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荊軻 故事를 통해 본 司馬遷과 김삿갓>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들었다. 文學과 漢詩에 관심이 남다른 중문학도에게는 확 당기는 제목이었다. 역사적으로 매우 특별한 인물에 대해 더 알고 싶기도 하거니와, 시대와 환경이 다르면서도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는 그들을 어떻게 연결 지어 어떤 메시지를 줄 것인지 기대감이 솟았다. 강사로 나선 신겸수 교수는 K대에서 30여 년간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였는데 어느 날, 운명처럼 김삿갓(金炳淵/金笠)을 만나 그의 인생행로가 바뀌었다고 한다. 교수직을 그만두고 김삿갓 연구에 돌입하여 한자와 한시를 알기 위해 방송대 중문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수년간 전국을 돌며 김삿갓 관련 필사본과 자료를 수집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관계된 유적과 후손을 찾아다니며 탐문하고 기록하고 집대성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그의 열정과 노력에 숙연함마저 느껴졌다. 그저 불운한 방랑 시인으로만 알고 있는 한 천재의 문학적 성취에 대해 이처럼 깊이 파고든 학자는 지금껏 없었지 싶다. 더러 절규와 호소가 섞인 그의 강연을 듣고 일부분이나마 다수에게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김병연의 시는 천재적인 발상과 문학적 완성도는 차치하고, 주로 욕설 시로 알려져 풍자와 해학의 달인 정도로 치부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까닭에 더하여 폐족이 된 그의 신분과 걸인 같은 행태 등의 영향 때문인지 주류문학의 반열로 대우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나라가 거듭 바뀌는 격랑의 세월 동안 그의 유작들은 낙엽처럼 흩어졌고 후대의 학자들도 관심은 가질지언정 연구는 별로 없었다. 그나마 서울대학교 재학 중이던 이응수가 일반 시 130여 편을 수집하여 『김립시집』을 만들었는데, 뒷부분에 해석하지 못한 과거체 시 몇 편을 싣고 ‘김병연(金笠) 시의 본령(本領)은 과거체 시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 후속 작업을 하던 중 6.25 전쟁 때에 월북하고 말았다. 김일성대학의 교수를 지냈다니 연구를 더 했을 테지만, 남북 대립 상황에서 남한의 라디오 방송(12시 5분 전) ‘김삿갓 북한 방랑기’가 김일성의 화를 돋워 중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다. 여하튼 김병연의 삶과 문학의 진면목에 대한 탐색과 연구는 고사하고 외려 소설이나 전설의 대상이 되어 상상이 가미되거나 왜곡되어 알려지고 유행가의 가사로나 그 이름이 후대에 이어져 왔다.
김병연의 시에서 욕설 시는 논외로 치고 일반 시와 과거체 시로 나눌 수 있는데, 이는 창작의 동기와 목적과 형식 등이 매우 다르다. 현실비판과 자기 한과 풍자와 해학 등을 감정적으로 표출하면서 정해진 틀에 갇히지 않고 비교적 짧은 길이의 일반 시는 250여 편이 되는데 글자 수로는 6,000여 자가 된다고 한다. 이와 달리 과거체 시는 각종 과거시험에 출제되는 시제를 상정하고 그에 맞춰 기승전결의 이야기와 운율과 압운까지 한시의 형식을 완벽에 가깝게 보여주는데, 요즘으로 비유하면 ‘행정고시 논술시험의 모범답안’이 되겠다. 이 과거체 시는 350여 편이고 글자 수로는 95,000여 자가 된다고 하니 과연 김삿갓 시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한편으로는 목적성 글이고 짜맞추는 글이라는 측면에서 주류문학에서 도외시되기도 한다. 그가 東家食西家宿 방랑하며 양반 자제들에게 과거시험 지도를 많이 하여서 부분 중복되거나 수정된 작품들도 있을 것이다. 그의 시는 국문학, 고문학, 한시, 세 분야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는 탁월한 문학적, 사료적 가치가 있음은 자명한 사실인데, 관련 학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진다.
