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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양섭 Nov 01. 2024

질병에 대한 은유의 양면성과 체감의 차이

-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을 중심으로

  2019년 말,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전염병이 이듬해에는 전 세계로 번져나가, 유례없는 지구촌의 재앙이 되었다. 다시 해가 바뀐 2021년의 봄이 다 가는데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는 도무지 기세가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입을 가린 사람들은 불편과 피해를 감수하며 조심을 하지만, 실시간으로 보도되는 통계와 사례들은 ‘강 건너 불구경’일 수가 없다. 게다가 온갖 경로의 알쏭달쏭한 정보와 ‘카더라 통신’은 사람들을 더욱 걱정과 불신에 빠뜨리며 종잡을 수 없게 한다. 결국 백신이 해결책이겠는데, 이에 대해서도 부작용에 대한 말들이 연일 들려온다. 말이 옮겨지는 데 경우와 확률은 전제되지 않는다.

  아내가 백신 중의 하나인 아스트라제네카 접종을 받고 왔다. 요양보호사이기에 먼저 맞을 기회가 왔는데 아내는 무척 망설이다 맞았다. 당일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더니, 다음날 얼굴이 하얘져서는 두통과 몸살이 심해 몸져누웠다. 더럭 겁이 나서 부리나케 진통제를 사다 바치고 수시로 열을 재보며 주시했다. 다시 다음날이 되자 깜짝쇼라도 한 듯 말짱해졌다. 대개는 들은 말 중에서도 특히 위험 사례에 더 신경이 쓰인다. 우리는 얼마나 말들로 인한 오해와 불신에 묻혀 사는가. 문득 이태 전에 읽은 책이 생각났다. (본문 중 ( )의 숫자는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이재원 역, 도서출판 이후, 2002.>에서 인용한 쪽)

  나름대로 읽고 쓰길 좋아하는 필자로서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은유’가 이다지 폭넓게 사회 전반의 언어문화를 장악하고 있는 줄 미처 느끼지 못했다. ‘은유(metaphor)’는 그저 문학 예술적 견지로 말을 아름답게 형용하는 수사로만 인식했지, 통상의 어투에 다반사로 깔려 그것이 선동과 폭력이 되기도 하고 멸시나 왜곡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실상은 필자 또한 그런 환경과 문화에 함입되어 무심결에 그런 말들을 사용하고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나의 무지와 무책임을 자탄하며 이런 현상들을 무조건 탓할 수만은 없다.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eorge P. Lakoff)의 말처럼 이미 ‘은유는 일상적 삶에 널리 퍼져있으며 우리의 사고와 개념 체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언어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인간사회에서 대화와 교감의 대부분은 알게 모르게 은유적이다. 은유 없이 어떤 개념을 그대로 투명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환경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다만 이제부터라도 은유의 부정적 현상을 살펴 깨닫고 대상의 본질과 상대를 배려하는 바른 언어를 찾고 실천하는 계기로 삼아야겠다.     


