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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barista Oct 22. 2021

퇴직한 직원의 본인상에 가는 이유

-13번째 책,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오늘 갈 거야?


“네. 가 봐야지요.”

“같이 가자. 다들, 퇴직한 직원 본인상에 누가 가냐면서 안 간다고 하네.”


전부장님이 돌아가셨다. 내가 이력서를 냈을 때, 전부장님은 인사과장이셨다. 부장님은 손글씨로 쓴 이력서를 정말 오래간만에 본다며 한참을 읽으셨단다. 나는 속으로 전략이 성공했구나 싶어 휘파람을 불었다. 입사 후에 알고 보니, 전부장님이 나를 적극적으로 미셨다고 한다. 당시 전부장님은 회사의 에이스였다. 부장님 의견은 대부분 반영되었다. 그러니까 사실상 부장님이 나를 뽑아주신 셈이다.


나야 이런 인연이 있어 마지막 모습을 배웅하고 싶었지만, 다른 직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회사의 에이스는 시기 질투를 많이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적이 많다는 뜻이다. 때마침 2008년 금융위기 때 구조조정이 단행되었고, 부장님은 그 일의 팀장을 맡아 궂은일을 도맡았다.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이었다. 전부장님은 자의반 타의반 칼잡이가 되었다. 구조조정 대상과 평소 전부장님과 부딪혔던 경쟁자들이 겹치면서 일이 커졌다. 누가 어떤 잘못을 구체적으로 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억측과 음모가 회사를 까맣게 덮었다.


모든 일은 지나간다. 구조조정도 그렇게 끝났다. 살아남은 자들은 화려하고 요란한 잔치를 벌였다. 예로부터 칼잡이는 쓰고 버리는 법이다. 전부장님도 잔치에 초대받지 못했다. 구조조정 직후 바로 퇴사했다. 소문에 의하면 대표가 전부장의 개인 욕심 때문에 구조조정에 문제가 많았고, 시간이 지체되었다며 책임을 물었다고 한다. 제2의 창업 기념식 때 대표는 이렇게 인사말을 했다. 구조조정이 성공적으로 끝나 회사의 미래가 밝아졌다고. 무엇이 진실인지 아무도 모른다.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전부장님은 한동안 회사에 모습을 드러내셨다. 다시는 오지 않겠노라 살기 등등 했던 다짐을 하얗게 잊으신 모양이다. 1층 로비에서 보안 요원에게 제지당해 사무실까진 들어오지 못하셨지만, 거의 매일 몇 달을 그렇게 하셨다.     


알고 보니, 전부장님은 배회성 치매를 앓고 계셨다. 배회성 치매는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치매라고 한다. 아무 데나 발길 닿는 곳으로 가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남은 조각 기억들이 마치 들것처럼 환자를 실어 나르는 경우도 있다는데, 부장님은 그곳이 회사였다. 본인은 처음 보는 것처럼 로비를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떨었다. 로비 인테리어 공사는 전부장님이 몇 개월 동안 휴일도 없이 꼼꼼히 챙겼던 업무였다.     


직원들이 쑥덕댔다. 동정의 말과 비아냥의 말 중 뒷말이 10배 정도 많았다. 나라도 인사를 드려야지 싶어 용기를 냈다. 점심 먹으러 가던 중 우연히 만난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부장님은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셨다.


영정 속 부장님 얼굴은 평온했다. 혹시 몰라 미리 찍어 놓은 사진 같았다. 얼굴에 살이 있어 눈은 작고 턱 선은 완만했다. 날 알아보지 못하셨던 그날 부장님 얼굴은 너무 야위어서 나도 모르게 울컥할 정도였는데, 영정 사진이 다행이란 생각이 잠깐 스쳤다. 지금 다행이란 단어가 어울리는지 헷갈렸다.   

   

상주인 아들은 회사에서 누가 올 줄 몰랐던 모양이다.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회사 상조회에서 보낸 조화를 한쪽으로 놓고 나서 상주로부터 돌아가시기 전 부장님 생활을 짧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부장님은 배회성 치매로 여기저기 다니셨고,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셨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요양병원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1년쯤 계셨다. 돌아가시기 6개월 전부터 대소변도 혼자 볼 수 없었다. 아들과 한참 동안 즐겁게 대화하다, 간호사가 누구인 줄 아세요라고 물으면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셨단다. 극심한 두통으로 움켜 잡은 자신의 머리를 벽에 쳐 박기도 하셨다. 직접적인 사인은 뇌종양. 늘 머리가 아프다며 잔뜩 인상을 쓰셨던 부장님 모습이 선하다.


