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번째 책,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리하비 오스월드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총으로 살해했다. 마크 채프먼은 비틀즈의 멤버였던 존 레논을 총으로 살해했다. 존 힝클리는 레이건 대통령을 총으로 쐈지만 죽이진 못했다. 마크 채프먼, 리하비 오스월드, 존 힝클리 이들은 모두 『호밀밭의 파수꾼』을 즐겨 읽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마크 채프먼은 존 제논을 쏜 후 체포될 때까지 살인 현장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그는 기자들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단다.
이차장도 이 책을 좋아한다. 성장소설이니까 사춘기 청소년들에게나 어울릴법한 이 책을 그는 마흔 줄이 넘어 여러 번 읽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차장이 어떤 유명인을 총으로 죽일 계획을 가진 건 아니다. 물론 가끔 그런 생각이 불쑥 드는 것까지 부인할 순 없지만, 자기를 아무리 저주하는 회사 상사라도 진짜 죽이고 싶진 않다. 인간은 늘 성장하는 중이며, 성장이라는 말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이 차장은 믿는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인생 최고의 성장소설인 『호밀밭의 파수꾼』을 늦게나마 만나게 된 걸 다행으로 여긴다.
이 차장이 『호밀밭의 파수꾼』에 꽂힌 이유 중 하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우울감’ 때문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도 툭하면 외롭고 우울한데, 이차장은 여기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물론 콜필드가 자신보다 우울의 경지가 한 차원 높다는 건 이차장도 인정하는 바이다. 콜필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갑자기 우울감을 느낀다. 그는 수녀 두 사람이 아침 식사로 토스트와 커피를 먹는 걸 보자 우울해 졌다. 그는 영화를 보고 싶어서 좀 더 빨리 가려고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을 보자 우울해 졌다. 그는 “행운을 빌어요!” 같은 말을 들어도 우울해졌다. 그는 각양각색의 여자들 모습을 보면 우울해졌다.
이차장은 올해 44살이다. 콜필드보다 무려 27살 많지만, 이차장도 요즘 툭하면 우울하다. 콜필드는 돈이란 언제나 끝에 가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어 버린다며 “망할 놈의 돈 같으니라고” 말함으로써 이차장의 속을 후련하게 해주기도 했다. 이 차장은 자신도 모르게 이 부분을 패러디해 버렸다. 망할 놈의 성과평가 같으니라고. 경쟁은 언제나 끝에 가서 사람을 실패자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이차장이 우울한 이유 중 하나는 팀장 승진에서 계속 떨어진 게 컸다. 심지어 최근에는 후배가 먼저 팀장을 달았다. 회사 사정에 밝은 누군가에 의하면, 모 임원이 이차장의 성과평가 점수를 3년 연속 최하 점수를 준 탓에 계속 밀리고 있다고 했다. 이 문제의 임원은 이차장을 따로 불러 이런 말까지 했다. “내가 있는 이상 당신은 팀장 승진할 생각을 아예 접는 게 좋을 거야.” 나아가 그는 승진을 결정하는 최종 임원 회의에서 이차장의 업무능력은 물론 인성까지 시비를 걸어 결정타를 날렸다.
이차장은 회사생활 17년 세월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억울하다, 허무하다며 마음에선 장송곡이 떠날 날이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지독한 우울감에 빠진 것이다. 세기의 살인자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좋아했다는데, 얼마 전엔 자신도 그 임원을 총으로 쏘는 꿈까지 꿨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나간 거 아닌가. 그 임원이 별 이유 없이 내가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따지고 보면, 나를 미워하는 일이 죽을 짓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차장은 자신이 이렇게 슬슬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고민 끝에 정신과 상담을 예약해 기다리는 중이다. 지금도 이차장 머리에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책 표지, 시대의 살인자들, 권총, 모 임원의 얼굴이 둥둥 떠다닌다. 고개를 흔들면서 애써 외면하려 해도 분노와 우울감이 뒤범벅된 기분은 더럽게 남았다. 고개를 흔든 탓에 떨어진 비듬이 더러운 기분을 더욱 더럽게 만들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쓴 자서전적 소설이다. 자서전적 소설이라고 하니 작가 역시 학교생활이 지독히 사나웠나 보다. 소설 주인공인 콜필드는 4번째 퇴학이 확정되었다. 교장이 쓴 퇴학 통지서는 지금 부모에게 날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두고 말이다. 아들의 4번째 퇴학 소식에 부모님들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질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자신을 심하게 혼내겠지. 아버지는 이제 곧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나를 거의 죽기 직전까지 매질할지도 모른다. 숨 막히는 집안 분위기를 생각하니 콜필드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라도 자유를 느끼고 싶다. 소설은 콜필드가 기숙사를 나와 집으로 가는 2박 3일 동안의 이야기이다.
