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번째 책, 우스이 요시토 원작 만화영화 『짱구는 못 말려』
고부장은 얼마 전 둘째 아들과 심하게 다퉜다. 고2라는 녀석이 공부하는 시간보다 유튜브 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본인은 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방문을 열어보면 대부분 침대 위에 누워있다. 침대에서 하는 일은 둘 중 하나. 자거나 휴대폰 시청. 웬만하면 잔소리를 안 한다고 자부하던 고부장도 그날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버럭 짜증과 분노의 화염 방사기를 뿜었다. 그것도 자기 오른손이 아들의 머리를 강타한 직후였다.
"야!!! 이놈의 새끼!!! 초등학교 2학년도 너보단 많이 공부하겠다. 도대체 대학에 갈 거야 말 거야!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야? 너를 보고 있으면 억장이 무너진다. 내 인생이 한심하고, 서글퍼져!!!"
"아빠, 인생 한심한 게 제 탓이에요? 대학은 가서 뭐하게요? 아빤 뉴스도 안 보세요? 좋은 대학 나와봐야 취직도 못하고 다들 편의점 알바 자리도 못 구해 난리다잖아요. 저는 대학 안 가요. 그 돈이라도 아끼세요. 저는 그냥 알바 하면서 살 거예요. 그리고 머리를 때리긴 왜 때려요? 저도 내년이면 성인이에요. 머리 좀 때리지 마세요, 정말 짜증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막내다. 유달리 몸이 크고 잘 먹었다. 이젠 집에서 키가 제일 크다. 운동을 좋아해 주짓수, 복싱, 검도 모두 유단자다. 고부장은 자기보다 키도 크고 몸도 좋은 녀석이 벌떡 일어나 씩씩대자 본능적으로 위축됐다. 불꽃 튀는 눈싸움이 벌어졌다. 두 마리 수컷 짐승들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 쏘아 보았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 그러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고부장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른 것이다. 방금 전, 자신의 손이 자신의 억제력보다 빨랐듯이, 지금도 이 애매하고 화끈거리는 액체가 자신의 이성보다 빨랐다.
"그래, 미안하다."
고부장은 그 말만 남기고 막내 방을 나왔다. 문이 닫히는 것처럼 마음도 닫히는 것 같았다. 이제 품 안에 자식이 아닌 것을, 왜 이리도 탁 놓지 못하는 걸까.
코로나 여파로 영업실적이 말이 아니다. 포장전용 신제품을 출시하고, 배달 할인 행사 등 아무리 발버둥 쳐도 외식사업부 매출은 작년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다들 우리 탓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차마 대놓고 그렇게 말을 할 수 없는 분위기.
코로나 탓이니까 너무 기죽지 말라고, 위에서도 다 아신다고, 이제 곧 백신도 나오고 치료제도 나온다고 하니 코로나도 조만간 끝날 거라고, 그러니 힘내자며 회의를 끝냈다. 회의실을 나온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팀원들 휴대폰 알람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알람의 주인공은 어제 확진자가 1,000명을 넘었다는 뉴스 속보였다.
고부장은 뉴스를 자세히 보지 않는다. 지난달 모 신문사에서 터트린 외식사업부 매각 소식 이후 언론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뉴스가 완전히 엉터리만은 아니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3세 경영이 가시화되면서, 외식사업부가 찬밥 신세가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코로나라는 명분까지 얻었느니 기정사실이 된 셈이다. 직원 최고참인 고부장으로선 늘 불안했다. 어제는 일괄 사표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것도 경영본부 동기 입에서 말이다. 고부장은 담당자인 그의 말을 웃어넘길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올 게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집에도, 회사에도 세상 어디에도 내 편은 없다. 막내와 코로나가 동시에 나를 공격해 올 줄 누가 알았으랴. 고부장은 폐암 경고 사진이 선명한 담뱃갑에서 마지막 까치를 꺼내 물었다. 담뱃불을 붙이고 먼 하늘을 무심히 올려 보았다. 담배 연기를 따라 맞은편 정류장에 버스가 정차한다. 버스 옆구리엔 언제나 그렇듯 옥외광고물이 크고 선명하게 걸려 있다.
짱구네...... 짱구??? 짱구는 못 말려 극장판이 개봉하는 모양이다. 짱구 하면 엉덩이춤이고, 엉덩이춤 하면 막내였는데......