‘영정 속 사진의 주인공은 언제든지 나로 바뀔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장례식에서 돌아온 뒤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었다. 밥맛도 살맛도 뚝 떨어졌다. 한 사람이 태어나, 평생 일하다가 저렇게 쓸쓸하게 혼자 죽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허망했다. 나도 평생 회사원으로 이렇게 갇혀 살다가 훌쩍 떠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게다가 20년 넘게 일했던 회사에서 버림받고 죽기 전까지 다신 오지 않겠다며 떠났는데, 치매를 앓자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 곳이 회사였다는 사실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렇게 찾아온 나를 보고 뒤에서 흉보는 사람들의 입방정이 그대로 들렸다. 노화, 죽음, 치매는 막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평소에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 세 가지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뚜벅뚜벅 지금도 나를 향해 오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발걸음은 아무도 막을 수 없고, 아무도 피할 수 없다.      


불안했다. 손이 떨렸고, 두통이 반복되었다. 이번 정기건강 검진항목에 뇌 CT를 추가했다. 전부장님의 생전 건강했던 모습, 두통으로 고통스러워하던 모습, 치매 환자였던 야윈 얼굴 그리고 영정사진이 어지럽게 허공을 채웠다가 사라졌다. 혼자 쓸쓸하게 죽는 것도 싫었지만, 자신의 이름과 가족까지 기억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긴 더 싫었다. 하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인간의 한계란 말을 처음 실감했다.     


다음 날 아침, 무거운 머리를 한 채 나는 다시 출근했다. 누가 죽든 회사 일은 아무 문제없다는 듯 돌아갔다. 내가 죽어도 그럴 것이다. 죽은 사람 자리는 누군가의 승진 찬스가 될 수도 있다. 우울한 생각이 연이어 일어나자 마음 쉴 곳이 없었다.     


사내 메신저 알림이 모니터 하단 에서 깜빡거린다. 사내 독서 동아리에서 다음 달 모임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이 와중에 책모임이라니 귀찮았고 짜증났다. 동아리 가입이 후회스러웠다. 회사 사람들과 진지한 대화를 하려는 발상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 아닌가. 내가 안 보이거나 퇴사하면 기회는 이때라며 흉이나 볼 사람들. 내가 치매에 걸리거나 죽으면 그렇게 살더니 꼴좋다 고소해할 사람들.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무관심한 사람들 아닌가. 이런 작자들과 책은 무슨 얼어 죽을 책이란 말인가. 냉소와 빈정이 가득한 눈에 책 제목이 얼핏 보였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다른 글씨보다 크게 보였다.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고 다시 보니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었다.     



신문에 실린 나의 부고     


이반 일리치가 죽었다. 신문 부고란에 발인 요일과 시각이 실렸다. 신문을 돌려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반 일리치의 동료였고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고인을 아무리 사랑했던 사람들이라도,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은 엄격히 딴 세상 사람이다. 산 사람은  산 사람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인 것이다. 산 사람은 습관적으로 모든 사건을 자기 생존의 유리 또는 불리로 판단한다.


