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대 대학원 졸업 소회
십 년 세월이 -그 전의 십 년 또는 이십 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환한 빛깔과 알찬 내용으로 지나갔다. 청담동에서 십삼 년 운영하던 M웨딩홀을 넘긴 십 년 전, 나는 양면으로 악화일로에 빠져 있었다. 고혈압과 고지혈증에 소화 불량, 간 수치(γ-GTP)는 정상의 열 배를 넘어 의사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만성 두통과 어지럼증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자고 하다가 복통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 병의 원인인 스트레스와 쉴 수 없었던 까닭은 변해버린 사람 관계 때문이었다. 특히 오랫동안 믿고 맡겼던 부하 직원의 배신과 당찮은 어깃장은 병보다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함께 이룬 탑이 무너지는데, 제 욕심만 채우려는 무례와 불의에 타협과 양보는 죽기보다 싫었지만, 심지가 타는 건강 앞에 돈은 하찮은 것이었다.
돈을 빌려 그들의 요구와 채무를 정리하고, 새로운 투자자인 젊은 사장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내 이름과 함께 알려진 탑에 대한 미련으로 적은 지분의 동업자로 남았지만, 리모델링 공사는 지지부진했고 젊은 사장에게 내 이름 따윈 이미 깨진 전구였다. 악몽이 되살아나 동업 관계마저 청산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전국을 다니는 여행이었다. 보지 못해 갇힌 줄도 몰랐던 울타리를 벗어나 걷다 보면 가슴을 찌르던 상처를 훈훈한 바람이 다독여 숨통이 확 트였다. 세상은 저절로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내 이름이 꺼지기 전에 불씨를 살려야 한다는 조바심에 한동안 예식장 매물을 보러 다녔다. 그때, 관변단체 활동과 정치모임에 함께한 지인이 쉬는 참에 중국어 공부나 하자고 했다. 살아왔던 세상과 전혀 다른 별천지와 어정쩡히 만나는 순간이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하고 여러 번 눈이 동그래지면서 나는 점점 새로워졌다. 전에 살던 세상에서 나는 퍽 늙었고 어른으로 대우받았지만, 여기서는 무척 젊었고 청소나 치다꺼리도 똑같이 해야 하는 학생이었다. 실로 놀랄만한 ‘과거로 돌아가기(Back to the past)!’였기에 신이 났다. 자신에 대하여 아무런 수식이 필요치 않고, 이해타산이나 눈치를 살필 일이 없었다. 오직 공부를 위해 서로 돕고 힘이 되었다. 나는 회갑의 나이에 중문과 전국총학생회장이 되어 각 지역대학의 학우들과 교우하였으며, 중국 여행을 스무 번 했다. 그중 여섯 번은 중국 각지 유명 대학의 단기 어학연수였는데, 이는 개인적으로 하기 힘든 굉장한 경험이었다. 학생회 활동과 어학연수를 함께한 학우들은 특히 돈독한 유대를 갖고 친분과 교유를 이어가고 있다.
매진해 보지 못한 문학은 내게 늘 목마른 꿈이었다. 중문과를 마치고 늦게나마 덤벼든 방송대 대학원 문예창작콘텐트학과는 메마른 가슴에 단비가 되었다. 흠뻑 빠져든 문창콘 과정을 마치며, 10개 과목 모두 4.5의 평점에 실점 평균 98.6을 받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는 자부심이 들면서도, 세 과목은 한 단어나 한 문장의 누락, 착각, 오인으로 100점을 놓쳤다는 씁쓸함이 따랐다. 묘하게도 98점은 그러려니 하면서 99점이 더 아쉬움이 남았다. 다 끝났는데도 사람의 욕심은 그림자처럼 따르는구나 싶어, 자조(自嘲)가 비어져 나왔다. 과목마다 소논문 또는 문학작품으로 써내는 과제에 대해 –시인과 작가가 많아 그런지- 100점이 여럿인 듯했다. 그래서 나는 그저 약간 잘한 정도리라 생각했다. 실제 큰 성과는 인식의 함양과 창작 열의가 더 높아진 점이다.
코로나 사태로 학위수여식은 2월 23일 온라인으로 방송대 TV와 유튜브로 생중계하는데, 대표 수상자만 참석한다는 문자를 받고 섭섭한 마음마저도 접었다. 그런데 대학원 행정실에서 전화가 왔다. 경영대학원과 대학원 19개 학과에서 이번에 졸업하는 240명을 대표하여 학위기를 받으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예? 왜, 제가…?” 되물었더니, 통상 성적 최우수자가 대표가 된다고 했다. 얼른 믿기지 않았지만, 문학상 당선 소식을 받았을 때만큼 입이 헤벌어졌다. 졸업생이 많은 가을학기였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인데, 봄학기에 졸업하게 되어 내게 운이 닿은 듯하다. 탁월하고 열띤 학우들과 어울려 분투(奮鬪)한 과정은 그 자체가 열락(悅樂)이었기에 다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언 60대 중반을 지나는 발자취이겠다 싶어 감개무량하다. 교수님들과 원우님들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인연으로 가슴에 여미리라. 여기에 돌이켜 소회를 덧붙이자면, 지난 7년간 공부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과음 버릇은 고치지 못하였는데도 종합병원 같았던 몸의 병들이 거의 사라졌다. 그렇게 책 많이 보고 머리를 혹사하는데 외려 두통이 없어진 게 참 신기하다. 호텔지배인 할 때와 웨딩홀 대표이사 할 때, 일곱 개나 겹쳐 활동하던 단체에서 만났던 이들과는 거의 두절 되었지만, 인간적인 정과 만남의 질이 달라진 사람들과 수시로 소식을 나눈다. 또 하나는 인생의 2막에서야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과 행복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불출(不出)이라 놀림을 받더라도 자랑하고픈 아이처럼 헤벌쭉 안부를 전하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