이 차장은 책을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낄낄 웃었다. 콜필드가 선생님들의 습성을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는데, 이차장이 보기엔 콜필드가 열거한 선생님들의 습성은 회사 임원들과의 습성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선생님들은 늘 자신들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회사 임원들만큼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가진 부류도 드물다. 선생님들은 처음 말했을 때 인정했는데도 똑같은 말을 두 번씩 한다. 임원들은 스무 번씩 할 때도 많다. 선생님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그렇게 자르기 마련이다. 남의 말 자르고 자기 말 오래 하기는 임원들이 가장 애용하는 대화의 기술이다.
선생님들의 습성을 묘사한 것에서 이미 눈치 챘겠지만, 콜필드는 현실을 녹슬게 하는 가식과 위선을 시원하게 벗겨내는 재치를 가졌다. 이렇게 날카로운 콜필드의 사이다 발언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몇 개만 뽑으면 이렇다. 훌륭한 젊은이들을 양성한다는 학교 광고를 보면서 그가 한 말이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훌륭한 젊은이들이라고는 본 적이 없다....어쩌면 한두 명쯤은 있을지도 모른다....그나마 이 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렇게 훌륭한 학생이었을 테지.” 콜필드는 경제적 양극화를 이렇게 표현한다. “같이 방을 쓰는 친구의 것보다 내 가방이 훨씬 고급일 경우에는 사이좋게 지내기가 어려운 법이다.” 이 차장은 이 부분에 격하게 동감했다.
그러니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월급을 받는 경우엔 얼마나 사이가 안 좋을까. 마음이 까만 납덩이로 변했다.
인생은 규칙을 지켜야 하는 운동 경기와 같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대해 콜필드가 한 속말은 또 어떤가.
시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합은 무슨. 만약 잘난 놈들 측에 끼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시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측에 끼게 된다면, 잘난 놈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편에 서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시합이 되겠는가? 아니, 그런 시합은 있을 수 없다.
방금 잘 모르는 사람과 헤어진 콜필드 가라사대,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전혀 반갑지 않은 사람에게 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같은 인사말을 해야 한다는 건 말이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그런 말들을 해야만 한다.”
이렇게 재치 있고 현실감각 뛰어난 학생이 어쩌다 툭하면 우울해지는 것일까? 어떤 날은 우울이 지나쳐 죽고 싶기까지 하다. 이건 앞길이 구만리 같은 방년 17세 소년의 입에서 나와선 안 되는 처참한 말이다. 하긴 누가 알겠는가. 이 말이 정말 잘 살고 싶은 한 인간의 솔직한 고백인지.
그렇다면 콜필드는 왜 자꾸 우울한 걸까? 이차장은 이 책을 이미 다섯 번 읽었고 지금이 여섯 번째지만, 이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읽을 때마다 우리의 주인공이 왜 우울한지 딱 부러진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번만은 콜필드가 도대체 왜 우울한지 그 이유를 끈질기게 추적하겠노라고 이차장은 단단히 마음먹었다. 이차장이 이렇게 마음먹은 데에는 콜필드의 말이 적잖은 힘을 주었다. 콜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해 보기 전에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내심 이 차장은, 콜필드가 우울한 원인을 알게 되면 자신의 우울감 해소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까지 품고 있었다.