  비유 수사학적 레토릭(rhetoric)으로서 은유는 실현되는 순간 ‘부각’과 ‘은폐’의 양면성을 가진다. 손택은 이러한 기능이 특히 개인이 앓게 되는 질병과 치료를 위한 의학에도 산재해 있다는 점을 본인의 경험에 더한 관찰과 탐구를 통해 깊이 있게 주목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말들이, 겪고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더 힘들게 하는지 하나하나 짚어 일러준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무지한 악습이며, 그에 대한 살핌도 없이 정치적으로나 선동적으로 확대해 사용하는 행태는 비윤리적 행위라고 분노한다. 예컨대 “결핵과 창조성을 연관 짓는 상투어들이 너무나 잘 확립되어 있던 나머지, 20세기 말의 어느 비평가는 결핵이 점차 사라지는 바람에 오늘날 문학과 예술이 쇠퇴하고 있다고 설명할 정도였다.”(54) 또한 암이 대두되면서 은유는 더욱 가혹해졌다. “150여 년 동안 결핵은 연약함, 감수성, 슬픔, 무력함을 나타내는 은유였다. 반면에 냉혹하고, 무자비하며, 타인의 희생을 가져오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암에 비유됐다.”(93) 우리가 사회적으로 듣고 쓰는 ‘암적인 존재’라는 표현이 암 환자에게는 무시무시한 낙인이 되는 이치다.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 『사진에 관하여』 등에서 ㅡ무엇보다 먼저 이 세계를 거짓된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자는ㅡ ‘투명성(Transparency)’ 개념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이런 맥락으로 질병에 대한 은유에 대해서도 방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치료해야 할 대상일 뿐인 질병’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을 품게 하는 은유의 함정과 그로 인한 폐해들’을 펼쳐 보인다. 두 차례에 걸친 본인의 암 투병과 부모와 친구의 죽음을 통해 여실히 살핀 체험자로서,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그릇된 은유를 불식하고 함께하자는 올바른 사회질서를 촉구하고 있다. 실천하는 시대의 지성인다운 면모를 보이는 손택은, “암과의 전쟁”(99) 따위 군사적 은유들이 질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에 『은유로서의 질병』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12년 전, 암에 걸린 적이 있다. 이 당시에 특히 나를 격분케 만들었던 것 ㅡ그리고 의사들의 절망적인 진단 때문에 생겨난 두려움과 절망을 딴 데로 돌릴 수 있게 만들어준 것ㅡ 은 이 질병을 둘러싼 세인들의 평판이 암 환자의 고통을 가중시킨다는 사실이었다.”(136)

  위에 언급한 책 외에도 『타인의 고통』 등 수전 손택의 저작들은 공히 진지한 성찰과 각성을 촉구한다. 특히 『은유로서의 질병』은 무심결에 젖어 있으면서도 몰랐던 ‘은유로 인한 질병의 인식 오류와 해악’에 대하여, 놀랄만한 동서고금의 방대한 자료 ㅡ77편의 문학작품과 영화, 오페라 그리고 의학 서적들ㅡ 에서 골라낸 디테일한 사례들을 제시하여 공감을 일으킨다. 손택의 주장과 의도에 마땅히 공감하지만, 성장환경이 다르고 세대가 다른 경우에서 몇 가지 짚어봐야 할 점은 있다고 생각된다. 전 지구적으로 생활환경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질병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그러나 개인에게 닥친 질병에 대한 인식이나 고통의 과정과 치료 방법은 결코 획일적일 수가 없다. 어떤 병증이라도 대응의 양태는 환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① 동양과 서양 등 지역 문화에 따른 차이 ② 시대와 세대의 차이 ③ 사회 환경과 의료 기술의 차이 ④ 생활 수준과 인지능력의 차이 ⑤ 질병의 종류와 개인의 성격 차이 ⑥ 환자와 의사, 가족과 제삼자의 차이 ⑦ 종교 또는 신념의 차이, 이 외에도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차이를 짚어보는 이유는 그에 따라 질병에 대한 은유가 달라지고, 기존의 은유를 받아들이는 재량도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고로 동양과 서양의 질병과 의료를 대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이에 따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양에서 인체를 ‘소우주’로 보는 사상은 은유로서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순화’와 ‘조화’와 ‘운기’를 우선하는 동양 의학에서는 손택이 말하는 서양 의학에서처럼 ‘군사용어’가 판을 치지는 않는다. 동양 고전 장자(莊子)에서는 죽음이 삶의 다음 단계로 마땅히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에서는 제일 먼저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念身不求無病)’고 하였다. 중국 4대 미녀의 한 사람인 월(越)나라의 서시(西施)가 가슴앓이 병이 있어 얼굴을 찌푸린 것조차 부러워한 추녀가 자기도 가슴에 손을 대고 그 흉내를 내고 다녀 더욱 밉상스러워 빈축(嚬蹙)을 샀다는 서시빈목(西施矉目)의 고사도 전해져 온다. 이와 달리 서양에서는 “결핵은 세계를 낭만적으로 보는 데에 도움을 준 질병이었다.”(103)고 하며 ‘영혼의 병’이라고까지 은유 되었다.

