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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barista Sep 27. 2021

당신은 개새끼가 아닙니다

– 5번째 책, 윌리엄 서머셋 모옴 『달과 6펜스』

얼굴에 선량하다고 쓰여 있다      


손차장은 한없이 정직하고 평범한 사람이다. 누가 있든 없든 그는 자리를 지켰다. 일도 무난하게 잘 해냈다. 상사의 지시에 충실했고, 젊은 동료들에겐 후했다. 잦은 인사이동으로 적응하기 쉽지 않았지만, 새로 맡은 일들도 원만하게 처리했다. 회식 메뉴를 고를 땐 늘 같은 걸 선택했다. 선택이라고 하기보단 조건 반사처럼 보였다. 어느 회사에나 손차장 같은 사람이 한 명 정도는 꼭 있을 것 같았다.      


집에서는 좋은 남편이자 아빠였다. 저녁 식사 후 설거지는 손차장 몫이었다. 주말엔 빨래와 청소도 소리 없이 했다. 아내 일을 돕는다는 티는 그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건 대부분 들어주었다. 그 덕에 아이들은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했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책을 읽었다. 그가 집에 있는지를 알려면 서재만 확인하면 됐다. 강아지와 산책이라도 가게 되면, 가족 대화방에 산책 코스와 소요 시간을 남겼다. 무의미한 표정과 특징 없는 삶을 그는 구도자처럼 해내고 있었다. 그는 가족의 한 사람이라기보다 가족의 배경에 가까웠다.     


손차장은 종이에 뭔가 열심히 적고 있다. 권태, 우울, 싫증, 따분, 지겹다, 지루하다, 단조롭다 등등 비슷한 의미를 담은 단어들을 끄적였다. 그의 삶에 신선한 자극이란 없었다. 출퇴근은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었다. 같은 시간대에 같은 위치에서 타는 지하철이라 오다가다 마주치는 승객조차 비슷비슷했다.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찢어진 청바지, 까만 선글라스, 긴 파마머리, 귀걸이, 문신 스티커를 붙이고 대학 시절 하드락 그룹에서 보컬을 맡았던 손차장이다. 그가 개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증권맨 생활을 11년째 하고 있다. 그가 조용한 것엔 이유가 있다. 손차장은 기질상 회사에서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회사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청동으로 만든 창업주의 흉상과 만나게 된다. 손차장은 자기 가슴이 청동처럼 차갑게 변하지 않게 해 달라고 매일 아침 주문을 외웠다. 긴 머리를 출렁이면서 3옥타브 솔까지 자연스럽게 소화했던 록커는 단정한 머리와 얌전한 음성으로 흉하게 변해 있었다. 적어도 손차장이 보기엔 자기 모습이 그랬다.     


이런 마음 자세로 사람들과 대화가 잘 될 리 없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필요한 말만 하고 입을 닫은 채 미소만 지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자신을 예의 바르고 조용하다면서 좋아했다. 손차장도 어쩌다 말이 통할 듯한 사람에겐 속내를 비추기도 했더랬다. 그러나 진심 어린 대화는 매번 동전처럼 땅에 떨어져 때굴때굴 굴렀다. 이런 일이 몇 차례 계속되자, 손차장은 방어적 침묵을 하게 되었고, 이젠 체념적 침묵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저 생계형 임금노동자로서 적당하게 처신하면 그뿐이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노래? 그 까짓 것!“ 하며 발로 뻥 차 버렸다. 그때마다 노래는 바로 코앞에 떨어졌다.     


이런 회사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벗어날 희망이 없어 보였다. 가족들은 나 하나만 바라보고 있다. 연로하신 양가 부모님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에 가신다. 아내는 세상 물정을 모른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다. 직장은 숙주고, 가족은 기생충과 같은 상황이 좀체 역전될 것 같지 않았다. 지난 10년의 회사생활은 그걸 확인해 주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갇혀 있고 그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느낄 때 권태를 느낀다고 한다. 지금 손차장이 딱 그랬다. 산소가 부족하면 졸리듯, 삶의 가치가 부족하면 권태로운 법이다.     


이번 달 독서모임 주제도서로 뽑힌 책은 『달과 6펜스』였다. 손차장은 늘 해왔던 대로 의례적으로 책을 샀다. 읽지도 않는데, 책까지 없으면 자신의 무관심이 너무 티 나기 때문이다. 무슨 영문인지 모임 주최 측에서 이번 달 발표자로 손차장을 선정했다. 물론 손차장은 처음엔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주최 측이 자신을 발표자로 선정한 이유가 엉뚱하면서도 그럴싸했다. 소설 주인공이 딱 하나의 인생 목표,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가족까지 버린단다. 주인공이 다니던 회사는 증권거래소이고, 그 결정을 한 나이는 마흔이란다. 그런데 마침 손차장이 다니는 회사는 증권회사였고, 나이는 마흔이었던 것이다.     