‘콜필드의 마음 저 밑에서 우울감을 만들고 있는 사건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품고 소설을 천천히 읽어가다 보니, 콜필드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상처와 만날 수 있었다. 그 상처는 바로 동생 앨리가 죽은 사건이다. 앨리는 1946년 7월 18일, 백혈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콜필드의 말에 의하면, 앨리는 자기보다 두 살 어렸지만, 오십 배 정도는 더 똑똑했다. 동생 앨리는 야구 글러브에 시를 써 놓았다가 시합 중 짬짬이 읽는 아이였다. 앨리를 칭찬하는 선생님들의 말씀은 그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천성도 매우 착하고 밝아 앨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 아이를 싫어할 수 없었다.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삶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이가 바로 앨리였다.
그런데 그렇게 천사 같던 동생이 그 이름도 흉악한 백혈병에 시달리다가 불과 1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앨리가 죽던 날 콜필드는 자동차 유리창을 주먹으로 전부 깨부쉈다. 손은 그야말로 피범벅이 되었고, 뼈는 다시 주먹을 꽉 쥐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상했다. 부모님께서 콜필드의 정신분석을 의뢰할 정도로 그날의 상황은 심각했고 우려스러웠다.
이처럼 콜필드는 동생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슬픔은 분노와 억울함 사이에 뒤엉켜 있었다. 삶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동생과 극악무도한 백혈병으로 인한 죽음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도 당시 13살이었던 어린 아이에겐 말이다.
이차장은 조심스레 콜필드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콜필드가 보기엔 무엇인가 잘못되었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여기엔 하나님이든 조물주든 누군가의 결정적인 실수가 개입되어 있는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질 수 있는가. 이런 것이 세상살이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착하고 훌륭하게 살다가도 저렇게 허무하게 죽는다면 차라리 남이야 뭐라고 하든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죽는 것이 남는 장사 아닐까.
콜필드는 머리 나쁘고 게다가 성격까지 삐뚤어진 자신이 그런 나쁜 병과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죽은 동생과 자신을 비교해 볼 때, 살아남은 자신의 삶은 너무나 초라하고 어두웠다. 자신만이 아니다.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나누는 대화, 그들의 취미, 관심거리, 희망 사항들은 하나같이 쓰레기 같은 것들뿐이었다. 콜필드 눈에는 살아남은 자들의 삶은 죽은 동생의 삶과 비교해 볼 때, 말 그대로 가짜에 불과해 보였다.
가짜 삶, 거짓 인생. 세상은 온통 거짓말쟁이들의 소굴이었다. 그 속에서 콜필드는 앨리와 같은 진짜 삶을 살길 원한다. 그러나 거짓 세상과 진실한 앨리는 같이 살 수 없었다. 만약 콜필드가 진실된 삶을 계속 고집한다면 그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지도 모른다. 보라! 여전히 세상 사람들은 실제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을 실제라고 믿고 즐기고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진짜 실제를 보여주면, 그들의 더러운 입은 그건 실제가 아니라고 자신있게 떠벌린다. 이에 대해 콜필드는 “정말 환장하겠다.”며 울분을 토해낸다. 속은 시원하겠지만, 순수한 영혼은 아직도 어찌할 바 몰라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이차장은 이렇게 생각했다. 콜필드의 우울은 진정성 없는 삶에 대한 구역질 같은 것이다. 헛구역질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죽은 동생 생각으로 가득하다. 소설 말미에 콜필드가 극도로 나쁜 상황에 몰렸을 때, 그는 동생 앨리와 대화하는 상상 속에서 이렇게 부탁한다.
앨리, 날 사라지게 하지 말아줘. 앨리. 날 사라지게 만들지 마.
앨리. 제발, 부탁이야. 사라지고 싶지 않아.
자신의 실제를 지켜줄 수 있는 안간힘을 콜필드는 앨리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앨리는 바로 그런 힘의 다른 이름이다. 앨리처럼 내 삶에도 항상 밝게 웃을 수 있는 순수한 의미가 있을까? 콜필드는 그러한 질문을 품은 채 지금 성큼 성장하고 있는 중이라고 이차장은 읽어냈다.