  시대적으로도 인식은 변하고 있다.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을 1978년에 펴냈고 10년 후에 『에이즈와 그 은유』를 썼다. 결핵과 암에 천착하여 비교하며 ‘은유의 함정’을 설파하였는데, 더 갑작스럽고 위험한 에이즈가 나타났다. “에이즈의 등장은 전염병이 정복되기는커녕 그 숫자가 더 늘어났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다.”(214) 그로부터 30~40년이 더 흘렀다. 지구촌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정보통신과 의료 기술에 힘입어 치료가 되는 질병에 대한 경계는 한결 느슨해진 모습이다. 그러나 입각해서 살펴보면 손택이 파악한 오래된 은유와 새로 불거진 은유의 함정들은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더러는 의미가 퇴색되었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되고 보면 폐해를 실감하게 된다. 권력이 이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현상 또한 여전하다. “사람들은 국가의 생존, 시민사회의 생존, 세계 자체의 생존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을 듣는다 ㅡ 대중들을 억압하려고 할 때마다 흔히 지껄이는 말 가운데 하나를(비상사태 때는 “과감한 수단”이 필요하다, 등등). 에이즈가 상기시켜 줬던 말세라는 수사학은 이런 사태를 빚을 수밖에 없다.”(229)

  불과 몇 년 전에는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신종 인플루엔자A(H1N1)가 급습했고 나라마다 비상이 걸렸었다. 그런데 작금의 코로나19는 훨씬 더 확산되고 장기화되면서 우리가 당연히 누리던 일상이 피폐해지고 있다. 나라와 지역 간의 경쟁 구도도 보이고, 일부 몰지각한 행태에 화가 치밀기도 한다. 서로 간에 경계하고 거리를 두게 되었다 하더라도 질병은 예기치 않은 불편한 객이거나 삶에 종속된 부분이기도 하다. 손택의 말대로 치료의 대상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내가 하는 말이나 생각이 엉뚱한 오해나 잘못된 인식을 초래할 은유가 아닌지 되짚어보고 폐단을 찾아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한 지점이다. “특히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유행병은 자비와 관용에 반대하는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 오늘날, 자비와 관용은 방종, 우유부단함, 혼란, 타락과 동일시한다. 즉, 건강에 유해한 것이다.”(224) 공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과 가족을 위하는 이기심은 더욱 팽배해진다. 그런 가운데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고 방역과 퇴치를 위해 밤낮없이 애쓰는 이들의 인간애에는 숙연한 마음으로 손을 모으지 않을 수 없다.     


  『은유로서의 질병』은 수전 손택의 투병기는 아니지만 두 번의 암 투병을 이겨낸 과정과 고통이 바탕이 되었기에 애끓는 주관적 토로의 측면이 있다. 심각한 병일수록 실제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과 심정을 모른다. 곁에 있는 의사나 가족도 고통을 대신 느낄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내용이 전체적으로는 반박의 여지가 없지만, 받아들여지는 정도는 환자, 가족, 지인, 의사, 간병인, 제삼자 등의 입장에 따라 제각각일 것이다. “독설을 내뱉을 목적에서 보자면 질병은 단 두 종류, 즉 고통스럽지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나 틀림없이 죽음을 초래할 질병밖에 없다.”(106)고 하더라도 똑같은 은유가 곧이곧대로 적용된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도 연민만이 아닌 공감과 포용이 힘이 될 것임은 틀림이 없다.

  “심리학적 이해는 질병의 ‘실체’를 훼손시킨다.”(85)는 말은 ‘앎’과 ‘느낌’은 다르기 때문이겠다. 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 전문가 그리고 다수 대중의 체감은 다르다. 병증의 정도와 기간에 따라 다르지만, 장기적으로 치료해야 하는 환자의 경우는 대개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죄인의 심정이 된다. 질병의 실체는 차치하고 다치거나 아프게 된 원인을 거듭 유추하기도 하고, 향후 대응을 위한 심리적 갈등에 휩싸이다가 대개 자기합리화 기제를 택한다. 이때 의사나 주변인들의 말 한마디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엉뚱하게 악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심리학적 이해’는 본질과 다른 면에서 공감 또는 반발을 초래할 수도 있다. 몸과 마음이 가라앉은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에서는 평소와 달리 감정이 격앙되기 쉽고, 불쑥 새로운 욕구가 간절해지기도 한다. 대상이나 현상이 오감으로 예리하게 느껴지는 이런 정서에서 몸의 언어가 발현되지 않을까 싶다. 결핵을 앓은 이상(김해경)이나 나병 환자였던 한하운(한태영) 등의 작품에 서린 비애가 그냥 왔을 리 없다.