내는 평소보다 책을 열심히 읽는 손차장이 신기해 보였다. 남편에게 무슨 내용이냐고 물었다. 손차장은 별생각 없이 주최 측이 전해 준 줄거리를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의 반응에 손차장은 깜짝 놀랐다.     


”개새끼네!“



꼭 그렇게 말할 건 아니구    


손차장은 자신도 모르게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인 스트릭랜드 편을 들고 말았다. 아내도 질세라 소리를 높였다.          


”그럼, 당신은 자기 꿈을 이루겠다고 아내와 자식까지 내팽개친 게 잘했다는 거야?“


손차장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목소리만은 차분했다.    

 

”그런 엄청난 결정을 하려면, 제정신은 아니었을 것 같아. 아마 자신도 어쩔 수 없었던 엄청난 힘이 작용한 게 아닐까? 책에 이런 내용이 있어. 내가 읽어볼게.


‘정말이지 그는 악마에게라도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악마가 느닷없이 달려들어 그를 갈가리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악마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뭔가가 있나 봐.“          


악마라는 단어에 아내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개새끼나 악마나 나쁘다는 점에선 같았기에 받아들이기 쉬웠던 모양이다.     


손차장은 아무렇게나 처박아 놓은 전자 기타를 좀 더 안전하게 두지 못한 것이 못내 불안했다. 기타를 보면 자신 역시 본능적으로 흥분했기 때문이다. 기타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도록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그 마력은 피를 데우고 정열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을 꿈틀거리게 했다. 지금까지 그런 모습을 아내에게 들키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이 책은 치명적으로 위험한 책이다. 손차장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치명적인 위험만큼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도 없다는 사실도 동시에 깨달았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와가 선악과를 왜 따 먹었겠는가. 그것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을 뿐 아니라, 치명적으로 위험했기 때문이다. 손차장은 밤이 하얗게 밝아오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어 나갔다.    


     

달나라와 돈나라    

     

책에는 두 개의 나라가 있다. 소설 이름 그대로, 하나는 달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6펜스의 나라, 즉 돈나라였다. 달나라는 예를 들면 이런 나라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잘하고 못하고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자기 존재의 명령이다. 그 말은 그동안 증권거래소에서 일했던 삶은 존재의 명령을 위반한 삶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이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 분명했다. 존재의 명령을 거역한 죄인으로 사는 것은 달나라 사람들에겐 죽음과 같은 것이다. 이판사판이다. 누구 눈치를 볼 상황이 전혀 아니다.     


스트릭랜드는 자기 그림에 대해 누가 뭐라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주변에 대해 그처럼 철저하게 무관심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그림에 미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찾는 미지의 그것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망설임 없이 대상을 단순화하고 뒤틀었다. 사실이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와는 관계없는 무수한 사실들 사이에서 그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만을 찾고 그렸다.      


이렇게 사는 건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손차장은 생각했다.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만 찾아 사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이기적으로 사는 건 나쁜 짓이며 언젠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고 초등학교 때부터 배웠다. 인간의 양심은 이기적 인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손차장의 생각이 이쯤 이르렀을 때, 놀랍게도 그의 눈은 양심에 대한 전혀 다른 의미를 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손차장은 읽는 사람마다 달리 해석될 수 있더라도 이 부분을 긴 호흡으로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따라가 보자. 작중 화자인 젊은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다.           


양심을 스파이라고 한 것이 마음에 좀 걸렸지만, 손차장은 여기까진 큰 무리 없이 이해되었다. 양심이 공동체를 위한 파수꾼, 경찰관, 스파이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좀 이상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스파이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걸까? 젊은 작가는 말을 이어갔다.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을 문 안에 들여놓은 셈이다.          


맙소사! 인간은 결국 혼자 살면서도 같이 사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걸까? 자기만의 개성과 삶의 의미를 찾지만, 그것마저도 다른 사람의 칭찬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는 걸까? 남의 칭찬은 꿀처럼 달고, 남의 비난은 독약처럼 써서 양심이라는 정수기가 필요했던 것일까? 단면 삼키고 쓰면 뱉기 위한 필터로서의 양심. 그래서 양심은 나만의 존재 의미를 찾는 달나라 사람들에겐 스파이일 수밖에 없는가 보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      