그가 사망하고 나면 알렉세예프가 그 자리에 임명될 것이고 알렉세예프 자리에는 빈니꼬프나 시따벨이 임명될 것이라는 설이 이미 나돌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사무실에 모여 있던 이 고위급 인사들이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으로 인해 발생할 자신과 동료들의 자리 이동이나 승진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러시아 사람들의 생소한 이름을 재미삼아 소리 내어 내 읽어보았다. 알렉세에예푸우, 빈니이꼬프나 시따벨. 여러 번 틀렸다. 정확하게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직장 동료의 죽음을 바라보는 그들의 태도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너무나 친숙한 나머지 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가져다줄 승진 효과, 즉 개인 집무실이 생기고 연봉도 800루블 이상 오를 것에 대한 기대를 즐기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청탁을 넣어 자신의 처남을 좋은 곳으로 전보시키려고 했다. 그는 이제 처갓집 식구들을 위해 자신이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다고 타박했던 아내에게 남편 노릇을 제대로 하게 됐다면 좋아하고 있다. 산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 속에서도 나름 살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 진짜 병이 뭐였답니까?”, “저는 신년 명절 이후 가보지를 못했습니다. 가봐야지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남긴 재산은 좀 있는지 모르겠네요?”라는 익숙한 말이 오고 갔다. 예의상 어쩔 수 없이 추도식에 참석해야 하는 귀찮은 마음, 추도식 후 벌어지는 카드놀이, 고인 앞에서 성호를 어떻게 그어야 하고 유족들에겐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는지에 대한 가벼운 고민까지 죽음을 둘러싼 풍경은 1880년 러시아와 2022년 대한민국이 놀랍게 닮았다. 아마도 죽은 사람에 대한 산 사람의 태도에는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공통점이 있는 모양이다. 산 자는 산 자 편에 죽은 자는 죽은 자 편에 속하려는 본능은 시대와 국경을 가볍게 넘는다. 생사의 구별은 다른 그 어떤 구별도 가소로운 것으로 만들다.      

   

나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부고를 읽고,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나의 죽음이 몰고 올 산 사람들의 살맛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렇다고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리라. 톨스토이도 그렇게 썼지 않은가. 그들 모두가 이반 일리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라고. 그러니 의심하진 말자. 그들은 모두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란 것을.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딱히 뭘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산 사람은 산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산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을 말을 골라서 해야 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야 그 어떤 말에도 유감을 남기지 않고 침묵을 지켜주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아주 가까운 사람의 사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누구나 그러듯이 그들도 죽은 게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어쩌겠어, 죽었는데. 하지만 난 이렇게 살아 있잖아.’          


나 역시 이에 동의해왔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동료들과 친구들의 저러한 태도와 말을 원망하진 않을 테다. 사실 죽죽산살(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은 내가 장례식장에서 위로의 말로 가장 애용한 것이기도 하다. 죽죽산살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한 구석은 바로 그 말 때문에 시리고 아팠을 거란 생각을 그땐 전혀 하지 못했다. 죽죽산살은 ‘어쩌겠어, 죽었는데. 하지만 난 이렇게 살아 있잖아.’를 바꾼 말은 아니었을까. 돌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따뜻하게 안아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라면 어땠을까? 죽은 친구가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죽마고우였고, 다 커서는 같은 직장에서 함께 일한 동료였다면, 살아남은 친구는 남다른 애도의 시간이 준비되어 있진 않을까? 이반 일리치와 뾰뜨르 이바노비치가 바로 그런 사이였다. 아무도 두 사람이 가장 친한 친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친구가 몹시 고통을 받으며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 이바노비치는 갑자기 섬뜩한 느낌을 받았고, 더럭 겁이 났다.          


‘사흘 밤낮을 끔찍하게 괴로워하다 죽었다.
언제든지, 지금 당장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느낌과 겁은 아무리 절친이라고 하더라도 약발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그 이유는 첫째, 죽죽산살이 죽음을 고인에게만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교묘하게 위장하기 때문이다. 뾰뜨르 이바노비치도 “마치 죽음은 이반 일리치에게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일 뿐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는 듯이” 죽음의 분위기에서 사뿐히 벗어났다.     


둘째, 사실 뾰뜨르 이바노비치가 전해들은 친구의 극심한 고통은 실제 친구가 겪은 것이 아니라, 친구의 아내가 겪은 고통, 즉 산 자의 고통일 뿐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표현대로 뾰뜨르 이바노비치가 들은 것은 “실제 이반 일리치가 겪은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이 쁘라스꼬야 표도로브나(미망인)의 신경을 얼마나 자극했느냐”를 그녀 본인의 절절한 표현을 통해 들은 것에 불과하다. 산 자의 생생한 고통은 죽은 자의 실제 고통을 삐쩍 말라붙게 만든다.     