콜필드는 삶에 대한 순수한 환희 없이 어른이 된다는 건 절망적이라고 한다. 그런 어른은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열정적으로 부르다가 공연이 끝나자마자 담배를 벅벅 피우는 배우 같은 거짓 존재들이다. 차라리 긴 오케스트라 공연 내내 딱 한 번 북을 치더라도 자신의 연주를 진지하게 해내는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 실제를 간직한 진짜 존재라고 콜필드는 믿는다. 콜필드의 영혼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건 어린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귀에 어떤 꼬마의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꼬마는 ‘호밀밭에 들어오는 사람을 잡는다면’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노래는 일상의 소음을 멈춰 세웠다. 아이들의 눈은 모든 삶의 순수함을 담고 있다. 콜필드는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우울하지 않았다. 비로소 콜필드의 영혼이 쉴 만한 물가를 찾은 것이다.
가식적인 삶과 순수한 삶 사이에서의 휘청거림. 콜필드의 우울은 그런 아찔하고 까마득한 갈림길 앞에 놓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현기증 아닐까. 지금은 까맣게 잊었지만, 나 역시 해야만 하는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세상은 다 그런 거라며, 다 그렇게 하고 있지 않냐며, 가식적인 삶을 낼름 받아먹지 않았나. 이차장은 학창시절 학교에서, 군대에서, 지금 직장에서 겪었던 수많은 양심적 갈등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은 분명했지만, 마치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전혀 모르는 사람인 척 발만 동동거렸던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누군가 든든하게 잡아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잘못된 길을 골라 그대로 내달리다간 천길 절벽 아래로 추락할 수밖에 없던 나를 누군가 덥석 들어 올려 옳은 길 위에 안전하게 옮겨주었다면,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이런 이차장의 후회와 바람을 들은 것인지 콜필드는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싶어?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말해 줄까?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파수꾼은 뭔가를 지키는 사람이다. 콜필드는 무엇을 지키고 싶은 걸까? 꼬마로 상징되는 삶의 순수성 아닐까. 삶의 진정성이 아득한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콜필드는 허상과 실제가 갈라지는 지점에 혼자 서 있는 것이라고 이차장은 생각했다.
콜필드에겐 동생의 죽음 말고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있다. 그것은 제임스 캐슬이라는 친구의 죽음이다. 제임스는 몸집도 작고, 연약했다. 손목이 연필 굵기 정도였다고 기억될 정도로 체격이 왜소한 아이였다. 하지만 제임스는 자신이 한 말을 가볍게 취소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어느 날, 치사한 놈들 여럿이 문을 걸어 잠근 채 제임스를 위협하고 집단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제임스는 끝까지 자신이 한 말을 취소하지 않았다. 결국 제임스는 자신의 말을 취소하지 않은 채, 그대로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제임스도 앨리와 마찬가지로 진실된 삶에 대한 감수성이 남달랐던 것이다. 콜필드는 이런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시야를 가리는 키 큰 호밀들 사이에서 길을 잃긴 쉬운 일이다. 이런 호밀밭에서 천진난만하게 뛰놀던 아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어느 순간, 평화롭던 웃음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잔인한 비명만 길게 메아리쳐 울리는 곳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그는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뛰어놀던지 그것에 대해선 간섭하고 싶지 않다. 섣불리 누군가의 손을 잡아끌면서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며 심각하게 가르칠 생각도 없었다. 다만 콜필드는 호밀밭의 끝자락에 아무 말 없이 서 있고 싶었다. 그 누구라도 뜻하지 않게 삶에서 추락하지 않도록 그는 파수꾼이 되고 싶었다.