개새끼라는 비하적 평가와 소설에서 말한 악마의 힘이란 결국,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양심에 따라 살지 못한 인간은 인간도 아니요, 그렇게 만드는 건 악마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단 의미다. 그렇다면 양심에 따라 살면 인간은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다! 젊은 작가는 이러한 양심이 종국엔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을 주인으로 섬기도록 자기 자신을 노예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당연하게 이런 질문이 생긴다. 나는 내면의 진정한 나의 목소리를 따라야 할까, 아니면 스파이인 양심의 목소리를 따라야 할까? 양심이 곧 진정한 나의 목소리라고 배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왕이 매로 어깨를 때릴 때마다 아양을 떠는 신하처럼 자신의 민감한 양심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양심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왜냐하면 사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그런 사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양심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따르는 사람 앞에선 무력하단다! 그래서 아예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고 한다. 손차장은 학교에서 배웠던 국민윤리라는 교과목이 생각나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냥 평범한 윤리가 아니라, 국민윤리라니! 국민윤리 안에 한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나’다움이란 금지된 것과 다름없었다. 선진조국 창조를 위한 밑거름에 개성이니 창조성이니 예술적 정열이니 하는 것은 사치에 불과했다. 윤리라는 것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손차장은 한 대 얻어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


손차장은 국가가 거대한 기계처럼 느껴졌다. 윙윙거리는 굉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현역으로 입대해 병장 만기 제대한 것이 갑자기 수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힘 있고 돈 있는 집안에 병역 면제자가 많은지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손차장은 자신이 너무 왜소하게 느껴졌다.     


     

또 다른 예술의 세계     


스트릭랜드는 달나라의 기운을 받고 나서야 돈나라의 실체를 알았다. 그리고 그는 달나라에서 살 수밖에 없는 어떤 힘에 묶여 있다. 나아가 달나라의 삶에서 온전히 자신의 삶을 성취하고자 한다. 그러한 삶이 바로 자신의 존재 의미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그는 ”그때까지 자신을 얽매어왔던 굴레를 과감히 깨뜨려 버렸던 것이다.“ 그는 돈나라 사람들이 하는 칭찬이나 인정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젊은 작가가 보기에, 독설을 날리는 비평가들이 들끓는 그림 시장에서 스트릭랜드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젊은 작가 : 남들의 생각을 듣고 싶어 하실 줄 알았는데요.
스트릭랜드 : 당신은 그렇소?
그가 이 두 마디 말에 담았던 그 측량할 수 없는 경멸감을
나는 지금도 다 표현할 길이 없다.     


측량할 수 없는 경멸감! 달나라 사람들은 돈나라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리고 돈나라 사람들은 그러한 경멸에 대해 딱히 대꾸할 말도 없다. 손차장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돈나라 사람들도 할 말은 있지 않은가. 양심에 따라 묵묵히 자신의 의무를 다한 사람들이 왜 경멸의 대상이란 말인가. 우리 모두는 단지 태어났을 뿐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태어남을 당했을 뿐이다. 마치 교통사고처럼. 태어나 보니 대한민국이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워야 할 걸 배웠다. 한국말, 한글, 부모님께 효도, 어른들께 공손, 나라에 충성, 우리의 소원은 통일, 선진조국 창조 그리고 정의 사회 구현 등등.      


옛날부터 정해져 있던 길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따라 살았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무사히 제대했다. 조상님 음덕으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취업도 했다. 우주가 도와 결혼했고, 운명의 신에 의해 아이들을 낳았다. 그 아이는 다시 나와 같은 대사를 읊조리게 될 것이다. 나는 태어남을 당했을 뿐이다.     


사회계약설에 따르면, 우리와 국가는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기로 계약했다. 그래서 국가에 주어야 하는 것, 사회가 요구하는 것, 가정이 바라는 것을 해 왔다. 왜 그것이 경멸을 받아야 하는지 손차장은 불만스러웠다. 이제 생각하니, 자신은 받을 걸 못 받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자신 역시 젊은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스트릭랜드에게 대들만한 힘이 나지 않았다.          



내게도 꿈이 있어요     


손차장은 그 이유를 『달과 6펜스』의 ‘브뤼노 선장’에서 찾았다. 그의 말이 운석처럼 마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나도 꿈을 가진다는 게 뭔지를 아는 사람이니 말입니다.
내게도 꿈이 있어요.
나는 나름대로는 예술가죠.     


브뤼노 선장은 스트릭랜드에게 한없는 동정을 느꼈던 사람이다. 그는 훌륭한 선장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가장이다. 그는 스트릭랜드처럼 가족을 버리지 않았다. 브뤼노 선장은 가족과 함께 꿈을 꿨다. 사실 그는 크게 실패한 경험이 있다. 그렇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아무도 살지 않는 작은 섬을 하나 얻었다. 무인도가 다 그렇듯 쓸모있는 땅은 없었다. 밤낮없이 땅을 개간했다. 집도 손수 지었다. 집을 지은 손은 가족 모두의 손이었다. 그렇게 가꾼 섬은 단순한 섬이 아니었다. 예술 작품이었다.     