고부장은 옥외광고판에 붙은 짱구와 액션 가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문득 짱구 아빠 목소리를 담당했던 성우분이 항암 치료 중 돌아가셨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짱구 아빠’를 검색창에 넣으니, ‘성우 오세홍’, ‘짱구 아빠 이름’, ‘짱구 아빠 명언' 등 연관 검색어가 보인다. 짱구 아빠 명언? 아, 맞다! 그랬다. 아이들 키울 때, 짱구는 못 말려를 보면서, 짱구 아빠 신형만 씨 말씀에 감정 이입되어 아내와 아이들 몰래 울컥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바로 저거다. 내가 일하는 건 가족을 위해서라고! 나도 오직 가족만을 위해 이 한 놈 불사를 것이다! 이런 가상한 아빠의 마음도 모르고 아들 둘은 "씰룩 씰룩"을 연발하면서 엉덩이를 흔들었다. 흔들리는 엉덩이를 보면서 아빠는 행복했다. 덕분에 아빠의 각오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
고부장은 유튜브에서 짱구 아빠 명언을 검색했다. 동영상을 보고 있자니, 방금 내린 커피 같은 진한 추억의 향이 책상을 덮었다. 내친김에 동영상 하단에 깔린 자막을 급하게 받아 적었다.
‘회사에서 일하기, 가족 서비스’
양쪽 모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버지의 어려운 점이지.
아버지라면 누구나 동감 백배할 대사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싶더니 금방 내려왔다.
짱구야 아빠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건
너와 짱아가 태어났을 때다.
재훈아, 정훈아, 이 아빠도 마찬가지다. 너희 둘이 나에게 아빠라는 벅찬 이름을 줬다. 그래, 그 이름이 가슴 벅찰 때가 있었다.
짱구 너도 누군가 보호해 줘서 이렇게 클 수 있었던 거야. 아빠도 그렇고.
자기 혼자 힘으로 컸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그만큼 커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고부장은 이 장면을 캡처해 막내에게 보내야겠다고 신이 났다가, 0.1초도 안 돼 그만 두었다. 누가 누굴 나무랄 처지가 아니었다. 고부장에게도 아버지가 계셨다. 아버지를 생각하자니 고부장도 금세 죄인이 되었다. 그렇게 호되게 종아리를 때리신 날, 내가 잠든 척하고 있다는 걸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아버지는 뻘겋게 올라온 살 위에 정성껏 약을 발라 주셨다. 이럴 거면 때리긴 왜 때리냐면서 서러운 마음에 울음이 한 움큼 올라왔지만, 어금니 꽉 물고 삼켰던 기억이 났다. 자기 혼자 힘으로 컸다고 착각하는 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가진 이기적 유전자의 부스러기 같은 게 아닐까. 막내 얼굴과 자기 얼굴이 무척 닮아 보였다.
우린 세계를 지키는 히어로 따위가 아니야. 아이들에게 미래를 살아가게 해주고 싶은 아버지다.
아버지. 고부장은 이제 막내와의 일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 갑자기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엄동설한 차가운 땅에 홀로 누워 계실 아버지의 육신이 보이는 듯했다. 이 와중에 수의 값이 비싸다며 싸웠던 자기 모습은 왜 또 이렇게 또렷이 기억나는지 모르겠다. 반면, 그 흔한 변명거리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일할 사람은 있어도 대신할 아빠는 없어.
아버진 평생 택시를 모셨다. 교통가족이라며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러다가도 사고라도 나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셨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남이 잘못하면 다 꽝 되는 게 운전이라며 아들에게도 안전운전을 신신당부하셨던 아버지. 아버지를 대신할 분은 없었다. 누군가의 빈자리는 빈자리가 생기고 나서야 깨닫는다던가. 운전대를 놓으신 후, 끼니마다 소주를 드렸던 아버지를 그땐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고부장이 그렇게 되었다. 살아계셔서 지금 내 모습을 보신다면 뭐라 하셨을까. 몸에도 안 좋은 술을 왜 그렇게 마시냐고 걱정하셨겠지. 그때 내가 아버지께, 그리고 지금 아들 녀석들이 내게 하는 것처럼.
읽는 순간 몸이 굳었다. 메두사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꿈이라는 단어는 늘 사람을 이렇게 만든다. 차가운 물로 하는 한겨울 세안 같다고나 할까. 꿈은 따뜻한 외모와는 달리, 꿈꾼 사람을 알싸하게 만드는 차가운 정신을 가졌다. 그렇다고 꿈이 그 사람과 멀리 떨어진 별나라에 숨는 것도 아니다. 꿈은 자신을 품은 사람과 함께 묵묵하게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응급실에서 꿈을 잃어버리곤 한다. 꿈이 바로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하얗게 망각한다. 갑자기 올라버린 전세금이나 거금의 병원비 마련은 그야말로 응급상황이다. 고부장도 응급호출을 여러 번 받았다. 그때마다 그는 아버지, 가장, 남편, 장남으로서 이 문제를 꼭 해결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불타올랐다. 절대 허둥대면 안 된다. 웃으며 해치운다.
