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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barista Oct 20. 2021

나답게 사는 건 왜 그렇게 어려운가

– 12번째 책, 헤르만 헤세 『데미안』

벌레는 의미를 묻지 않는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회사에서 부품처럼 일하다 보면 아주 가끔 이런 질문이 목에 딱 걸릴 때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처음 몇 번은 실신 직전까지 가는 술자리, 싸구려 동남아 여행 정도면 딱 부러진 대답 없이도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질문들은 따끔거리고 켕긴다. 원래 이런 질문에는 답도 없고 괜히 사람만 우울하게 만든다며 애써 외면할수록, 질문들은 더 뾰족하게 마음을 찔렀다. 아무리 헛기침을 하고, 밥 한 숟가락을 꿀꺽 삼켜도, 급기야 손가락을 목구멍 깊이 쑤셔 넣어 구역질까지 해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던 못된 생선뼈처럼 말이다.    

  

차대리는 2017년 7월 1일자 일기를 읽었다. 차대리의 입사일이 2014년 7월 1일이니까,  입사 만 3년이 지난 첫 날 일기였다.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거늘, 차대리는 3년이 지났건만 풍월은 고사하고, 사표만 읊고 있다. 사실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와 같은 궁극의 질문들에는 답이 없다. ‘바로, 이거야!’ 깨달음이 잠깐 왔다가 어찌어찌 넘어갔다 싶으면 어김없이 다시 찾아왔다. 일의 의미를 찾고 가족과 이웃을 떠올리며 에두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괜히 마음만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런 질문들은 내가 창조했지만 내 손으로 없앨 순 없는 피조물 같았다. 답답하고 불안했다.     


차대리는 내친 김에 2019년 7월 1일자 일기도 찾아 읽었다. 입사 5년이 지났으니 내용이 좀 변하지 않았을까 해서였다. 차라리 벌레였다면! 내 존재의 의미 따윈 찾지 않을 텐데. 아무 생각 없이 음식 부스러기를 찾아 많은 발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살았을 텐데. 그 성실에 감탄하며 스스로 대견해 할 터인데, 왜 인간으로 태어나 자꾸 나 자신에 대해 질문하고, 그 의미를 찾도록 추궁 받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처럼 벌레로 죽긴 싫다. 가족들마저 등 돌리고, 빗자루에 쓸려 버려진 존재가 된다면 인생 너무 허무하지 않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질문이라면 고통스럽지만 이 질문들과 씨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씨름은 질퍽하고 고통스러워지고 있다.     


한심했다. 입사 3년, 5년이 지나도 한결같은 내용이 종이를 낭비하고 있었다. 하긴, 오늘 2022년 3월 3일 일기를 쓴다고 해도 다르게 쓸 자신이 차대리에겐 없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반반 섞은 듯한 표정으로 차대리는 오늘도 출근 버스에 올라탔다. 운수좋은 날이었다. 빈자리가 있었다. 죽은 사람의 표정은 사라지고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냅다 몸을 날려 자리를 차지했으나, 앉자마자 옆에 있던 학생에게 굽신거리며 사과해야 했다. 차대리의 핸드백이 퍽 소리를 내며 학생의 뺨을 갈긴 것이다. “어떻게요, 정말 미안합니다. 많이 아프지요?” 차대리는 허둥지둥 학생의 얼굴을 살폈다. 원인은 달랐으나, 학생과 차대리의 얼굴 모두 벌겋게 달아올랐다. 차대리는 바닥에 떨어진 책에서 먼지를 털어내며 학생에게 건네주었다. 책 이름은 『데미안』이었다.     


다시 이승 사람과 저승 사람을 반반 섞은 원래 표정으로 돌아온 차대리는 회사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학생의 벌건 뺨이 떠오르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중생이라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왜 그렇게 덤벙될까, 좀 차분하게 행동하지, 32살이나 먹고 아침부터 이게 왠 망신이람.’ 아무리 찾아봐도 자신에게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었다. 책장에 엎드려 신세 비관을 하다, 학생에게 주워 준 『데미안』이 떠올랐다. 데미안이라, 나도 언젠가 읽었던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이었더라? 퇴근 후 차대리는 곧장 동네 서점으로 가 선 채로 『데미안』을 읽기 시작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난 진정,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 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인용구)    

 

나답게 사는 건 나에게만 어려운 것이 아닌가보다.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의 자서전적 소설로 알려져 있다. 문학과 철학 그리고 불교에 조예가 깊었던 헤세. 그 역시 나답게 산다는 것은 그토록 어렵다고 한다. 차대리는 왠지 다행처럼 느껴졌다.     