신겸수 교수는 김병연의 과거체 시 중에서 <책색두(責索頭)>를 직접 번역하여 나눠주었는데, 아마 공개적으로는 최초로 소개되는 시라고 했다. 이 시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나오는 <형가고사(荊軻故事)>와 연결된다. ‘머리를 찾는(되돌려 달라는) 것을 책망함’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 이 시는 36행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형가가 진시황 암살에 실패하고 죽은 후 저승에 가서, 거사를 위해 기꺼이 자기 머리를 내놓고 먼저 죽은 번오기를 만나 풀어내는 회한 어린 독백이다. 작자 김병연은 죽은 형가의 영혼에 감정 이입하여 여러 경우를 들어 이야기한다. 거사에 실패한 장본인으로서의 부끄러움과 희생한 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절절하면서도, 하늘의 뜻으로 이미 그렇게 된 바에 후회와 변명을 하기보다 체념과 허무로 관조하며, 꼭 번오기가 아닌 자신을 상대로 말하는 듯하다. 궁형(宮刑)을 당하고도 살아야 했던 사마천과 여러 사람의 희생을 업고도 거사를 실패한 형가와 폐족을 당하고 걸인처럼 떠도는 김병연, 각기 다른 세 사람의 비운은 세월을 넘어 천재 시인의 시로 내면이 상통되며 우리에게 다시 전해진다.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에 대하여 단편적으로 대충 읽거나 들어서 알게 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의심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그 분야의 전문가를 만났을 때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강연의 끝에 평소 약간 의아심이 들던 점에 대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김병연이 할아버지의 이름도 모르고 향시(鄕試)에 나가 <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시제를 받고, 아주 매몰차고 신랄하게 글을 써서 장원급제하여 의기양양 집에 돌아왔는데,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친할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하늘 보기 부끄러워 삿갓을 쓰고 방랑을 시작했다는 통설이 실제로 그러했던 사실인가? 김삿갓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집요하고 치밀하게 연구하고 탐착하는 신겸수 교수는 논란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칠판에 “That's not true!"라고 썼다. 그리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유 세 가지와 통설이 전해져 온 정황과 관계된 역사적 사실들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졌다. 개인의 비극이 더욱더 드라마틱하게 과장 또는 왜곡되어 전해지는 경우의 한 예라 할 수 있겠다.
김병연은 1807년에 태어났고, 1811년 12월(순조 11년)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그때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은 선천의 방어사로 발령된 지 두 달쯤 되었는데, 반란군에게 붙들려 항복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격문까지 써주었다. 다음 해 4월에 난은 평정되었고 김익순은 참형되었다. 당시 순조의 비 순원왕후의 부친 김조순을 위시하여 안동 김씨 후암공파의 세도는 막강하였다. 김익순은 김조순과 재종간이었기에 멸문의 화는 면할 수 있었으나 김익순의 가족은 폐족이 되었다. 그런 막강한 양반집의 특출한 신동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모르고 자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과거시험을 보려면 지엄하고 까다로운 녹명(錄名)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역적의 손자인 김병연은 아예 녹명에 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전해 내려오는 그 시는 누가 쓴 것일까? 관서 지방에 있는 한 서당의 훈장으로 알려진 노진으로 밝혀졌다는데, 노진에 대한 기록은 신겸수 교수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아마 세도가 집안을 악랄하게 힐난하는 내용이므로 가명을 쓰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김병연은 그 시를 읽고 피눈물을 흘렸고 이후 관서 지방으로는 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김삿갓의 시나 행색을 따라 하는 아류들은 예나 지금이나 많이 있다고 한다. 이태 전 영월에 있는 김삿갓의 묘를 찾았을 때, 묘지기처럼 거기 기거하며 방문자들과 대담을 나누던 사람이 기억났다. 그가 김병연의 후손인지 물었더니 신 교수는 자기와는 친구가 되었으며 성이 최 씨라고 했다. 김병연에게는 학균, 익균 두 아들이 있었는데, 신 교수는 그 후손들의 행방을 찾았고 매년 열리는 김씨 문중 행사에도 참석한다고 했다. 또 전라도 어디 경상도 어디에서 김삿갓 흉내를 내는 이들을 거의 알고 있으며, 그들로 인해 김삿갓이 좀 더 대중에게 알려지는 긍정적 역할을 한다며 웃었다. 김삿갓이 다소 사실과 다르게 알려진 데에는 소설가(정비석 등)들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들의 책임이 무거워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김삿갓의 문학은 더 많이 깊이 연구되어야겠지만, 그 내용이나 범위가 사대부의 전유물만이 아닌 서민문학으로서 역할 또한 지대했다. 다양한 주제를 통해 민중의 응어리와 한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맛이 있다. 이번 강연을 듣고 김삿갓의 실체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고 더욱 그의 문학에 심취할 작정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