셋째, 산 자의 생계 문제는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불쑥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의 부인은 뾰뜨르 이바노비치에게 “남편이 사망한 경우에 국고에서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척하고 있다. 왜 ‘구하는 척’인가? 사실 그녀는 국고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선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더 뜯어낼 수 있는 방안이 없는 지, 지금 남편의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질문하고 있을 뿐이다. 산 사람이라면 이러한 질문이 나온 뒤 배경을 귀신처럼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고인의 최고 절친 뾰뜨르 이바노비치는 추도식에서 황급히 빠져나와 카드놀이가 벌어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나는 이제 이반 일리치가 어떤 삶을 살았고, 또 어떤 고통가운데 무슨 생각을 하며 죽어갔는지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산 사람의 고통이 아닌, 죽어 가는 사람이 직접 말한 죽음의 과정을 듣고 싶어졌다. 내심, 그가 이렇게 아내와 친구 그리고 동료부터 철저히 외면 받은 상태로 고통 가운데 혼자 죽은 것은, 분명 그가 잘못 살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하며 그를 비웃고 있었다. 삶은 인과응보 아닌가! 이러한 단정이 정확히 맞아떨어질 것을 미리 즐기면서 나는 책장을 성급하게 넘겼다.



곧 좋아질 거란 뻔한 거짓말     


그러나 내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자신만만했던 표정은 과녁의 정중앙을 향해 날아가다 맥없이 땅바닥에 꽂힌 화살처럼 비참해졌다. 삶이 인과응보라면, 나는 이반 일리치보다 더 비참하게 죽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45년의 삶을 산 것이다. 물론 평범한 일상이란 톨스토이의 표현대로 끔찍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그 끔찍함은 그 자신의 것일 뿐,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진 않았다. 평범한 일상의 끔찍함은 그가 특별히 나쁜 놈이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훌륭하게 살아온 편이었다. 어릴 적 그는 ‘집안의 자랑거리’였다. ‘똑똑하고 활달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예의 바른 인물’이었다. 학교의 전 과정을 우수하게 끝마쳤다. 사회생활도 잘했다. ‘그가 자신의 의무라고 여기는 일은 높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판단하는 모든 것이었다.’ 회사원으로 살고 있는 나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잘 알고 있다. 나아가 그는 공사를 엄격하게 구별했고 자신의 권력을 절대 악용하지 않았다. 회사원으로 살고 있는 나는,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톨스토이는 그의 삶이 ‘별다른 변화 없이 아주 순조롭게 잘 흘러갔다’라고 담담하게 적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분명히 인정했지만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 그는 자신을 남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생각했다. 그래서 죽음이 다른 사람에게만 해당하고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죽음은 강했다. 출생과 더불어 죽음은 우주를 지배하는 양대 기둥이었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순 없는 것이다. 수십 년 능숙하게 해왔던 재판도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했다. 오히려 죽음이 재판을 손쉽게 망쳐 놓았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숨기고 싶은 것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죽음이 그를 투명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통해 손쉽게 이반 일리치의 속사정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죽음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죽음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젖어 들 뿐이었다.          


아직 나는 나의 죽음과 대면한 적이 없다. 다른 사람의 죽음만 구경했을 뿐이다. 스스로 대단히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기진 않았지만, 죽음에 대해선 가소롭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오직 살 생각만 하며 살았구나 싶었다. 죽음이란 삶을 끝장내는 나쁜 것이니까, 무의식적으로나마 가능한 한 멀리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보단 다들 그렇게 사니까, 죽음에 대해 별생각 없이 남들 하는 대로 살아왔을 것이다. 모르면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 잠자코 있으라고 배웠지 않은가. 그러나 죽음 앞에서 혈혈단신 서 있는 이반 일리치를 보니 솔직히 나는 진심 두려웠다.      

     

죽음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인생을 순조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이라는 위험천만한 짐승이 온순하기 짝이 없는 나의 일상을 언제든 잡아먹을 수 있는 상황을 별일 없다고 해야 할까? 죽음과 눈을 마주쳤다면 나는 얼어붙었을 것이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잘못했다’는 말만 수없이 연발했을 것이다. 죽음을 미리 알았다면 이렇게 살진 않았을 거라며 후회와 분노를 터트리며, 알 수 없는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 삶 전체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삶의 폐허 속에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없다는 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인가?
내가 없어지면 그럼 난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살면서 이런 질문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주는 이물감 때문에 쩔쩔맸다. 딛고 있던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내 머리 위를 향해 끊임없이 낮아지고 있었다. 난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죽음은 나를 행방불명자처럼 취급했다. 아무렇게나 해도 문제없는 존재 말이다.     

이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언제 그가 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세상을 떠날 것인지, 그리고 언제 환자를 지켜보는 이 불편하고 갑갑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지뿐이었다.  