이제 이차장은 자신이 왜 이토록 우울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가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진실한 삶에 대한 열정이었다. 순수한 자기 존재에 대한 소망이었다. 15년 차 직장인인 이차장에게 그런 건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진실과 순수는 회사라는 기계 속에서 닳고 닳은 이차장에겐 차마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단어가 된 지 오래였다. 저런 손발 오그라드는 말 따윈 자기 같은 사람에겐 처음부터 없었다고 이차장은 믿고 싶은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차장은 책을 통해 어렵게 다시 만난 진실과 순수를 또다시 허투루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진실과 순수, 이 단어들은 어쩌면 우리가 기계와 다르다는 결정적인 선언 아닐까. 모든 것들이 변해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인간의 의미.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불변의 가치들. 이 차장은 그동안 그런 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승진과 더 많은 연봉에 목매달아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머리가 쭈뼛 섰다.
승진 못 했다고, 평가가 불공평하다고, 세상 참 더럽다고 절망할 일이 아니다. 정작 내가 절망해야 하는 것은 내 안에서 진실과 순수와 같은 말들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이차장은 자신의 우울감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우울감은 단순히 승진을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건 진짜 이유를 감추는 표면적 이유에 불과했다. 진짜 이유를 모른다면 비록 승진을 했더라도 언제 또다시 우울감에 휩싸여 삶을 비관했을지 모른다. 퇴직 때까지 벌 수 있는 돈을 계산하다 부르르 떨렸던 자신을 떠올리며 이차장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생각해보면, 나는 속으로 삼켰던 생각들을 누군가는 용감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회사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던 직원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매정하게도 내부고발자라고 부르지만, 그들의 주장은 하나같이 옳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제기한 문제들은 두고두고 참고 삼켜왔지만, 자신도 모르게 올라오는 기침 같은 것들이었다. 수백 번 곱씹고 곱씹다 용기를 내 가까스로 드러냈던 문제들. 그들은 적어도 이차장 자신보단 삶의 진실과 순수에 가까웠다. 아무 생각 없이 그들에게 했던 비아냥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그 많은 회사 짠밥을 어디로 먹은 거야? 알만한 사람들이 더 한다니까. 이차장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차장은 세상 다 그런 거라며 타협의 단물을 빨다가, 자기가 원할 때 승진 못 했다고 우울해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딱 그 꼴에 맞는 현실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콜필드처럼 자신에게도 진실된 삶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지 않은지 이차장은 조용히 자기 내면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우울한 진짜 이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진실과 순수를 잃어버렸기 때문일 수 있다. 우울감은 지금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 아닐까. 우울감은 깜빡이는 노란색 신호등처럼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잘 살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가속 페달을 더 힘껏 밟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옆자리에서 ‘이차장, 지금도 참 잘하고 있어’, ‘이차장,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야’, ‘이차장,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에 이 차장은 눈물을 왈칵 쏟았다.
언제까지 자기 자신에게 독설만 뿜어낼 것인가, 언제까지 내 삶을 무단 침입한 사람들을 원망만 할 것인가. 내 삶도 콜필드의 소망처럼 누군가를 지키고 보호해주는 것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바람은 아예 없어진 것이 아니라, 키 큰 욕망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순수한 자기 존재에 대한 소망과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돕는 사람. 언젠가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열정이 있었는데.
이차장은 대학 시절 난민을 돕는 UN단체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이차장이 맡은 일은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난민구호단체의 활동을 알리고, 정기후원금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 수줍음 많던 이차장은 난민촌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모든 걸 내려놓았다. 큰 사명감이 있으니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얇은 여름옷만 입고 잔인한 겨울과 싸우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없던 용기까지 생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뜻한 패팅 주머니에서 손조차 빼지 않았다. 그래도 몇몇 분들의 관심과 후원으로 작지 않은 보람도 느꼈다. 난민촌 아이들의 머리와 손을 따뜻하게 해 줄 털모자와 털장갑을 보내는 날에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차장은 그때 자신이 호밀밭의 파수꾼이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뒷표지를 완전히 덮기 직전, 번개처럼 이 차장에게 떠오른 궁금증이 하나 있었다. 도대체 센트럴 파크 남쪽 연못에 있는 오리는 겨울엔 어떻게 되는 걸까? 따뜻한 봄에 우아하게 헤엄치던 오리들. 겨울에 연못이 꽁꽁 얼면 오리들도 꼼짝없이 죽는 걸까? 콜필드는 이 오리들 걱정을 여러 번 했다. 왜 그랬을까?