응급호출은 기가 막힌 타이밍에 울렸다. 몇 년을 갖갖으로 모은 세계여행 적금은 전세금 인상분으로 쓰였다. 집은 없어선 안 될 것이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세계여행을 다녀왔다가 돌아갈 집이 없어지면 큰일 아닌가. 어쩌다 짭짤한 수입이 생기면 병원이 제 것인 양 가져갔다. 짭짤한 맛은 쓰디쓰게 변했지만, 그래도 갑작스런 병원비를 미리 챙겨주셔서 아들 노릇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늘에 감사했다. 벼르고 별렀던 MBA 진학은 벼르기만 하다가 결국 못했다. 아이들 학원비 때문에 나도 공부하고 싶단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세월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았다.
그런데 짱구 아빠는 도망간 것은 꿈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 자신이라고 지금 고부장에게 말하고 있다. 인생에서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없는 날이 있던가. 앞으로도 그런 날은 결코 없을 것이다. 내가 도망가지 않고 계속 꿈꿨다면, 분명 어떤 모양새로든 그 꿈을 맛봤을 거다. 꿈이 삶이 될 때까지, 삶이 꿈이 될 때까지, 꿈과 삶이 하나가 될 때까지, 꿈은 나서거나 도망가는 법이 없다. 팔이 땅에 닿을 정도로 지쳐 그 사람이 찾아오면, 그동안의 삶을 전혀 몰랐다는 듯 꿈은 해맑게 웃는다. 그리고 모든 걸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마치 성직자처럼 말한다. 기다리고 있었다, 늦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자. 나는 절대 너를 배신하지 않는다.
꿈은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 음지에서 계속 노력하는 한,
그 누구도 상처입히는 일은 없어.
꿈은 그 누구도 상처입히지 않는다. 꿈꾼 사람과 그 가족은 행복하다. 고부장 가슴에 온기가 돌았다. 영혼의 낡은 보일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막 물이 보충된 것처럼 쿨럭쿨럭 소리가 났지만 분명히 움직였다. 게다가 살짝 설레기까지 했다. 짱구 아빠 말대로 ”내가 과연 이걸 할 수 있을까, 없을까?“는 걱정할 게 아니다. 내가 결정할 것은 이것뿐이다. ”내가 한다, 안 한다.“
언젠가 사라질 것들을 바라서는 안 돼. 사라질 것들을 바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라고.
고부장은 자신이 그동안 사라질 것들을 위해 참 오래 애써왔다고 느꼈다. 왜 사는지, 나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지 물을 때마다 마땅한 대답이 없었던 고부장은 ”함께 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짱구 아빠의 말씀에 대단히 만족했다. 4대 성인 말씀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아 보였다.
언젠가 아내가 동영상 하나를 추천했다. 온 가족이 낡은 버스를 타고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하는 내용이었다. 방송 PD가 어떻게 이런 용감한 결정을 하게 되었냐고 주인공 아버지에게 질문했다. 운전대를 잡은 아버지는 담담하게 답했다.
”부장님, 부장님, 이렇게 불리는 게 어느 날 갑자기 서글펐어요. 아이들에게 아빠라고 기억되고 싶었어요.“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을 보면서 고부장도 따라 울었다. 왜 눈물이 났는지 그땐 몰랐다. 지금은 알 것 같다. 가족은 함께 놀기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존재 목적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부모는 돈에, 아이들은 공부에 매몰된 삶. 하늘의 뜻을 거슬러 땅만 보고 사는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저 가족들이 먼저 세상을 향해 나선 것이다. 매몰되었던 사람에게 구조대원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으니, 어찌 감격의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짱구 아빠가 악당과 한 아래 대화가 왜 명대사로 분류되는지 알 것 같았다.
(짱구 아빠) 난 가족들과 미래를 살아갈 거야!
(악당) 시시한 인생이군
(짱구 아빠) 내 인생은 시시하지 않아! 가족이 있는 기쁨을 당신에게도 나눠주고 싶을 정도라고!
『짱구는 못말려』는 만화다. 만화의 사명 중 하나는 웃겨야 한다는 것이다. 짱구 아빠의 명대사 중 아내와 관련된 것이 있다. 이건 분명 만화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즉 웃자고 하는 말이므로 아내도 이해할 것이라고 고부장은 생각했다. 그래서 겁도 없이 아래 내용을 아내에게 읽어주었다.