죽음은 인간을 철저히 외톨이로 만든다. 죽음과 눈이 마주치지 않은 사람은 지금 죽어가는 사람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단지 불편하고 갑갑할 뿐이다. 죽음이 사로잡고 있는 자는 오직 ‘그’일 뿐이다. 그 옆에서 간호하고 있는 나는 살아야 하지 않는가? 나와 죽음은 전혀 상관없다, 나를 ‘그의 죽음’에서 해방시켜 달라! 그들의 생기는 득달같이 달려드는 것이다. 그 어떤 절절한 인간관계도 죽음의 요새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구출할 수 없다. 어쩌겠는가? 그들에겐 죽음이 보이지 않는 것을! 나는 치욕스런 외로움에 부르르 떨었다.     

     

아편과 모르핀도 죽음의 고통을 줄여 주지 못한다. 아들과 딸도 죽음을 함께 할 수 없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을 마치 어린애처럼 어루만지고, 달래고, 쓰다듬어주고, 입 맞추며 오직 자기를 위해 울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곧 아주 좋아질 것’이라는 뻔한 거짓말만 했다. 그 거짓말만 남긴 채 그들은 곧 그들의 삶으로 달아났다. 이런 거짓말은 이반 일리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 하나였다.   

       

이반 일리치는 하인 게라심과 함께 있을 때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린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를 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 말에는 자신 역시 죽을 존재라는 진실이 담겨 있다. 이 말은 자신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죽음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는 한없이 연약한 사람이라는 솔직한 고백과 다를 것이 없다. 죽어가는 사람은 죽음을 인정하는 사람에게서만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고통은 같은 고통을 가진 사람만이 완화 시킬 수 있다. 어떤 병은 고통을 이겨낸 사람만이 가장 훌륭한 의사요 치료약인 것이다.          



영혼과의 대화     


이반 일리치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제게 이런 고통을 주시나요? 
왜 저를 이렇게까지 고통스럽게 만드는 겁니까? 
왜 도대체 왜 절 이렇게까지 괴롭힌단 말입니까?     


그는 ‘왜’를 여러 번 써서 물었다.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처참한 고통에 아무런 이유도 없진 않을 테니까, 그 이유라도 안다면 덜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아무 잘못 없이 이런 고통을 겪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비극 아니겠는가. 인간에게 ‘이유 없음’이란 악마의 다른 이름 아니었던가. 바로 그 때, 신비한 일이 벌어졌다. 영혼의 목소리,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어떤 생각의 흐름이 이반 일리치에게 감지되었던 것이다.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이반 일리치는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는 것, 그리고 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영혼과의 대화는 이어졌다.    

 

‘사는 거라고? 어떻게 사는 거 말이냐?’
‘전에 살던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지, 기쁘고 즐겁게.’
‘전에 어떻게 살았었는데? 그렇게 기쁘고 즐거웠나?’     


이반 일리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한 땐 기쁨과 즐거움이라고 느꼈던 모든 일들이 토할 것 같이 역겨운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죽음이 작동한 날로부터 가까울수록 기뻤던 일들은 덧없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변했다. 그러한 삶은 언제나 똑같은 것이었다. 하루를 살아내면 하루가 죽어가는 삶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반 일리치는 삶이 이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일 수는 없다고 저항했다. 무슨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분명한 이유를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그는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자신의 삶을 탐색해 보았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수수께끼를 그 역시 나처럼 인과응보로 여겼던 것이다. 죽음은 내가 잘못 산 것에 대한 처벌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내가 잘 살았다면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잘 살면 이 참혹한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뭐야? 정말로 내가 죽는단 말인가? 그의 내면의 목소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이젠 정말이야. 왜 이런 고통을 내가 겪어야 하지?
그러면 또 내면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냥 그런 거야.
이유는 없어.     


나는 탄식했다. 평범하고 착실했던 한 인간의 고통은 순수했다. 인간이 죽어가는 고통스런 과정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원래 그냥 그런 거였다. 책을 더 읽기 어려울 정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치매와 뇌출혈로 고통받다 죽은 전부장님에게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나의 죽음도 그냥 그런 것일 뿐이다. ‘그냥 그런 거야. 이유는 없어.’라는 얌전한 문장은 사납게 뛰어올라 나의 마음을 갈가리 찢었다.      

