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놀랄 만큼 파랗던 하늘과 둥실둥실 떠다니던 솜구름이 그림 같았는데, 오늘 아침엔 연회색 구름이 우중충하게 드리워졌고 해는 숨었어도 햇살은 뭉근히 번져 있었다. 봄 하늘은 매일 변하는구나 싶다가, 다시 우라지게 변덕이 심하다는 생각이 들다가, 다시 사람의 마음도 때에 따라 그렇지 뭐, 하는 자조로 이어졌다. 천변을 따라 전철역을 향해 걸으며 길가의 낮은 풀꽃들을 보고는 문득 장사익의 ‘찔레꽃’이 듣고 싶어졌다. 퍽 간절해져서 생각나는 구절을 흥얼거리니 영 그 맛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불쑥 글귀 하나가 생각났다.
“인간은 판단력 부족으로 결혼하고,/ 인내력 부족으로 이혼하고,/ 기억력 부족으로 재혼한다.”
오래전, 어느 잡지의 귀퉁이에 우스갯말로 올라와 있는 문구를 보고 무릎을 쳤었다. 내 결혼생활의 비애와 세상사를 그 말로 곱씹으며 쓴웃음 지었고, 술자리나 사사로운 만남에서 몇 번 써먹기도 했다. 그냥 유머로만 흘려들을 수 없는 해학이지 싶었다. 생활방식이 다르기도 하지만 결혼 30년이 넘어 ‘소 닭 보듯’하며 말 한마디 나눌 일도 별로 없는 아내와 다툰 것도 아니고, 딱히 주변의 뉘가 생각난 것도 아니었다. 날씨가, 찔레꽃이, 어떤 연상을 일으켰는지 모르겠다. 괜스레 그 말이 곱씹어지면서 생각이 더 뻗어나갔다.
사람마다 경험과 사유가 다르고 그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도 다르겠지만,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첫 번째 문장을 제대로 이해 못 할 수도 있다. 이혼하지 않은 사람은 두 번째 문장을 제대로 이해 못 할 수도 있다. 재혼하지 않은 사람은 세 번째 문장을 제대로 이해 못 할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해란 그 문장이 갖는 다각도의 뜻을 알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체험에서 나오는 느낌으로 말없이 공감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아울러 유추되는 이해로 다음 문장에도 쓴웃음을 지을 수 있을 터이다. 물론 결혼하여 내내 행복해하는 사람이나, 이혼하고 내내 홀가분해 신이 난 사람이나, 재혼하여 내내 처음보다 훨씬 행복하여 살맛 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결코 한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는다.
경이롭고 복잡 미묘한, 순환하고 변화하는 자연의 현상, 그 장면 장면과 다가서지 못할 섭리와 이치에서 우리는 우리 생활의 많은 것들을 빗대어 볼 수 있다. 변하기 싫어하면서도 실상은 변하고 있고, 나와 상대 또는 주변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고, 발전적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많은 관계가 때로는 기쁘게 때로는 슬프고 아프게 이어져 간다. 그 가운데 상황에 따라 가장 쉽게 흔들리고 변하기 쉬운 것이 사람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위에 인용한 문구도 사람 마음의 변화를 과장되게 빗댄 농담이겠는데, 여기서 처지의 변화 단계로 표현한 말(결혼, 이혼, 재혼)의 본질에 더 다가서서 파헤쳐 보면 욕심, 특히 자기 마음의 변화에 따른 이기심이 드러나지 않게 원인을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이라는 허울로 치장하고 거기에 눈멀어 많은 것을 간과하거나 제쳐두고 굳게 약속한 결혼도 그 본질에는 자기를 위한 욕심이 내재해 있다. 이 사람이라면; 나를 위해 줄 것이며,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며, 위신과 모양을 갖게 해 줄 것이며, 편하고 여유를 갖게 해 줄 것이며, 힘이 되어주고 희생해 줄 것이라는 이기심은 사랑이라는 포장으로 다 감춰져 버린다. 나중에 그러한 기대가 조금씩 깨어지면서 드러나지 않았던 이기심은 나보다는 -나 혼자 한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에게 실망하고, 실망은 원망이 되고, 원망은 굳건할 줄 알았던 사랑이라는 그릇에 금이 가게하고 멈추지 않는 이기심은 끝내 그릇을 깨뜨리고 눈을 돌려 새로운 그릇을 찾는다.