저마다 삶은 자아를 향해 가는 길이며, 그 길을 추구해 가는 것이다. (중략) 지금껏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이 없었음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인간은 왜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쓰는 걸까? 그 많은 사람들이 실패했다면 어쩌면 진정한 자아 따윈 없는 것이 아닐까? 결승선 없는 달리기는 언제쯤 멈추는 것일까?       

헤르만 헤세는 자기 자신이 자아를 향해 달리는 방식은 ‘쓰기’라고 했다. 그는 “내 자신의 이야기이자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자아를 향해 달렸다고 썼다. 그는 “현실적인 한 인간의 이야기가 모든 인간의 이야기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라고도 썼다. 그에 따르면 사람이란 존재는 그저 자기 자신일 뿐만 아니라, 세계가 서로 만나는 교차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별을 바라보거나 책을 들춰보며 찾지 않고, 내 몸 안의 피가 내는 소리의 메시지를 듣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내 피가 만드는 소리의 메시지! 내 생명이 세상과 부딪히며 만드는 그 소리는 과연 어떤 메시지를 품고 있는가. 좀 더 돈을 벌어라? 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라?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발밑에 두어라?     

『데미안』은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삶의 의미는 자기 자신만이 판단할 수 있다.”고 하면서 밝음과 어둠이라는 분리된 두 세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두 세계     


싱클레어는 두 세계 앞에 서 있다. 여기서 말하는 두 세계는 밝음과 어둠의 세계를 말한다. 밝음의 세계는 아버지의 세계다. 이 세계는 빛, 깨끗함, 친절함, 성경, 찬송가, 크리스마스 파티로 아름답고 거룩하게 채색되어 있다. 제대로 된 성공한 인생을 살려면 이 세계를 벗어나면 안 된다. 반면, 어둠의 세계는 하녀와 직공의 세계다. 이 세계는 유령, 도살장, 감옥, 주정뱅이, 강도,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여기에 있다간 인생을 그야말로 제대로 망치게 된다. 하루속히 벗어나야만 한다.  

   

싱클레어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밝음과 어둠이라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세계가 겹쳐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거룩한 찬송가를 부르던 하녀는 정육점 아줌마와 싸울 땐 악마 소리를 낸다. 정직해야만 하는 자기 자신 역시 또래들 앞에서 똥 폼 한 번 잡으려고 영웅담을 꾸며댔다가 계속 돈을 뜯기는 앵벌이 신세가 되고 만다. 그는 돈을 상납하기 위해 두려움 속에서 도둑질과 거짓말을 반복하고 만다. 밝음과 어둠의 경계가 싱클레어의 마음에서 뒤엉켜 버렸다. 혹시 그런 경계 따윈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닐까. 지금껏 나는 감쪽같이 속아온 건 아닐까.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이러한 경험들은 한 소년의 부드러운 가슴에 칼질을 해 댄다.      

누구도 감지하지 못한 이런 체험으로 우리들의 운명에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이 그어져 간다. 그런 칼질과 균열은 점점 늘어나고 아물고 잊혀 지지만, 우리 마음속 가장 비밀스러운 암실에서는 여전히 살아남아 계속 피를 흘린다.     


밥값을 해라! 이익을 올려라! 최고 실적을 만들자! 회사의 밝은 세계는 신성한 돈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다움, 동료애, 사회적 책임은 어둠의 세계에 속한 것처럼 쉬쉬했다. 차대리는 어떻게든 회사의 밝은 세계에 속하고 싶었다. 쉽진 않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며 꾸역꾸역 꾸려왔다. 다들 그렇게 산다, 별나게 굴지 말라, 자신에게 면박을 주기도 했다. 양심에 찔려 쩔쩔매던 일도 이젠 제법 무덤덤하게 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양심 때문에 쩔쩔매던 일은 여전히 쩔쩔매는 게 맞지 않은가. 내 양심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까지 척척 해낸다면 그 곱던 천성이 뒤틀려진 것 아닌가. 인간의 존엄성, 양심의 자유 따윈 개나 줘버리라는 눈치 속에서 먹은 회사 짠밥. 차대리는 이렇게 먹은 밥알들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마음 여기저기에 박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 유리 조각에 찔려 내 안에 있는 데미안은 지금도 계속 피를 흘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아선택권     