존엄한 한 인간의 소중한 생명이 저토록 비참하게 죽어 가는데, 그것에 아무런 이유도 없다니. 그렇다면 인간은 왜 사는 것일까? 인간의 고통이 원래 그런 거라면, 인간의 삶 역시 우발적인 사건일 뿐 아닐까? 인간의 삶과 죽음 모두, 여름철 소나기 같은 한바탕 소동 아닌가. 갑자기 퍼 붇다가 이내 사라지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무지개를 띄우는 하늘. 그 비에 홀딱 젖어버린 나에게 언제나 이유라곤 없었다. 그냥 그런 거였다.  

   

“난 죽고 싶지 않아!”라는 작은 고함들이 비명처럼 길게 이어졌다.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가족들이 불쌍하다는 말 뒤에 ‘쁘로스찌’(용서해줘)라고 덧붙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는 ‘쁘로뿌스찌’(보내줘)라고 말하고 말았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용서를 구하는 것조차 이기심 가득한 애원으로 변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통증과 죽음은 그렇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는 죽음 대신 빛을 보았고, 환희를 느꼈다. 누군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임종하셨습니다!”           



나는 나에게 희망이 될 것이다     


삶의 무의미성에 기절하기 직전, 나는 간신히 의미 있는 마지막 문장을 읽어냈다. 그것은 이반 일리치가 죽고 나서 마음속에 되뇌었다는 말이었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나는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다. 언뜻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살아있을 땐 죽음이 없고, 죽음이 왔을 땐 이미 내가 없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깔끔하게 설명했다. 에피쿠로스는 죽음과 삶이 마치 동쪽과 서쪽이 정반대 위치한 것처럼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삶과 죽음을 하나의 동전을 구성하는 양쪽 면으로 본 것 같다. 죽음이 끝났다는 건, 죽음과 함께 있던 삶도 동시에 끝난 것이다. 더 이상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더 이상 삶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톨스토이는 왜 마지막에 선언하듯 적었을까. 어둠이 빛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 듯, 죽음은 삶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기 때문일까. 인간의 눈이 어둠과 빛이 함께 있어야 세상을 볼 수 있듯, 인간의 마음은 삶과 죽음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세상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일까.     

나는 뭔가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죽음이 나의 삶을 끝내는 사형 집행수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삶을 진실하게 만드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 없다면 삶도 있을 수 없다는 것도 함께 깨달았다. 낮과 밤이 하나가 되어 하루라는 시간을 만들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 아이라는 생명을 만들듯, 삶과 죽음이 만나 인간에게 의미와 가치라는 삶의 이유를 만든다고 생각되었다.      


이반 일리치가 들었던 내면의 목소리, ‘그냥 그런 거야. 이유는 없어’는 사실일 수 있다. 인간은 그냥 태어난 것일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신이나 운명 등이 부여한 절대적인 삶의 이유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는데 삶의 이유는 꼭 필요하다. 인간의 몸은 탄소로 구성되어 있지만, 인간의 마음은 의미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코는 공기를 마셔 몸을 살리고, 우리의 영혼은 의미를 마셔 삶을 살린다. 삶의 이유가 사라졌을 때, 인간은 죽음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분명한 삶의 이유와 의미가 있으면 삶과 죽음의 이분법을 넘어 당당하게 입을 연다. 자신이 선택한 삶의 이유와 의미의 최후 증언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삶과 죽음의 이분법을,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한 이진법으로 바꿨다. 컴퓨터의 0과 1이 수많은 파일과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인간의 삶과 죽음이 수많은 의미와 이야기를 만들어낼 거라 생각했다. 삶과 죽음의 이진법이 내게 준 첫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삶은 그냥 그런 거야. 삶에 별다른 이유는 없어. 맞아, 그럴 수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삶의 이유를 스스로 만들 거야. 아무도 내 삶에 의미를 주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면, 내 삶에 이유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는 것도 진실이야! 나는 나에게 희망이 될 거야.”      


가슴이 벅차올랐다. 죽음 때문에 거미줄 가득한 지하창고처럼 변했던 마음에 빛이 들어왔다. 아마 이반 일리치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빛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이제 그가 죽음의 순간에 느꼈던 기쁨을, 나는 지금 여기 내 삶에서 느끼고자 한다. 삶의 구석구석에서 나는 나에게 희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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