  필자는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5톤 트럭과 정면충돌한 사고로 살 가망이 없다고 하였는데, 중환자실 3개월과 오랜 투병 생활을 견뎌내고 되살아난 경험이 있다. 또 부모와 형과 누이 5명의 투병을 지켜본 끝에 떠나보낸 통한이 있다. 중환자실에서 혼자 느꼈던 그 고통과 절망과 죄의식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애절함이었다. 보호자였던 아내가 어디서 주워듣고 와 예단하는 말들과 의사의 엄포성 경고들은, 그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거의 거짓이었다. 그때 처절한 시간에 갇혀 내 안에서 울린 몸의 언어는 지금도 남아 가끔 꿈틀거릴 때가 있다. 하지만 아플 때 얻은 각성은 배터리처럼 약해진다.

  그날 이불 속에서 필자를 보는 아내의 젖은 눈빛은 겁에 질려 떨렸다. 감기, 몸살이었다면, 중환자의 보호자로서 장기 입원환자들의 통반장 노릇을 했던 아내가 그런 눈빛이 될 리 없었다. 평소 대화나 접점이 별로 없었어도 이럴 때는 힘이 되어주어야 했다. 당사자가 아니기에 할 수 있는 그저 긍정적인 말은 하나 마나 하다. 체온계를 보여주며 느낌과 수치의 차이를 먼저 말한 후, 여담처럼 비행기 사고와 로또복권의 확률을 얘기했다. 이어서 모든 약은 인체에 들어가면 ‘호전반응’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엄청난 양의 주사와 약을 체험한 남편의 말이 먹혔는지 아내는 잘 잠들었고 다음 날은 좀 늦게 일어나더니 괜찮다며 배시시 웃었다.

  필자는 그 후에도 여러 번 입원 생활을 했고, 그때마다 일상에서와는 다른 관조의 사유들이 있었다. 질병은 우선적 치료의 대상이지만 걱정을 수반한다. 이때 환자와 관계자는 질병의 본질을 왜곡시키며 걱정을 가중하는 잘못된 은유에 휘둘리지 말고, 치유 의지에 힘을 보태야 한다. 아울러 일상언어에서도 은유의 연막에 가려 본바탕을 호도하고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 않는지 살펴볼 일이다. 모두가 마음 편히 백신을 맞고 하루빨리 마스크를 벗고 환히 웃으며 악수할 날이 오기를 바라며, 병실에서 쌓은 탑 하나를 소개한다. 


                       서해병원 318 

    

                   밀려오거나 흘러가거나

              선이 되지 못한 점들의 아우성

          없는 벽에 부딪혀 깨어지고 흩날리는

         모래시계 속, 부스러진 시간의 스팽글

        눈을 떠도 감아도 꿈이 어리는 비문증 밖

         보이지 않는 곡선들 엇갈려 오르내리는

            하얀 사각의 여백, 농담이 떠다니는

             남은 그림자거나 떠난 잔영이거나

                열없이 반짝이며 서걱거리다

                       그림이 되는 이명 

    

           일찍이 제 앞가림을 하는 아내를 두고

              그예 같이 잘 뻔한 여인을 두고

                어느 틈에 동떨어진 몸뚱이

                  격렬비 열도, 댓잎 타고

                     서격렬비도 언저리     


               뱃길 너머 쏟아지는 붉은 설움

               백여덟 번쯤 눈에 넣어 사르면

               문득 벽의 저쪽 낯선 나라에서

               기억 지우고 일어날 수 있을까

               바람을 잡으려 뱅뱅 도는 바람     


               외풍이 들어찬 널, 홑이불 덮고

              불뚝 서서 잠들지 못하는 더듬질

              낡은 혈관을 타고 간이역을 지나

              웃음이 허물어진 색 바랜 이야기

              시린 머릿속 흘러 가슴께 얹힐 때     


                떠나온 자궁 너머 아련한 소리

              새로 시작할 씨앗 찾아 눈 감으면

          어둠에서도 낯익은, 교차로 가운데 어름

        빈 하늘 무명의 그물에 걸린 노 없는 쪽배

     부러진 다리 삿대삼아 치환으로 가는 갇힌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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