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으로 여기는 친구가 온다. 내가 스승으로 여기는 농사꾼 친구가 이 친구를 스승으로 여기니 내겐 스승의 스승인 셈이지만, 그래서가 아니라 그의 해박한 지식과 삶을 대하는 자세와 깊이에, 또 말없이 경청하고 자신을 낮추면서도 거리를 두고 보는 객관적 식견엔 그저 고개가 끄덕여진다. 심지어 농장의 동물(닭, 오리, 거위, 염소, 소)들조차 스스럼없이 경계를 풀고 다가서는 그의 모습엔 경외감마저 든다. 내가 다가가면 잽싸게 도망부터 치는 동물들이, 그를 보면 졸졸 따라다니고 얼굴을 핥기도 하고 팔다리와 어깨에 올라타기도 한다. 그는 그걸 즐기듯 태연자약 어울린다. 한 노인이 그 모습을 보고, 상대의 기운과 같아질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노인도 그렇게는 안 된다고 했다.
스승이라고 하면 그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치지만, 그러면서 우리는 어느 한구석이 조금 통하는 친구들이다. 그는 일상에서 보고 느낀 점을 농사꾼과 내게 전화 문자로 보내준다. 그 짧은 글 속에, 그의 혜안과 통찰과 은유가 일반인이 잘 모르는 고운 우리말로 표현되는데, 소설을 쓰려고 3년 동안 단어 공부만 한 그의 어휘력은 가히 탄복할 만하다. 엉뚱한 사정으로 소설 쓰기를 접어서, 나는 우리 문학의 큰 손실이라고 떠벌리며 부추기지만, 그는 욕심이나 미련 따위와 담을 쌓은 사람이다. 나처럼 아쉬워하는 농사꾼 친구는 천 건에 달하는 그의 문자를 프린트하여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이 스승님, 학원 수업을 마치고 술을 먹다가 문득 내 생각이 나서 전화했다는데 통화는 극히 간단했다.
“갈까?”
“그래, 와!”
한마디 말에 서로의 안부와 보고픈 마음이 농밀하게 배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저녁 행사가 없는 일요일, 당직으로 남았던 예약실 직원들이 슬슬 퇴근 준비를 하는 7시 반쯤이었다. 나는 직원들이 퇴근한 후 혼자 남아 그동안 복잡한 사정으로 미뤄 둔 일들을 챙겨 볼 참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웨딩홀에 크고 작은 문제가 겹쳐 어렵게 헤쳐 나왔는데, 연이어 믿었던 동업자와 갈등이 점점 심각해졌다.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폐해지고 사람과 일에 정나미가 떨어져 연일 술을 벗 삼아 외돌았다. 일을 하려고 책상에 다가앉으면 복잡다단한 심경과 이어지는 잡생각이 엉킨 실타래처럼 머릿속과 눈앞을 어지럽혔다.
오늘도 책상에 펼쳐진 일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반가운 친구가 온다니 설레기도 해서 마음은 지옥과 천국을 오락가락한다. 지금은 선배의 간곡한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바람처럼 구름처럼 세상일에 걸림 없이 살고자 하는 친구의 행동거지는 출가한 수도자의 모습과 닮았다. 그에 비해 돈 버는 일에 매달려 궁상떨며 옴짝달싹 못 하는 내 꼴이다 보니,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그가 무턱대고 부러운 마음이 앞선다.
그러니 이 친구를 만나면 내 일상의 문제 따위 미주알고주알 하기가 머쓱해 짐짓 고답적인 얘기를 먼저 한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좇아야 할 정신(道)이나 농사꾼 친구가 실천하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삶에 관해 이러쿵저러쿵한다. 거기에 섞어 문학, 철학, 종교 방면의 내 얕은 앎을 들이밀며 질문을 한다. 스승의 대답은 늘 참신하고 색다르다. 시골 머슴 같은 순둥이 얼굴을 마주하고 술잔을 부딪치며 얘길 나누다 보면, 나는 얼마큼 현실을 벗어난 듯 안온감을 느낀다. 그러다 어차피 내 현실의 문제와 딱한 처지가 푸념처럼, 어리광처럼 섞여 들게 된다. 그때마다 이 스승의 보통 사람과 다른 짧은 답은 묘하게 위안이 되고 슬며시 웃음 짓게 된다. 비록 그의 말을 바로 실천에 옮길 수는 없을지라도.
