모르게 주입되어 나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의식 밖으로 튀어나와 한 번 더 곱씹지 않으면 그 생각으로 하는 행위는 편향되고 오류일 가능성이 높지만 나는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의 것이라 자신의 결정이라 확신하는 것도 그냥 자신 속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발생하는 믿음일 뿐 사실은 다른 것에서 흘려들은 무작위적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조각들일뿐이다.
조용한 실내에서 누군가 작은 노트북을 책상에 떨어트려 엄청 큰소리가 났다. 다들 놀라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참하게 이쁜 여자가 죄송하다고 고개를 살포시 숙인다. 예쁘다 보니 쉬이 미소가 지어지고 용납이 된다. 만일 꼰대라든가 못생긴 사람이었으면 미소를 짓는 것까지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반응은 이쁘면 다 좋다라든가 잘못을 해도 쉬이 용서가 되는 것이 의식적으로 판단하여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자동 반응이다.
나쁜 짓 하는 사람은 우락부락하게 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을 무심결에 한다. 그래서 범죄자가 예쁘거나 잘생기면 호감을 갖는 기이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범죄자를 보호하려는 차원이 아니라 대중들의 호감도로 인해 사건이 왜곡될 것을 염려하여 범죄자의 얼굴을 모자와 마스크로 가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편견인지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가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바로 자신의 의견인 양 강력하게 작동한다.
어렸을 적 반공으로 세뇌된 우리는 공산당이 빨갱이라 하니 빨강 늑대인 줄 알았다. 이들은 늑대처럼 사람이 아니라고 각인되었다. 반공교육받을 때도 그런 비슷한 포스터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북한 사람이라며 나오는데 그냥 우리 동네 이웃집 사람들과 똑같아서 엄청 놀라고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이 정확하고 공정한 것일까. 혹여 편향된 판단들이 모여 다른 사람을 왜곡하고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닐까. 그럴 때 피해자를 어떻게 구제할 수 있을까. 무의식적인 가해자를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
AI 면접 프로그램에서도 이런 편향된 판단이 프로그래밍화되었음을 많은 여성 피해자가 발생하면서 뒤늦게 발견되었다. 그 앱을 기획한 사람 중에 여성이나 인종에 대한 편협함이 두드러진 사람이 있어 그 사람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 편협함이 섞인 질문과 답이 프로그래밍 속에 섞여 들어갔던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 믿는 것이 비정상은 아닐까. 우리를 의심해 보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자기 자신이 어떤 편향성에 물들어 있는지 의식 밖으로 꺼내지지 않는 한 아무도 알 수 없다. 자신을 의심해 보고 뒤돌아 보는 것이 정상이지 싶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보다 더 많이 타인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비난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무슨 특별한 권리라도 부여받은 양 대놓고 비판하기 십상이다.
자신이 본 것이 다가 아님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어쩌면 보여줬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못 보고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보고 싶은 대로 왜곡해서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제일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대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세상이 덜 혼란스러울 것이다.
내가 정답이야, 하는 것은 소통이 안 되는 꼰대 짓이다.
내가 놓친 것은 없을까, 하고 좀 더 살펴보는 것이 진정한 지식인이다.
오류를 수정해 나가는 것이 진정성 있는 태도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나를 확신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같은 추억 속에 기억들을 이야기하면서 각자 왜곡하고 있어 어느 것이 진짜이었을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 왜곡된 기억마저도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이 첨가되면서 변해가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기억이 된 것이다.
기억을 하더라도 왜곡되지 않게 하려 하고 감정에 따라 변동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백 프로 확신하지 않는다. 확신이 없으니 귀를 열어 놓고 듣게 된다.
그러면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드러나 보인다.
이것이 오류와 편협성을 줄게 해 준다.
산책하며 지나가는 데 벤치에 앉은 노인들이 각자 자기주장을 하고 있다.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하기 바빠서 아무도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다.
그중 핏대를 세우며 가장 강력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 잠시 주목을 끌긴 했다.
자기 확신 속에서 자기주장을 확신하고 강요하는 그들은 소통을 원하였으나 불통하고 있었다.
소음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