정말이지 잘못 만난 인연임을 절감하고 어렵게 헤어진 후, 혼자의 시간은 새롭고 다양하게 다가오며 새뜻한 가능성이 열리는 모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다시 뭔가를 하려는 마음의 이면에는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알게 모르게 도사리고 있을까? 몸과 마음의 외로움, 기대감, 의심, 절망, 자탄, 두려움, 막연함… 이렇게 하면 이것은 해결되지만, 또 다른 것이 엉키고, 어느 것을 얻기 위해 어느 것은 포기해야 한다. 지난 경험을 공부 삼아 이제 정말 남은 생의 진짜 동반자를 찾고 싶기도 하겠지만, 다시 한번 희생하며 내 것을 포기하고,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자는 생각까지 가는 데는 절실함에 따라 걸리는 시간의 정도가 다를 것이다.
연습이 없는 인생, 일회성의 삶에서 누구는 수행하거나 공부하고, 누구는 돈을 모으거나 명예를 추구하고, 누구는 즐기려면 지금 즐겨야 한다며 실천한다. 누가 옳으냐 그르냐 따질 수 없다. 시간은 마구 흘러가고 목적이나 목표대로 된다는 보장도 없다. 날씨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구름이 흘러가는 것 어느 하나 그냥 되는 것이 없듯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도 다 원인에 따른 결과이다. 자신의 이기심과 소유욕으로 인하여 주변에 많은 분란이 일어난다고 원인을 파악했더라도, 또 다른 어떤 흐름의 영향을 핑계 삼지, 하루아침에 성인군자가 되거나 개과천선하기는 쉽지 않다. 원인이라도 제대로 파악한다면 서서히 자기 안에서부터 문제를 치유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이 들수록 자기 자질과 성향은 자신의 한계(선입견, 습관 따위)를 극복해 나감으로써 나아지거나 너그러워진다. 상대가 나의 초점에 맞춰 달라질 거라는 환상 혹은 착각보다는 내가 먼저 그러할지를 살필 일이다.
오늘 출근길, 이어지던 잡생각의 끝은 결국 나의 소설 쓰기에 대한 욕구불만과 결부된 상념으로 치달아 더 씁쓸해졌다. 진작 시작한 소설이 마무리되지 않아 힘들게 고치는 중인데, 돌연 새로운 착상이 떠올라 머릿속에 들끓고 있으니 침이 마르고 속이 갈라지는 듯하다. 금세 또 사그라질까 봐 이 생각은 더 나아가고 싶지 않은데, 정리가 잘 안되지만 대충 이런 헛소리가 되겠다.
‘어떤 글쟁이는 자기 욕구와 가능성에 대한 참을성 부족으로 글을 쓰고, 어떤 글쟁이는 어느 선에 도달하려는 완성도에 대한 타협성 부족으로 끝없이 고치고, 어떤 글쟁이는 자기 자질과 가능성에 대한 신뢰성 부족으로 필을 꺾는다.’
결핍이 없는 행복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 필을 꺾는다고 한번 시작한 글쓰기를 버티듯 참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고 보면 자연의 흘러가는 이치에는 ‘참음’이란 없는 것 같은데, 우리 인간 세사에는 참지 못해 문제가 되고 사고가 되고 상대를 아프게 하는 일이 많은 것 같다. 그러면 자연은 ‘참을 일’에 다다르기 전의 흐름에 따르라고 우리를 가르치는 바가 아닌가?
모처럼 홀로 횡설수설하고 나니 그새 하늘빛도 바람 향기도 바뀌어 있고, 내 책상 위의 할 일도 달라져 있다. 아침의 생각을 저녁에 잠시 떠올려 보았지만 내일 아침에는 또 어떤 생각이 들 것인지…. 도시의 불빛이 사무치는 이 밤에는 단골 주점에 들러 양현경의 ‘비몽’을 들으며 고개나 주억거리면 좋겠다. 막걸리 한 잔에 마음이 통할 벗이 거기 있다면 더욱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