수원에서 청담동까지 한 시간 반쯤 걸릴 텐데, 그동안 뭔 답변서 따위 일을 하느라 기다림을 망치기 싫어, 그냥 곁에 둔 책을 집어 든다. 시인, 화가, 명상가이며 아주 특별한 삶을 실천하는 사람의 시와 에세이가 실린 문고판이다. 젊은 날에 성공한 사업체를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38살의 나이에 은퇴하여 삶의 방식과 찾는 의미를 바꾸었다는 저자의 이력이 흥미로웠다. 친한 후배가 내게 맞을 거라며 전해 줬는데, 처음엔 대충 보고 뭐 그렇고 그런(실천은 어렵고 잘난 체하는) 명상 서적이려니 했다. 며칠 전 어지러운 마음을 책에 돌리려고 처음부터 다시 봤을 때, 글자가 알알이 내 속으로 콕콕 들어오며 공감에서 더 나아간 공명이 느껴져 다소 충격을 받았다. 근원적 의문인 존재의 까닭이나 삶과 죽음, 한계와 경계 등에 대해 전반적으로 뚫어주진 않지만, 대체로 공감하면서 나보다 훨씬 더 나아간 이 시대의 사람을 책으로 만나 참 반가웠다.
돌변한 동업자에게 화가 끓는 상태에서 인연이 닿은 이 책에서 ‘반성의 명상’, ‘조화의 길’, ‘몸과 마음’, ‘용서’ 등의 글이 나를 가라앉혔고, 자연과의 교감, 신앙의 자세, 윤회, 카르마 등의 글 또한 오랜만에 흔쾌히 받아들일 만한 내용들이었다. 또한 태어남과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확신하고 썩 근접하게 설명하였다. 저자는 스코트 니어링을 포함한 네 분을 스승으로 삼고 그 네 분을 있게 한 그 위의 큰 스승 석가와 예수까지 멘토로 삼는다고 했다. 이는 우리 셋이 만났을 때 늘 화제에 오르는 분들이며, 내용도 일맥상통했다. 에세이 사이사이 고명처럼 삽입된 그의 시는 고승의 오도송이나 잠언 같았는데, 두어 번 더 읽으니 나름의 깨달음을 전하려고 함축한 시적 방편이구나 싶었다.
직원들이 퇴근하며 껐던 로비의 조명을 다시 켜 둔다. 이윽고 문소리가 들리고 그가 들어선다. 나는 책을 든 채 함박 웃으며 끄덕인다. 그도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다가와 대뜸 들고 온 책을 건네준다. 우리는 가끔 책을 주고받는데, 남들이 보면 골 아프다거나, 실생활과 동떨어졌다고 할만한 책들이다. 헤벌쭉 웃으며 받아보니 <위대한 모순어록>이다. 제목에서 벌써 재미가 확 느껴져 아무 쪽이든 펼치니 역시나 기발한 재치와 해학 넘치는 문장들이 인용되어 있다. 마디 그로스는 어떻게 동서고금의 다양한 분야에서 이런 문장들을 찾고 골라 1,400여 개나 묶었을까. 또 이런 책을 골라 내게 주려고 가져온 스승의 안목은 어떤가. 춘천 그의 본가에 갔을 때 입을 헤벌리고 서가의 책들을 한참 살폈던 기억이 난다. 책을 뒤적이며 낄낄거리다 내가 읽은 책을 친구에게 디민다.
