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가 아무리 겸손하게 부인하고 남들 앞에서 자신의 야망을 아무리 낮춰 말해도 아이가 생기면 ㅡ적어도 처음에는ㅡ완벽함을 맹렬히 추구한다.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고 가장 크게 와닿은 부분이다.
그의 말대로,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가 생기면서 완벽한 부모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도 생긴 것이다. 작은 식물 하나를 키우더라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은데, 하물며 사람을 낳고 키워야 한다니.
어찌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뱃속의 작은 아기집을 확인하던 순간에도, 작고 연약한 아기를 품에 안던 순간에도, 수유하면서도 수없이 다짐했다.
아이가 보는 앞에서는 절대 싸우지 말자고.
화를 내서도 안 되고, 사랑만 듬뿍 주고 밝고 건강하게 키우자고.
외부에서 받는 상처까지 막을 순 없겠지만, 집에서만큼은 늘 평온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완벽함만을 좇아서일까, 튼튼하게 쌓았다고 믿었던 다짐들은 아이 앞에서의 첫 부부싸움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왜 싸웠는지 기억도 안 나는 사소한 다툼 하나로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동아줄처럼 붙잡고 살던 육아서들이 가시가 되어 날 찌르는 것 같았다.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거야? 그게 더 나쁘다는 거 알지?’라고 꾸짖으면서.
내가 그리던 완벽한 가족의 모습에 실금이라도 갔다간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너무도 부족한 나라서, 육아만큼은 조그만 실수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왜 우리만 이럴까? 다들 행복하게 잘 사는데’라며 다른 집단과의 비교도 서슴없이 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들은 싸움 한 번 안 해봤을 것 같고, 완벽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을 거라는 착각을 쉽게 한다.
하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다. 고로 완벽한 가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단순한 진리를 아이를 키우며 잊고 살았다.
남편과 나는 여전히 불꽃 튀는 사랑을 한다고 말할 순 없지만,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됐다.
아이를 키우는 험난한 여정을 함께하고 이겨낸 전우애(?)도 생겼다. (아직 사춘기도 안 온 초등학생들이지만. 어쨌든 둘 다 기저귀 떼고 학교도 다니고 책도 읽는다!)
이제는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완벽한 사랑은 환상이라는 걸 안다.
완벽함을 잣대로 우리의 관계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다툼이 있더라도 아이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할 줄 알고, 무작정 참기만 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안다.
한바탕 말다툼하고 더 돈독해지고 단단해지기도 하니까.
태풍이 와도 뿌리를 튼튼히 내리고 굳건히 버티는 나무처럼.
비로소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불완전함을 이해하며 함께할 준비가 된 것이다.
가족과 함께라면 어떠한 역경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둘일 때보다 셋, 셋일 때보다 넷이 된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다.