아내를 고르는 것은 넥타이를 고르는 것과 매우 비슷해.
고를 때는 멋져 보이지만, 집에 가서 목에 졸라보면 실망하지.
고부장은 오래간만에 실컷 웃었다. 옆에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건 실수였다. 너무 오래 웃은 건 큰 실수였고, 너무 크게 웃은 건 더 큰 실수였다.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는 건 치졸하다. 아내도 나와 같은 생각이리라 믿은 건 가장 큰 실수였다. 아내가 보기에 내 행동은 죽자고 덤비는 것과 다름없었다. 사랑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아내를 넥타이와 비교할 마음이 고부장에겐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 사실을 아내 또한 잘 알고 있으리라 믿은 건 그야말로 치명적인 실수였다. 지금도 넥타이를 맬 때마다 고부장은 거울에 얼핏 비친 아내의 모습에 움찔한다. 짱구 아빠가 아내와 넥타이를 비교한 이유를, 고부장은 온몸으로 절절히 느끼고 있다.
짱구 아빠는 결혼과 결혼생활도 침착하게 구별해 냈다. 그는 ”결혼이라는 것은 훌륭한 것이지만 결혼생활이라는 관습을 갖다 붙이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부장도 이에 격하게 공감했다. 결혼생활은 이러 저러해야만 한다는 관습이 오히려 결혼의 생명력을 박제해 버렸다. 박제된 채, 남에게 보이기 위한 진열장 부부가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고부장은 결혼의 훌륭함이 빚어낸 것들을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 빛나는 건, 역시 두 아이였다. 결혼이 자기에게 준 가장 큰 의미는 나의 자리를 공간이 아닌 사람 마음에 마련해 준 것이다. 광활한 이 우주 안에 나를 닮은 사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건 정말 황홀한 일이다. 짱구 아빠는 남에게 호감을 사는 비결을 아내에게 귀띔한다.
당신이 내일 만날 사람 중 4분의 3은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 어디 없나 하고 필사적으로 찾고 있어. 이 바람을 이루어주는 것이 남의 호의를 얻는 비결이야.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내 생각을 받아준다는 건, 나의 뜻이 그에게 닿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의 말이 자리잡고 나의 뜻이 뿌리내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다리 뻗고 잘 집이 생긴 것과 같다. 그 사람 속에서 우리는 먹고 자고 쉰다. 반대로, 자식이건 그 누구건 내 말 안 듣는 사람만큼 미운 사람도 없다. 그들 앞에서 난 떠돌이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이별의 충분 조건이다. 짱구 아빠는 이걸 정확히 알았다. 남의 바람을 이루어주라. 그의 의견에 공감하라. 그러면 호의를 얻을 것이다. 약삭빠르다는 느낌보단, 오래된 회사생활을 통해 쌓인 인간에 대한 이해가 느껴졌다. 오래된 회사원은 인간 이해에 있어 심리학 박사와 별차이가 없다.
사표를 제출하고 난 후, 고부장은 잠시 눈을 감았다. 23년하고도 8개월의 세월이 소복하게 쌓인 책상 위에 걸터앉은 채,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회사만 아니라면 그 어느 곳이라도 좋을 것 같던 20대부터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지금까지, 회사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그건 사실이다. 변한 게 있다면, 그건 언제나 자기 자신이었다. 낙엽이 바람에 이끌려 이리저리 흩어지듯, 마음이 욕심에 이끌려 이리저리 흩어졌을 뿐이다. 변덕 심한 마음 때문에 애꿎은 동료들만 그동안 고생 많았구나 싶었다.
사표가 수리된다면 뭘 해야 할까? 가족들과 상의해서 긴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동안 애써 일한 이유 중에는 가족과 즐겁게 노는 것도 포함되어 있기도 하니까 말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오지랖 넓게도 고참들이 우르르 퇴사하면 회사가 잘 돌아갈지 걱정됐다. 없어지는 본부와 새로 생길 본부 사이에서 아끼는 후배들이 갈등하지 않고 잘 적응해 주길 바라는 마음은 덤으로 따라 나왔다. 고부장은 갑자기 껄껄 웃었다. 짱구 아빠 명대사 중 가장 마지막에 적은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 대화를 다시 읽고 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볍고 단순해졌다. 더 이상한 일은 눈으로 읽는데, 반가운 성우들의 목소리가 음성 지원된다는 점이다.
(짱구 아빠) 그나저나 회사 일은 어떻게 됐을까?
(짱구) 아빠 걱정만큼 빈자리가 크진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