“이 책 쓴 양반, 한 소식 한 것 같아…”
우리 집에서 함께 잘 요량으로 동네로 와서 밤을 새워도 괜찮은 단골집에 앉았다. 동동주를 시켜놓고 얘기 주제는 저절로 ‘한 소식’이 된다. 모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가 깊어지니 점점 기분이 좋아지고 몸과 마음이 붕 뜨는 기분이다. 친구가 날 찾아올 때마다 거의, 나의 겹친 약속으로 다른 일행들과 섞이게 되었는데 친구는 아무려나 어디나 개의치 않고 어울렸다. 그때마다 퍽 미안했는데 오늘은 둘만의 자리를 하니 더 술맛이 나고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나는 좀 장황하게 떠드는 편이고 친구는 그래그래, 그래서? 맞장구치며 듣는 편이지만, 중간중간 맥을 짚어 자기 생각을 부드럽고 명료하게 얘기하며 대화가 이어진다. 언젠가 농사꾼 스승은 ‘글과 말은 품은 뜻을 다 전하지 못한다(書言不盡意)’라고 하며, 말글보다 눈빛과 느낌과 마음으로 통함이 더 깊고 중하다고 했는데, 지금이야말로 말과 글에 더해지는 표정과 마음의 소리와 정감까지 들리고 전해지는 듯해 거듭 친구를 빤히 보고 히죽히죽 웃는다.
우리는 선문(禪門)의 한 소식부터(이를테면; 글을 모르던 6조 혜능 조사가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금강경 독경 소리 중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한 대목을 듣고 돌연 깨우쳤다는 얘기 등) 성현들 말씀이나 책이나 예술 작품의 장면이나 다 한 소식이었다고 새삼스레 겅중거린다. 그러다가 봄이 오니 한 소식, 꽃잎 지니 한 소식, 바람 소리 한 소식, 강물 흘러 한 소식…, 하, 자연의 경이가 다 한 소식이네? 그렇지! 하며 부딪는 술잔이 기우뚱한다. 밖에 나오니 골목 가로등이 깜빡거린다. 다 잠든 세상에 우리 둘만 붕 떠 있다.
“길벗농원에 오골계 있잖아? 병아리가 열두 마리나 나왔대!”
“와! 오골계가 춘안거 들었다더니, 제대로 한 소식, 아니 열두 소식을 했네!”
생명의 발현과 변화와 소멸, 알게 모르게 연결되는 현상들, 그때와 그곳의 조건과 존재 하나하나가 다 크고 작은 소식이구나 새삼 깨닫는다. 돌아보고 살펴보면 주변이 온통 한 소식인데, 사람들은 선입견과 인식의 한계에 갇혀 모른다. 거기 있는 것은 마땅히 있는 것이고, 당연히 계절이 바뀌고 바람 불고 물 흐르고 눈비가 오니까, 그저 스쳐 지날 뿐 앞뒤를 살필 까닭이 없으니 별다른 소식으로 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자기가 구하는 한 소식은 높고 크게 저 위에서 번쩍! 오길 바라지 않을까…. 매일 소식을 주는 스승을 보며 웃는다.
부대끼는 현실의 틈에 서광처럼 찾아와 준 책과 사람 덕분에 다시 생각한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듯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그럴만한 까닭이 있을 터이다. 내가 원인일 수도 있는데, 내 이기심에 내가 옳다 여기고 나는 당연히 이해되길 바라고, 상대의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무시했을지 모른다. 다시 대화의 실마리를 찾아야겠다. 들끓었던 내 사정을 알고 달래주려고 왔을까, 한 소식으로 내게 와 준 듬직한 스승인 친구 곁에 누워 모처럼 마음이 편안해지고 조금 가벼워졌다. 선배에게 어떻게 강사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할지, 혀를 차던 친구는 금세 꿈나라로 들어가 아기처럼 잘도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