회사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매뉴얼대로 움직인다. 따라서 나만의 개성이란 시스템의 고장 원인이 된다. 매뉴얼은 나를 1도 생각하지 않고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팀장의 임무 중 하나는 팀원들의 고유한 개성이 시스템을 망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통제의 기술은 크게 두 가지. 당근과 채찍. 이것들은 모두 하나의 목표를 향해 설계되어 있다. 그 목표는 팀원들이 회사를 두려워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팀장은 당근과 채찍을 통해 팀원들이 자신의 개성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발휘해야 하는지를 자신에게 허락받기를 원한다. 팀원들은 냉탕과 온탕을 오가면서, 때로는 달콤한 냄새에 코를 벌렁거리고, 때로는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자신의 고유한 자아선택권을 팀장에게 시나브로 맡기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 앞에서든지 다른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그런데도 누군가가 두렵다는 건 나를 다스리는 힘을 타인에게 맡겨 버렸기 때문이야.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두려움이다. 개성 있는 사람으로, 나답게 살아도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을까? 혹시 팀장이 나를 말 많고 불평불만만 하는 저성과자로 낙인찍지나 않을까? 그 낙인 때문에 동기들보다 뒤쳐지지 않을까? 후배들에게 추월당하지 않을까? 나 때문에 시스템이 고장 나면 어쩌나? 개성이고 인권이고 나발이고 일단 잘 보이면 좋은 거 아닌가?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좋은 것을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없는 사람은 언제나 두렵다. 두려움은 자신만의 가치를 깎아 먹는다. 나의 가치를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곤, 그를 나의 주인으로 삼고 자발적 노예가 된다. 노예는 주인의 눈치를 본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결정한 것을 최종 평가하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에 굳이 애써 고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에 의해 나는 영웅도, 쓰레기도 될 수 있다. 내가 여기 있어도 좋다는 존재 의미를 주는 단 한 사람. 그 귀한 자리에 나는 다른 사람을 앉혔다. 나의 자아선택권을 팀장에게 위임한 것이다. 차대리는 울고 싶었다.   

  

우리들은 공인된 것과 금지된 것을 각자 자신의 힘으로 찾아야만 해.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우린 우리의 힘으로 찾아야만 한다. 그럴 힘이 없는 사람은 노예가 되어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 이 어려운 걸 나 혼자 할 수 있을까.     

속 편한 회사원이 내 운명이라고? 팀장이 내린 평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지,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가치에 따라 개성 넘치는 삶을 살던지, 그 결정권은 바로 내 마음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에 차대리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다시 열린 그의 눈에 다음 문장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운명과 마음은 하나의 개념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차대리는 이 문장을 기억한다. 이 문장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몇 번이나 공책에 썼더랬다. 나는 왜 이 문장이 마음에 들었을까? 아마 이런 이유가 아닐까.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이 반복되는 답답하고 지루한 내 삶을 상징하는 알. 그걸 깨려고 투쟁한다니 벌써 손맛이 짜릿해 오지 않는가. 약해 빠진 현실 순응형 인간인 내 손에 알을 깰 방망이를 쥐어 주는 문장. 게다가 알을 뚫고 밖으로 나와 창공을 비상하는 새의 얼굴은 어디서 많이 본 것처럼 친숙하다. 아! 저건! 내 얼굴이네! 이런 흐뭇한 상상을 하면서 차대리는 안정을 되찾았다. 이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쏘냐.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그러나 한편, 차대리는 자기 세계를 깨뜨릴 생각이 자신에게 1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저 내가 소유한 세계가 한 뼘이라도 넓어지길 바랄 뿐이다. 밖은 전쟁이다. 폭탄 파편에 튀어 재수 없게 죽을 수도 있다. 이런 불운을 미리 막으려면 내 보호막을 철갑으로 둘러야 할 판이다. 그런데 그걸 깨긴 왜 깨냐? 바보냐? 차대리 마음엔 이런 목소리가 들릴 때가 많았다.     


그러나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세계에는 그동안 경험했던 수많은 실패와 상처의 상징, 빨간 X표시가 차고도 넘친다. 그 선을 넘으면 안 돼, 혼나! 내가 다 해 봤어! 아무 소용없어! 말하지마, 아무도 네 의견 따윈 듣지 않아! 노력하면 그만큼 손해야! 사람 바꿔 쓰는 거 아니거든! 가능성말고 확실성을 가지고 오란 말이야!          


차대리는 알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알은 가능성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알은 흰자와 노른자가 하나로 뭉쳐 생명을 만든다. 알이라는 혼돈스런 질서는 새를 향해 꿈틀거리면서 나아간다. 정해졌으나 실체는 알 수 없는 것, 운명으로부터 부여받은 그 무엇인가를 향해 변화할 뿐이다. 뭔가를 찾아가는 변화의 과정, 그 자체가 이미 나인가? 그래서 그토록 오랫동안 나는 나를 딱 이것이라고 가리킬 수 없었나? 차대리는 점점 뭔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강물처럼 흘러 흘러 어디론가 가고 있는 여정 자체가 나라면, 내가 그동안 꿈꿔왔던 똑 부러진 자아상은 뭐란 말인가. ‘저게 나야! 저 큰 바위 얼굴이 바로 나야! 저렇게 회사에서 잘 나가나고 연봉 많은 사람이 바로 나야! 이게 바로 나란 말이야!’ 이렇게 외치며 가리켰던 자아상은 오히려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방해하는 것들이었단 말인가.   