내게도 그 친구를 움직인 그런 욕망이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 친구가 그걸 그림으로 표현했다면,
나는 인생으로 표현했을 뿐이지요.     


자기 삶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활동이니까, 이것은 결국 내 삶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껏 손차장에겐 한 번도 없었던 바람이다. 손차장이 꾼 꿈들은 호주머니를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브뤼노 선장은 자기 삶 전체를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언어로 또박또박 달나라에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손차장은 어떤 힘이 느껴졌다.

     

당시 스트릭랜드는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할 즈음이다. 브뤼노 역시 그의 그림에서 알 수 없는 원시적 아름다움과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뤼노 선장은 스트릭랜드에게 기죽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게도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면의 힘을 느낀 사람이 바로 달나라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누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우주에 단 하나뿐인 자기 삶을 아름답게 꾸민다. 스트릭랜드는 아름다움을 혼자서 그림으로 그렸고, 브뤼노 선장은 아름다움을 가족과 함께 인생에 그렸다.      


난 아무것도 없던 데서 뭔가를 만들어냈어요.
나도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셈이죠.
정말이지, 선생은 모를 겁니다.          



달나라와 돈나라는 둘이 아니다   

  

손차장은 브뤼노의 삶에 깊은 공감과 존경을 느꼈다. 손차장이 보기에 브뤼노의 삶에는 달나라와 돈나라가 둘로 갈라져 있지 않았다. 두 나라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화해되고 조화되었다. 그래서 더욱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인생의 아름다움은 가족과 자신의 꿈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은 가족 그리고 이웃들과 함께 만든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스트릭랜드의 그림이 고독한 단독자의 작품이라면, 브뤼노의 섬은 화목한 협력자의 작품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부채의식을 갖는다. 나에게 뭔가 빚지고 있다는 기분은 왜 드는 걸까? 손차장은 여기에 생각을 집중했다. 손차장이 태어나 지금껏 배우고 익힌 것은 우리 민족과 나라 그리고 인류가 만들어 온 보편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설령, 개별적인 품성과 독창성을 말할 때도 이러한 보편적인 것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만 가능했다. 따라서 나만의 고유성과 보편성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로 통일되기 마련이다. 가족, 사회, 국가와 전혀 상관없는 개성을 갖고 살아가는 외딴 섬과 같은 사람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만에 하나 이런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를 보고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일전 축구를 생각해 보자. 손차장 자신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목이 터져라 한국을 응원한다. 경기에서 지기라도 하면 마치 자신이 패한 것처럼 분하고 억울하다. 물론 감정의 정도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손차장은 이런 기분이 드는 자신이 나답다고 느낀다. 어떤 사람이 자기답다고 느끼는 것에는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느끼는 자연스런 감정도 포함되는 것이다. 한일전에서 일본을 소리높여 응원하는 자신을 손차장은 나답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한편 우리는 나답다는 것에는 나를 제외한 그 어떤 불순물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선입견이 있다. 그래서 공동체가 원하는 무언가를 내가 자발적으로 하거나,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과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나답지 못하다고 섣불리 판단한다. 묘종의 이물질이 끼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공동체나 이웃과 함께 협력해 무엇인가를 하기보다는, 뛰어난 한 명의 개인으로서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가르친 교육에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친구들과 함께 뭔가를 한 기억은 없다. 각자 한 개인이요, 경쟁자로서 교육받고 평가받아 왔다. 그래서 나만의 고유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해왔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뭔가 빚지고 있다는 기분은 이러한 편견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닐까.     


나라는 존재는 내가 아닌 다른 것들과 완전히 분리된 채 존재할 수는 없다. 나답다는 것에는 이미 우리답다는 것도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은 때와 장소 그리고 주변 환경과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질 때마다 늘 새롭게 조율되기 마련이다. 마치 악기처럼 말이다. 나만의 고유한 소리도 좋지만, 가족과 이웃 그리고 우주와 함께 만들어내는 화음에 귀 기울이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순간마다 다시 창조되는 나에게 빚지지 않는 비결이다. 오롯이 나로 살면서, 늘 나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손차장은 이것을 ‘in yourself & beyond yourself’로 정리해 보았다.     


손차장은 이렇게 정리한 발제문을 독서모임 주최 측에 보냈다. 이메일을 발송한 후 자신도 모르게 전자 기타로 눈길이 옮겨 갔다. 전자 기타는 독주할 때도 매력이 있지만, 드럼과 피아노 그리고 다른 전자 기타와 협주할 때 역시 자기만의 매력을 발산한다. 손차장은 자기 자신이 전자 기타와 닮았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오래간만에 옛 그룹사운드 맴머들의 연락처를 휴대폰에서 검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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