콜필드는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을 좋아한다. 어릴 적 견학 수업 때 수없이 방문했던 박물관에서 그가 가장 좋아했던 건 전혀 움직이지 않고 항상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들이었다. 10만 번 보더라도 에스키모는 여전히 물고기 두 마리를 낚은 채 그대로 있을 것이고, 새는 여전히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을 것이라며, 콜필드는 박제된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그가 회전목마를 좋아하는 이유도 언제나 똑같은 음악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콜필드가 좋아하는 오리들은 겨울철에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에겐 입었던 옷이 바뀌고, 홍역 탓에 짝꿍이 바뀐 것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변화다. 심지어 길가 웅덩이에 떠 있는 기름 무지개를 보고도 그것은 뭔가 달라지고 있는 거라고 콜필드는 생각한다. 그러니 계절이 바뀌면서 연못이 얼고, 그 위에 살던 오리들이 사라진 것은 그에게 얼마나 큰 변화인가. 이렇게 그가 변화에 민감한 것은 변화에 따라 뭔가 적절하게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아직 여린 소년의 마음을 지닌 콜필드는 겨울이라는 죽음 같은 변화를 약하디 약한 오리들이 어떻게 이겨내고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누가 트럭을 몰고 와서 싣고 가버리는 건 아닐까? 아니면 따뜻한 남쪽 나라까지 자기 힘으로 날아가 버리는 걸까?
이차장이 보기에 오리들이 먹이를 찾아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가는 건 자연의 섭리다. 그렇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변화에 맞서야 한다. 콜필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변화의 순간마다 콜필드는 속수무책으로 자기 자신을 내동댕이쳐 왔다. 동생의 죽음, 친구의 자살. 그때마다 반복되었던 낙제와 퇴학 그리고 이제 4번째 퇴학을 당한 콜필드. 그는 겨울철 오리들로부터 뭔가 배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걸 눈으로 확인하고 싶진 않았을까.
이 차장은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데워지는 것도 동시에 느꼈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시작이 좋은 것도, 끝이 나쁜 것도 아니다. 시작과 끝이 어우러져 전체를 이룰 뿐이다. 해가 뜨기만 하고 지지 않는다면 지구는 타버릴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기만 하고 죽지 않으면 그런 비극은 또 없을 것이다. 세상은 음과 양이 조화롭게 만든 하나의 작품인데, 한 줌 재에 불과한 인간이 세상보고 자기에게 맞춰 돌아가라고 하면 할수록 지치고 우울할 것이다. 이차장도 이제 퇴사를 생각해야 할 나이다. 멀지 않아 늙을 것이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런 피할 수 없는 변화를 차근차근 준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회사생활도 즐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차장은 다시 봉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불우한 아이들을 경제적으로 돕거나, 작은 모임을 통해 정기적으로 공부를 가르치는 일 등을 생각해봤다.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없지만 가슴이 꽉 차올랐다. 이런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생각났다. 갑자기 온다 간다 말도 없이 퇴사했던 선배들의 얼굴이 자동 재생되었다. 이건 무슨 심리지? 전화라도 걸어볼까? 이 차장은 잠깐 머뭇거렸다. 콜필드는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고” 했는데, 이차장은 함께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자고 선배들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그 일을 통해 자기 안에 있던 진실과 순수를 되찾는 일의 첫걸음을 떼기로 했다.
이차장은 이번 독서를 통해서도 자신이 한 뼘 더 성장했다고 느꼈다. 잊고 있던 삶의 기초를 고대 유적지처럼 다시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먼지 자욱한 보물들을 붓으로 살살 털어내고 햇빛 아래 드러내는 경이로운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더디더라도 튼실하게 자라다 보면 때가 차고, 때가 차면 날아가야 할 곳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바로 그때, 이차장의 머리 위에 철새들의 비행이 승리의 상징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