  

경계 없는 세계인 알. 그 알을 깨트리고 나온 새. 이 새는 경계 없는 하늘로 날아오른다. 예로부터 새는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상징이었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샤먼들은 새의 가면과 깃털로 자신을 꾸밈으로써 바로 자기 자신이 하늘과 땅의 매개자임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새는 나와 세상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 아닐까. 새는 알이었던 나와 하늘이라는 세상을 연결시키려는 지금 여기의 끊임없는 몸부림 아닐까?       


아브락사스는 바로 이 새가 향하는 곳이다. 살짝만 건드려도 깨져버리는 알처럼 약하디 약했던 나. 그 알을 깨고 나온 새는 더 이상 나와 세상을 분리하지 않는다. 나와 세상을 동시에 비행한다. 차대리는 자신을 오랫동안 가둬 왔던 알이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그 무엇이 자신의 날아오름을 막았을까?       


   

미칠 것 같았던 회사생활     


회사는 경계와 제한이 차고 넘친다. 누가 책임질까를 놓고 따져야 하기 때문에 일은 쪼개지고 기능은 분절된다. 쪼개진 일과 분절된 기능을 시스템으로 연결하려 해 보지만, 깨진 도자기를 테이프로 붙인 것처럼 볼썽사납고, 위태롭다.      


시스템에는 사람을 진정 움직이게 만드는 마음이 없다. 매뉴얼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복잡 미묘한 감정을 잡아내지 못한다. 내가 나로 살지 못해 생긴 고랑을 도무지 알아채지 못한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이심전심이니 염화미소니 하는 것들은 시스템  오류로 인식돼 빨간불이 켜진다. 칼같이 따지고 샅샅이 훑지만, 정작 인간적인 것은 하나도 얻어내지 못한다. 그 속에서 우린 반쯤은 기계로 산다.     


차대리는 『데미안』을 읽으면서 회사생활에 지친 내 안의 있는 다른 나를 불렀다.


‘어디 있니? 괜찮은 거지? 아직, 거기 있는 거지? 내가 너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 잔뜩 침울해진 차대리의 눈에 다음 문장이 꽂혔다.     


나는 살기 위해서 내면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 말고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데미안의 충고대로, 차대리는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는 일을 멈췄다. 책에 나오는 비유처럼, 박쥐로 태어났다면 타조가 되려고 애쓰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각자를 위한 진정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뿐이다.”라는 데미안의 말을 차대리는 곱씹고 곱씹었다. 내가 지금 미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는 건 어쩌면 내 안에 있는 데미안을 만나기 위한 때가 가까워졌다는 신호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차대리가 스스로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에 집중하니 삶의 에너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큰일이 생길 때마다, 속사람을 먼저 챙겼다. 속사람은 연봉이나 직급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개성을 온전하게 가꾸고 지켜 내는 일이라고 했다. 나만의 고유성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부여받은 사명이었다. 그 일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유일한 일이다. 그 일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는 길은 불안하다. 그 길에는 아무도 없다. 오직 단 사람, 속사람과 동행할 뿐이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죽음의 비릿한 냄새 때문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이러다 나만 왕따 되는 거 아닌가, 낙오자 되는 거 아닌가 불안이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데미안』의 에바 부인은 이렇게 되묻는다.  

   

돌이켜 자신에게 한번 물어 보세요. 대체 그 길은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그저 어렵기만 했던가? 그러나 역시 아름답지는 않았는가? 당신은 보다 더 아름답고도 쉬운 길을 알고 있나요?     


그렇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나는 나로서밖에 살 수 없다. 내 삶을 내가 버린다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다들 자기 삶도 무거워 휘청거리고 있는 판국에, 스스로 버린 삶을 누가 거두겠는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나는 나의 꿈을 꿔야 한다. 그 무엇도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멈추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꿈을 발견해야 하는 거예요. 발견하고 나면 길은 한층 쉬워지지요. 하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꿈이란 없어요. 또다시 새로운 꿈이 나타나지요. 어떤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 돼요. 

    

차대리는 자신에게 새로운 꿈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꿈은 늘 새로워야 하는 법이다. 차대리는 지난 7년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썼던 일기를 엮어 책으로 내기로 했다. 일기에는 자신이 회사에서 겪었던 수없이 많은 좌절과 그것보다 하나 많은 꿈들이 오롯이 기록되어 있었다. 꿈이 한 번 더 좌절을 이겼던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했던 대로 그동안 자신도 ‘쓰기’를 통해 자아를 향해 달렸던 것이다. 이 생생한 자아선택의 과정을 나와 같은 고민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나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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